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13일 오전 4시 30분 경, 관악구 봉천사거리. 서울대입구역 3번 출구 앞에 있던 노점상들의 포장마차와 천막농성장이 싸그리 철거되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100 여 명 용역 철거반에 의해서였다. 주말에 이어 초파일이 있었던 연휴의 끝물, 천막은 단 한 명의 사람만이 지키고 있었다. 초토화된 그 곳에는 빈자리만이 휑하니 남았을 뿐이었다. 옆에 있는 지하철역 입구 공사장을 가린 함석판이 유난히 높아보였다.
다음날인 14일 오전에, 노점상인들은 자신의 마차가 없어졌음을 알고서도 꾸역꾸역 출근하기 시작했다. 마음같아서는 얼른 구청으로 달려가 한 판 싸움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재판에 회부된 고소고발 건 수가 너무도 많았다. 그야말로 꾸역꾸역 모여,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경비실 앞을 지나기도 전에 막혀버리는 해고 노동자들의 출근 투쟁을 노점상들 역시 하고 있었다.
노점의 철거는 서울시의 주요 정책이자 관악구의 시범 사업인 ‘디자인 거리 조성’을 위한 예비 작업이었다. 걷고 싶은 거리, 노점 없는 거리를 만들고자 한다고 했다. 이미 행해졌어야 할 철거이나, 달포 쯤 전에 십수일 천막 농성을 한 끝에 구청에서 당분간은 건들지 않겠노라 약조를 했던 것이었다. 그 ‘당분간’이 어제자로 끝나버린 것이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구청에서의 약조가 있었을 때 노점상들은, 한동안 잠잠한 후 한차례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 그것이 약간 당겨졌을 뿐이다. 5월이 가기 전에 올 줄은 알았지만, 연휴 끝의 새벽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어차피 할 싸움이라면,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점상 연합의 지역 회원들을 비롯해 다른 지역의 회원들, 그리고 회원들이 키우는 개까지가 대낮 출근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저녁이면 다른 지역의 회원들은 장사를 하러 돌아가야 할 것이다. 철거당한 몇 안되는 상인들만의 힘으로 장사를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용역반이 언제 올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점 마차가 있던 자리에 구청에서는 화분을 가져다 놓았다. 키작은 전나무를 담은 화분이었다. 노점상인들의 허리까지 오는 높이였다. 그나무들의 운명만큼이나 노점상인들의 운명은 애처로웠다.
Stop Crackdown, 광화문 교보문고 앞
반갑습니다, 대학생사람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종주라고 합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4 년 째,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인문학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인데요, 저는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의 삶에 관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국문학의 역사를 살펴 보면, 고대에는 이 땅에서 신이 중심이었고 중세에는 나라가 중심이었으며 그 이후에는 민족이 중심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국문학은 문학을 통해서 문화를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문화와 관련해서, 요즘 정부에서 다문화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 게 눈에 띕니다. 오늘 올림픽 공원에서는 문화관광부 주최의 다문화축제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문화 다양성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모아서 각 나라의 문화나 음식 등을 체험할 수 있는 행사였습니다. 그 축제에 초정받은 사람들 중에는 분명,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네시아 등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땅에서 무려 16년 동안 일했던 토르나 위원장은 과연 이 나라에 어떠한 문화적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요. 이 나라의 말을 배우고, 일을 배우고, 한참을 이 땅에 살았지만 그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문화를, 자신이라는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 채 그저 일하며, 돈조차 받지 못해도 그저 일하며 그는 노예처럼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노동자가 미등록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지금 감옥에 가 있습니다.
축제가 벌어지는 동안, 또 한 쪽에서는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네시아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찾취 당하고 탄압받고 있습니다. 돈을 벌지 못해서, 폭력과 욕설을 참을 수 없어서 작업장을 이탈했다는 이유로, 등록기한을 넘기고도 일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불법 체류자라는 딱지를 달고 살고 있습니다. 법을 어기고 잘못을 저질렀다면 감옥에 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 본국에 돌아갈 뱃삯이나 비행기삭을 벌지 못했던 것, 임금체불과 폭력을 참지 못했던 것, 혹은 이 나라가 너무 좋아 떠나지 못했던 것, 그 이상의 어떤 죄가 있습니까?
정작 죄는 그들을 속여서 데려오고, 그들을 착취하고 탄압한 이 나라가 저지르고 있습니다. 길을 가시는 분들 중에도 여수에서 있었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화재 속에서 문도 열어주지 않아 타 죽어야만 할 만큼의 죄를 과연 그들이 지었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저기 서명판에 서명을 해 주십시오.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그리고 운동에 지지를 보내 주십시오.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노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광화문 앞에서 있었던 이주노조 탄압규탄 촛불집회에서 한 발언. 갑작스레 요청받은 것이라, 며칠전의 발언보다 훨씬 더 버벅거렸다. 이번에도 역시나 약간의 거짓…을 섞어서. 버벅거린 말들을 글로 주워 모으느라 좀 허술하지만, 대강 저렇게 이야기했다. 촛불집회 후에는 청계광장으로 이동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인파를 향해 피케팅. 나는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Stop Crack Down!
지난 5월 3일, 두 명의 지도부가 연행된 다음 날 오전에 있었던 기자회견 때도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가 너무도 지루했습니다. 지난 해 11월, 3인 지도부가 연행되었을 때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도부는 표적 단속으로 연행되었고, 그래서 모인 우리는 적었습니다. 심지어 모인 사람들의 얼굴까지도 그대로였습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여기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너무도 지루했지만, 이 사회 가장 낮은 곳에 연대하겠다는 결심과,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계속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서는 성명을 썼습니다. 다 쓴 성명을 학생회 홈페이지와, 다른 제가 속한 모임들의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또 한 번 고민을 했습니다. 광우병이니, 의료 민영화니 하는 정부의 엄청난 정책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미 가득 찬 게시판에 이 글을 올리면 과연 누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이번 정부, 실용 정부라는 이름을 걸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정책을 멋대로 실시해 나라를 뒤흔든다면, 국민들이 맘 편히 살지 못하고 신경 쓰이게 만든다면 그것은 실용이 아닙니다. 16년 동안, 사고 한 번 치지 않고―정말 나쁜 짓 한 번 않고 살아 온 이주 노동자 한 명을 잡기 위해 몇 달을 감시하고, 미행하고, 열 명 넘는 사람을 투입한다면 그것은 실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부에서 실용적인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앞에 있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이름입니다. 보통 정부에서 뭘 하면, 온갖 좋은 말로 거창한 이름을 지어 붙이는데, 여기는 딱 있는 만큼만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름 그대로, 드나드는 사람의 명단을 작성해 관리하고, 나가지 않는 사람을 잡아다 내보낼 뿐인 이 곳을 우리가 바꿉시다. 들어 오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노동하고 여행할 수 있도록, 노동권을 보장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사무소로 우리가 만듭시다.지난 5월 1일 메이데이와 그 전날 4월 30일일의 문화제 무대에서 토르나 동지는 ‘이주노동자 운동이 반신자유주의 운동이고, 이주노동자 운동이 비정규직 철폐운동’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투쟁이 중요한 투쟁이고 그렇기에 많은 연대를 해달라는 뜻이었겠지만 단순히 그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와, 저 더러운 정권에 대항하는 이 땅의 투쟁이 하나로 모여 싸워야 함을 말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적은 숫자지만, 이 자리에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빈민, 철거민, 해고노동자, 학생―자본과 정권에 맞서 곳곳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여기 이 우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다른 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들에게 연대를 호소합시다. 또한 그들이 우리를 외면할 수 없도록, 우리가 먼저 열심히 연대합시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모으고 투쟁을 모은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열심히 투쟁하시는 분들 앞에서 길게 이야기를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구호 하나 하고 이만 들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저기 사무소나, 또 저기 대통령이나 잘 나가는 나라들만 대하고 굳이 거기 가서 남의 나라 대통령 차나 몰아주고 하다보니 우리말을 잊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물론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이야기를 전해야겠지만, 때로는 저들의 말로도 이야기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영어를 섞은 구호 하나 외쳐 봅시다. Stop Crackdown! 이주 노조 탄압 중단하라! 이주노동자에 대한 모든 탄압이 없어지고, 국적에 상관없이 노동권과 인권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그날까지 열심히 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했다. 물론 저렇게 술술 말하진 않았고, 더듬거렸지만 대충 저런 내용이었다. 대체로는 진실을 이야기했고, 때로는 약간의 과장과 축소, 혹은 완곡어법을 사용했다. 정작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할 사람은 거기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자리 역시 지루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혼자서 깃발을 들고 있었다. 비에 젖고 바람에 날리는 깃발이 나를 흔들었다. Stop Crackdown, 사실 저 구호를 떠 올린 것은 앞에 앉은 이가 들고 있던 피켓을 보고서였다. 이주노조에서 만든 피켓이었고, 어느 나이 많은 철거민이 들고 있었다. 배운 것 없는 이들이 과연 그 말을 알아 들을까, 따라 할 수는 있을까를 걱정하느라 사설이 길어졌다. 정작 구호를 외치고서는, 그들이 따라하는지 어쩌는지를 살피지 못했다. 정말로 사실은, 구호로 끝낼 마음이 없었지만, 혼자 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 뿐이었다.
M’aidez Mayday!
"이주노동자 운동이 반신자유주의 운동이고, 이주 노동자 운동이 비정규직 철폐 운동입니다."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토르너 위원장은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주최의 118주년 국제노동절 기념대회의 무대 위에서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학로에서의 일이었다. 힘 있고 뜨거운 목소리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구걸이고 또 애원이었다. 토르너 위원장은 지난 해 겨울에 표적 연행 후 강제출국 당한 까지만 위원장에 이어, 얼마 전인 4월 6일 비밀리의 총회를 통해 새로 선출된 이였다. 까지만을 비롯해 라주, 마숨, 세 명의 지도부가 연행되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몇 번의 기자회견(을 빙자한 작은 집회)과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 있는 기독교 회관에서의 농성 뿐이었다. 연행된 이들이 구금된 청주 보호 감호소 앞에서 문을 막아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몇몇의 사회운동단체들이 함께 했지만, 사실 사무실의 상근자들 이외에 실제로 올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들은 단속을 피하느라 나설 수 없었고, 그 외에 힘을 실어 주는 곳은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임 위원장은 숫제 애원에 가까운 연설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돕는 것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외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명분이 없이는 남의 일을 잘 돕지 않는 수많은 이들의 앞에서였다. 자신이 서 있던 무대에 올라 온 대부분은 대공장 노동자, 사상 초유의 연대 투쟁을 진행중인 노조의 위원장, 혹은 어느 정당의 대표이거나 국회의원 쯤 되는 사람들이었기에, 모두들 반신자유주의 투쟁, 비정규직 철폐 투쟁에 있어서 한 가락 씩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처럼,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외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나 큰 일인지, 얼마나 장한 일인지를 자랑할 뿐이었다. 민주노총 소속의 작은 노조 위원장은 그렇게, 그날 결의되던 총력 투쟁에 자신들의 투쟁이 조금이라도 낄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무대가 보이지 않는, 행렬의 맨 뒤에서 듣기에는 한국인의 것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또박또박하고 논리정연한 연설이었다.
그 행렬들 사이에서는 어느 공장의 신생 노조, 무슨무슨 투쟁을 위한 위원회 따위의 문구가 적힌 조끼를 입거나 피켓을 든 사람들이 유인물을 뿌리고 모금함을 돌리고 있었다. 노동자들도 있고 학생들도 있었다. 노동절 기념대회의 화려한 무대에 올라갈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세계를 바꾸는 투쟁에 나름대로 몸담고 있지만, 그 소득에 있어서의 지분을 아직 얻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수십 개의 스피커를 타고 쩌렁쩌렁 울려 나오는 연설들을 뒤로 하고 그들은 나름의 살 길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언론의 관심을 받기 위해 행인들이 많은 거리로 나설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당장 앞에 줄 지어 앉아 있는 ‘동지’들의 관심을 얻는 것이 우선의 급선무였다. 없는 돈을 그러모아 얼마 씩을 인쇄한 유인물들이 손에 손을 거쳐 사람들에게 나누어졌고 파도타기를 하듯 하나하나 앉은 이들의 엉덩이 밑으로 깔개가 되어 들어갔다. 모금함으로 모인 얼마간의 돈이 곧 겪게 될 운명이었다.
다음날인 5월 2일, 민주노총의 행사에는 관심이 없던 어떤 사람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민주노총 역시도 이야기하던, 대통령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 허용을 규탄하는 집회였다. 만 명이 모였다고도 했고 이만 명이 모였다고도 했다. 그 모임을 처음 발의한 어느 고등학생은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토르너 위원장은 임기를 채 한 달도 채우지 못한 채, 법무부의 요원들에 의해 팔이 꺾이고 차에 실렸다. 단속을 피해 묵고 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실 앞에서의 일이었다. 삼십 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소부르 부위원장 역시 연행되고 말았다. 단속을 피해 선출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고, 사는 집조차도 쉽게 알 수 없도록 생활하던 사람이었다. 보증금도 없는 월세 십만 원짜리 방에서 그가 연행되었다는 사실은, 옆집 할아버지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청주의 보호감호소로 이송된 그들은, 전화를 통해 노조를 잘 지켜 달라고 남은 이들에게 신신당부했다.
5월 3일에는 지난 해 겨울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기자회견이 출입국사무소 앞에서 열렸다. 걸려 있는 사안도, 참가하는 단체도, 심지어 단체를 대표해 온 인물의 면면들까지도 그대로였다. 다만 그들의 표정이 좀 더 침통해져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분개했지만 수가 적었다. 정문을 막아선 경찰의 지휘관은 그들을 보며, 한 시간 뒤면 다들 그냥 돌아갈 테니 자극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당부했다. 정말로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조용히 돌아갔다. 비록 한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 동안 문 앞을 막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오는 차에 길을 내어 주었고 막힌 인도를 보며 짜증내는 행인에게 사과했다. 세계 노동절 이틀 후, 대한민국을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 친구들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M’aidez, m’aidez, 마침 커다란 배가 앞을 지나고 있었지만 조그만 난파선의 조난 신호는 그까지는 닿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은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쏘아 올릴 준비를 했다.
황새울 이야기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 그곳에 나는 두 번을 가보았습니다. 대추리와 도두리, 둘 중 어느 곳에 가 본 것인지는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대추 초등학교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는 것 정도만을 알 뿐입니다. 한 번은 2005년 7월 11일 평택 평화 대행진이라는, 미군기지 주변을 인간 띠로 에워싸는 형식의 집회 때였고, 또 한 번은 같은 해 한여름의 "평화의 종이학" 이라는 실천단 활동 때였습니다. 실천단 활동 중 방문한 나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아직도 친구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환히 웃고 있습니다. 무대와 마이크가 어색해서 나는 웃고 있었지만, 어떤 말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7월 11일에 오고 두번 째 오는 것인데, 이 너르고 푸른 들을 타인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그것도 전쟁을 위한 미군기지에 내어주는 것은 너무도 아깝다―이곳을 꼭 지키자, 나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곳에 포크레인이 들이닥쳐 땅을 파헤치던 저녁, 평택이 고향인 가수 정태춘 씨가 진흙탕에 빠지고, 마을에 사는 노인들을 경찰들이 짐짝처럼 들어 나르던 날 나는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반 학회를 마치고, 뒤풀이 후에 몇 안 남은 인원들과 2차를 가서 라면을 삼키며 티브이를 보고 있었습니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포크레인과 진흙을 보며 나는 라면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을 지키기는커녕 지켜보지조차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저 라면을 삼킬 뿐이었습니다. 내가 라면을 삼켰던 그 술집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내가 티브이를 통해 보았던 그 마을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시간을 내어 평택엘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광명에 다시 다녀왔던 것처럼,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평택에를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지켜보지 못한 그 땅에 들어선 무서운 쇳덩이들을 직접 보고, 마음에 담아 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