원문: Bassam Emad, “The Smart Genocide: Reflections on AI and Life from Gaza,” Jadaliyya, 2026.03.03.

허름한 침대에 누워 좁은 방을 뒤덮은 어둠을 느낀다. 우리 삶을 뒤덮고 있는 그 어둠이다. 바깥 세상과 닿아 보려 전화기를 집어 들지만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실패한다.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도시 하나가 통째로 이런 끝도 없는 사투에 빠질 수 있지?
매일매일, “선진” 세계에서의 인공지능에 관한 글들에 적힌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현실을 마주한다. 전화기 화면을 통해 그런 세상을 — 자율주행 자동자, AI 병원, 스마트 시티 같은 것들이 나오는 동영상을 — 보다가 접속이 끊어져 현실로 돌아온다. 그 작은 화면으로 AI가 번창하는, 보건의료와 교육에 혁신을 일으키는 세상을 일별한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위해서조차 하루도 빠짐 없이 싸워야 하는 가자에 살면서.
그런데 세상이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이 있다. 온갖 혁신의 동력인 그 기술이 또한 우리 머리 위 드론의 동력이기도 하다는 것. 다른 곳에서는 생명을 구하는 AI가 여기에서는 다음에는 우리의 어디에 폭탄을 떨어뜨릴지를 정밀 계산하는 데에 쓰인다는 것. 우리가 이르지 못한 진보가 아니라, 우리를 겨누는 무기가 되는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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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트 라히야Beit Lahiya에 살았다. 2024년 7월 중순에 집이 돌무더기가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도망해 셰이크 라드완Sheikh Radwan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운명은 다른 계획들도 세워두고 있었다. 2024년 8월 31일, 피신처도 무너졌다. 가자의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그 후로 여러 번을 피란하며 임시 거처를 전전했다. 이곳은 매일이 평생 같다 — 고통으로 가득하지 않은 땅은 한 뼘도 없고 구석구석이 상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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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창으로 햇살이 들어온다. 또 한 번, 낡은 태양전지판으로 전화기를 충전한다. 세상이 모르는 것이 있다. 전쟁 전에도 가자는 태양전지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옥상마다 빼곡했다 — 가자는 더없이 태양집약적인 곳이었다. 이스라엘은 가자를 봉쇄하고 전기를 끊었고 우리는 새 길을 열었다. 태양전지판은 항거였고 살아남으리라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생존마저도 표적이 되는 모양이다. 이스라엘은 체계적인 공습으로 태양전지판과 물탱크를, 삶을 가능케 하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한때 놀라운 발전이었던 것들은 이제 부서지고 작동하지도 않는 조각들로만 남아 있다. 태양전지판은 우리가 원시적이라는 증거가 아니다. 진보마저도 폭격해 우리를 석기 시대로 되돌려 보낸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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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의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사고 팔 것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지폐 한 장을 이리 잡았다 저리 잡았다 하는 남자를 보았다. 어떻게 해보기도 힘들 만큼 상한 지폐를 쓸만한 꼴로 만들어 보려 지워진 데를 색연필로 채우고 닳은 모서리를 다듬고 하는 중이었다. 인공지능이 경제를 뒤바꾸는 세상에서 우리의 현실은 정녕 이렇단 말인가.
이 만신창이 지폐는 그저 돈이 아니다. 우리다. 우리는 만신창이다. 사방이 너덜너덜해진 채 갖가지 미봉책으로, 순전히 의지로, 버틴다. 세계가 알고리즘과 데이터로 경제를 일굴 때 우리는 연필과 인내로 우리의 경제를 재건한다. 이 남자를 보면서 AI를 생각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 간극이 얼마나 벌어졌는지를 가늠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때 미래를 꿈꿨던 두 손이 지폐를 수선한다. 이제는 그저 또 하루를 연장하려 애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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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매일 학교에 갔다. 베이트 라히야의 칼리파 빈 자예드Khalifa Bin Zayed라는 학교였다.
상상해 보라. 등굣길이 어제처럼 선하다. 여름에는 흙먼지가 날리고 겨울에는 곳곳이 진창이 되는 길이었다. 길모퉁이에서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가방을 메고 똑같은 꿈을 꾸는 사촌을 기다리곤 했다.
날마다 함께 걸었고, 똑같은 노점에 멈춰 서서 팔라펠 샌드위치를 사먹었다. 튀긴 빵과 파슬리 향이 교문까지 따라왔다.
낡았지만 생기 넘치는 학교였다. 벽에는 갈라진 페인트칠, 복도에는 메아리치는 아이들의 목소리, 도시락에서는 자타za’atar와 올리브 냄새. 언젠가 선생님이 말했다. “그들도 너희들이 배운 것을 빼앗아 가지는 못한다.” 우리는 그 말을 믿었다. 봉쇄와 점령 속에서도 가자는 배움의 횃불이었다. 그 말도 믿었다.
지금도 동네에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 빵이 있기를 기도하며 빵집에 간다. 뭐라도 쓸만한 것을 찾아 폐허에 간다. 매일 아침 함께 등교했던 사촌은 이제 없다. 전쟁이 그를 데려갔다. 한때 책을 지고 다녔던 아이들이 지금 지고 있는 거라곤 이 전쟁의 무게 뿐이다. “어른이 되면 나는 무엇이 될까?” 예전에 아이들의 눈에는 이런 물음이 어려 있었다. 이제는 다르다. “내가 어른이 되기는 할까?”
바깥 세상에서는 교수들이 학생들이 AI를 너무 많이 쓴다며 공부에 해가 될 거라 걱정한다. 가자의 학생들은 겨우 숙제 하나 제출하려고 무선인터넷이 되는 곳을 찾아 몇 마일을 걷는다. 한때 희망으로 눈을 반짝였던 아이들의 얼굴에 다음 끼니 걱정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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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몸을 녹이려 불 지피기에 도전했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추워서가 아니라 라이터를 구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집에 쌓여 있었던, 모퉁이 두카나dukana에서 수백 개씩 팔았던 라이터들이 생각 났다. 예전의 삶에서는 너무도 별 것 아니었던 도구가 한 순간에 애타게 찾아다녀야 하는 기술이 되어버렸다.
창문으로 거리의 삶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언젠가 읽었던 인공지능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요리하는 로봇, 자율주행 자동차, 인간보다 빠르게 병을 진단하는 의료 기기. 우리는 불을 지필 라이터 하나도 구하기 힘든데, 어떻게 세상은 이런 세상을 코앞에 두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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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저절로 돌아가는 지능적 환경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이야길 들으면 궁금해진다. 가자에 있는 우리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나? 하지만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가진 것, 그래서 우리에게 겨누고 있는 것들이 문제다. 우리 위의 드론이 “스마트”하다. 내 사촌의 집을 무너뜨린 폭탄이 스마트하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를 계산하는 시스템이 스마트하다.
다른 데서는 보건의료와 경제를 혁명하는 데 쓰이는 인공지능이 여기서는 살해를 혁명하는 데 쓰인다. 매일 이런 질문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세상이 우리를 두고 — 그리고 우리를 밟고 — 나아가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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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기술이 그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초 필수재임을 상기시킨다. 세계는 인공지능 시대를 향해 전진하는데 가자는 가장 단순한 필수품조차 없는 세상에 멈춰 있다. 하지만 이 어둠의 심장부에는 여전히 희망이 살아 있다. 우리가 가진 도구들은 보잘것 없대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속에, 이런 역경을 견디는 가자의 힘에.
언젠가는 가자가 온 세계를 이끄는 영감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가자는 암담하기 그지 없는 경고장이다. 이곳에서 인공지능은 진보의 도구가 아니라 절멸의 메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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