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Ellen Samuels, “Six Ways of Looking at Crip Time,” Disability Studies Quarterly, Vol 37, No 3 (2017).
불구의 시간을 보는 여섯 가지 방식
엘런 새뮤얼스
Ellen Samuels
장애가 있는 이들이 불구의 시간이란 말을 쓰는 건 한편으로는 우리가 늘 늦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에 비해 수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경우도 있겠고 [휠체어 이용자 등이] 접근할 수 있는 지하철역 입구가 잠겨 있는 경우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구의 시간이란 보다 아름답고 너그러운 무언가를 뜻하는 말이다. 나의 친구 마거릿 프라이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규범적인 시간 틀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우리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업무 시간표나 데드라인, 혹은 그저 언제 자고 언제 깨는지 같은 것들에 있어서 말이다. 나의 친구 엘리슨 케이퍼는 “불구의 시간은 장애가 있는 몸body과 정신mind을 비틀어 시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계를 비틀어 장애가 있는 몸과 정신에 맞춘다”고 말한다. 나는 오래 전에 이 아름다운 개념을 끌어안았고, 내 고유의 “정상”을 규정할 수 있게 해주는 불구의 시간에 안겨 살고 있다.
1995년 여름, 어느 진료실에 앉아 있었던 때로 돌아가곤 한다. 나는 스물셋이었고 장애를 수반하는 질환의 세계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건강 문제가 있는 사람에서 ― 아마도 해결할 수 없는 ― 문제 자체가 되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끔찍한 문턱을 넘었던 것이다. 늘 통증이 있고 체중은 줄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심장은 두근거리는 이유를 찾아 여러 달을 보내고 여러 의사를 거친 끝에 이 정신과 의사를 만났다. 다들 그랬듯 그도 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공감을 표했고 기꺼이 들어 주었다.
불구의 시간은 시간 여행이다. 장애와 질환은 우리를 규범적인 생애 단계를 따르는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시간에서 떼내어서는 웜홀로 던져 넣는다. 방향은 제멋대로에 급발진과 급정거로 가득하고 지지부진하다가도 일순 끝나버리는 곳이다. 젊은 나이에 노인성 손상과 씨름하는 이들이 있다. 몇 살을 먹든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는 이들이 있다. 질환을 다루는 의료의 언어는 만성, 진행성, 말기니 하는, 재발이니 몇 기期니 하는 말들로 다시금 선형성을 부과하려 한다. 하지만 불구의 시간을 살아가는 몸을 가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결코 선형적이지 않음을. 그리고 조용히 ― 어쩌면 딱히 조용하지는 않게 ― 화낸다. 규범적 시간이라는 지붕 아래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차분한 직진에.
나는 체육관에 있는 치료용 온수 풀에서 수영을 한다. 대개 60대, 70대, 80대인 사람들과 함께다. 나를 곁눈질하는 그들의 시선은 때로는 공격적이고 때로는 호기심이 어려 있다. 우리 자리에서 뭐하는 거야? 젊어 보이고 건강해 보이는, 빠릿빠릿하게 헤엄치는 사람들이랑 같이 일반 풀을 쓰지 않는 이유가 뭐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질문에 정중하게 답한다. 하지만 티내지 않는 것도 있다.
나는 그들이 싫다.
내 몸의 이야기를 캐묻고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다. 예순둘이 되어 결국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그만두게 된 이야기, 더는 등산을 못하는 것이 얼마나 좌절스러운가 하는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들이 온전히 건강하게 보낸 수십 년이, 그들의 무의식적인 특권이, 그들은 노인이 되어서야 등산이나 자전거타기나 뜨개질을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뭐가 됐든 삼삼오오 짝을 지어 풀장 주위를 돌며 나누는 화제들이 싫다. 물론 부당하다. 나는 그들의 삶을, 그들이 잃은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화는 속에 담아 둔다.
비탄은 속에 담아 둔다.
불구의 시간은 비탄의 시간이다. 상실의 시간이자 그에 따르는 세찬 역류의 시간이다. 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것은 스무 살 때였다. 십오 년을 암과 함께 살았고, 쉰둘이었다. 하지만 이런 숫자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느려지고 부풀어올랐던 나날들에 대해서는, 그 후로 켜켜이 쌓인 여러 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언제나 너무 많으면서도 끝내 모자라다. 두 해 후 내가 아파지자 의사들도 친척들도 그것이 내가 묻어 두었던 비판의 결과, 애도를 멈추고 내 삶을 이어가기를 거부한 데 따른 결과라고 믿고 싶어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Mourning and Melancholia」에서 “정상적인 애도”는 저절로 해소되며 아무런 개입도 요하지 않는다고 썼다. 우울만이, 끝없는 우울, 해소되지 않는 우울만이 병이라 할 수 있다. 심신bodymind이 상실된 대상을 놓아 보내기를 거부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일그러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워하면서도 어머니는 보낼 수 있었다. 건강했던 나 자신에 관한 기억을 놓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새로운 증상이나 새로운 손상이 생길 때마다 나는 상실된 시간을, 아직 오지도 않은 상실된 시간을 비통해 한다. 완치를 바란다는 말이 아니다. 전혀. 나는 나 자신이면서도 나 자신이 아니기를 바란다. 만성 통증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역설적인 소망에 사로잡히리라. 나는 시간이 갈라져 내 삶에 두 갈래 길을 내어주기를, 내가 뜻대로 그 둘 사이를 앞뒤로 오갈 수 있기를 바란다.
데이너 루시아노는 『비탄을 정돈하기: 신성한 시간과 19세기 미국에서의 몸Arranging Grief: Sacred Time and the Body in Nineteenth-Century America』에서 근대성과 함께 비탄의 시간이 진보적이고 기계적인 시간과 병치되는 시간적, 정서적 상태로서 등장한 궤적을 좇는다. 그는 “비탄은 시간에 ‘인간적’ 차원, 생산적이기보다는 회고적이며 선형적이기보다는 반복적이고 전진하기보다는 반추하는 차원을 부여하려 하는 감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고 쓴다. 엘리슨과 마거릿이 말한 불구의 시간 개념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엘리슨이나 마거릿, 나와 같은 장애 연구자들은 이러한 불구의 시간이라는 관념을 상찬하곤 한다. 그 비선형적 유연성을 즐거워 하곤, 그 힘과 가능성을 탐색하곤 한다. 우리가 퀴어 연구자 헤더 러브가 “역행해 느끼기feeling backward”라고 칭한 바 또한 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우리가 저 상찬을, 저 새로운 존재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또한 스스로로 하여금 불구의 시간의 고통, 그 우울, 그 엉망임brokenness을 느낄 수 있게 한다면?
불구의 시간은 조각난broken 시간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몸과 정신을 조각내고 그 틈에 새로운 리듬, 세계를 사유하고 느끼고 돌아다니는 새로운 방식을 끼워 넣게 만든다. 원치 않을 때조차, 계속 나아가기를, 전진하기를 원할 때조차 쉬어 갈take a break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우리의 심신을 너무도 꼼꼼하게, 너무도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신을 둘로 나누고 몸을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는 동시에 우리로부터 떼어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 문화 속에서 말이다. 불구의 시간은 우리 몸의 조각난 언어를 경청하고 번역하며 그 말들을 받드는 것을 뜻한다.
그 정신과의의 진료실에 앉았던 이듬해, 상실한 것을 인정하는 법을 배운 나는 다시 한 번 건강을, 혹은 내가 건강이라 믿고 싶었던 것을 향한 길에 올랐다. 매일 태극권 수련을 했다. 느리고 기품 있게 세계를 통과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의 동작을 이루는 온갖 움직임이 타이밍을 맞추어 흘러가게 하는 법을 배웠다. 내 몸으로 사는 것이, 다른 이들의 몸과 함께 하는 것이, 전에 없이 편안했다.
이내 전부 무너졌다. 태극권 강사는 엉덩이의 균형을 맞추는 법을 줄곧 설명했고 줄곧 나를 웃기다는 듯이 쳐다보며 “뭐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틀렸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책장에 꽂힌 어느 책을 집으려는데 엉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통증에 다리가 찌릿거리더니 이내 감각이 사라졌다. 한순간이었다. 영원이었다. 몇 걸음이나마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 여섯 달이나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고 전처럼 걸을 수 있게 되지는 못했다. 깊이 사랑했고 나를 고쳐주리라 믿었던 태극권이 오히려 나를 망가뜨렸다broke. 그것과 내 몸은 가는 길이 달랐다.
그렇기에 나는, 앞이 아니라 뒤를 향했다. 건강이라는 상태를 향해서가 아니라, 장애의 세계, 이제는 내 것으로 여기게 되었던 그 세계를 향해 더 멀리. 몇 번이고 아파지기를 반복하던 사람에서 항상 아픈 사람이 되었다. 내부의 시계가, 내 것과는 다른 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의 외적 관례가 아니라 스스로의 신체적 상태에 맞춰져 있는 사람.
불구의 시간은 아픈 시간이다. 미국에서 종일제 근무 시간으로 규정되는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 주 40시간을 일하는 사람이라면 소정의 병가 일수가 쌓인다. 기이한 셈법이 있다. 여덟 시간을 일할 때마다 병가 한 시간이 쌓이는 식이다. 아니면 스무 시간마다, 혹은 마흔 시간마다. 1:1 비율인 경우는 결코 없다. 아플 시간을 벌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너무 자주 너무 아프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전제다.
신체적으로 더는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 하는 일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은 나는 미래가 두려워졌다. 심지어 나는 장애인 사회보장 자격이 될 만큼의 노동시간도 채우지 못했다. 내가 찾은 해법은 학계로 돌아가는 것, 대학원에 가서 박사 학위를 따고 혹시나 운이 좋다면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불구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어 보이는 유일한 길이었다. 여전히 그렇다.
대학원에서 보낸 시간은 대부분이 아픈 시간이었다. 특히 첫 두 해에는, 이따금 몸을 끌고 수업에 출석하고 과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생활은 학교에 갔다가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과제를 하는 것으로 구성됐다. 가벼운 노트북과 무선 인터넷이 생기기 전에는 가능한 한 누워서 일했다. 강의실 바닥에 엎드린 채, 다른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리저리 긁힌 책상 옆면을 응시했다.
좋았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의 리듬이 좋았고 이 시간은 내 시간이기도 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힘들었지만,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혼자였지만, 그랬다.
불구의 시간은 쓰기의 시간이다. 나는 불구의 시간 속에서 불구의 시간에 관한 글을 한 편 쓰고 있다. 이제 여러 해째다. 과연 끝마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한 대목에서는 작가 로라 힐렌브랜드Lauren Hillenbrand가 만성 피로 증후군으로 심각하게 아픈 가운데 베스트셀러가 된 『바다건빵Seabiscuit』을 쓴 이야기를 인용해 두었다.
화면을 응시하노라면 온 방이 말도 안 되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기에 하루에 겨우 두어 단락만 쓸 수 있었다. 빙빙 도는 걸 못 견딜 지경이 되면 마당에 베개를 가져다 잔디에 눕곤 했다. … 너무 피곤해 책상에 앉을 수 없을 땐 침대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너무 어지러워 활자를 읽을 수 없을 땐 엎드려서 눈을 감은 채 썼다.
힐렌브랜드의 경험이 담긴 이 에세이는 《뉴요커》에 실렸고, 잠깐은 일부 교양대중이 이 비밀투성이 질환에 대해, 나아가 만성 질환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위상은 그녀의 이야기에 일종의 신뢰감을 주었다. 수많은 만성 질환자가 얻어내고자 여러 해를 고전했던 그 신뢰감을.
힐렌브랜드는 자신의 방식을 문화적으로 타당한valid 것으로 써 낼 수 있었다. 비록 그녀 자신은 여전히 신체적으로는 병약했지만invalid 말이다. 그녀가 성공을 거둔 후 나는 언제 베스트셀러를 쓸 거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마치 으포라 윈프리가 북클럽에 골라 넣을 만한 무언가를 쓰는 것이 궁극의 성취, 내 몸의 실패에 대한 완벽한 해법이라도 되는 양 그랬다. 나는, 힐렌브랜드와 마찬가지로, 토크쇼에 출연하기에는 너무 아팠는데도 말이다.
다만, 내가 베스트셀러를 쓴다면 뱀파이어에 관한 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요즘은 좀비가 더 유행인 것 같다. 종종 ― 특히 열 시간 이상 자지 못한 날엔 ― 내가 좀비인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뱀파이어다. 불구의 시간은 뱀파이어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깊은 밤과 의식 없는 낮의 시간, 평범한 세계의 활동 시간과는 어긋나는 일과표를 따르는 시간이다. 때로는 몸이 관처럼 우리를 속박한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한정 흐려진다는 뜻이다. 《버피Buffy》의 천사나 《트루 블러드True Blood》의 빌처럼, 우리는 시간에 맞지 않게 살아간다. 어둠 속에 잔뜩 웅크린 채, 시곗바늘에 맞추어 흘러가는 타인들의 삶을 바라본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이를 먹고도 거짓말처럼, 고통스러우리만치 젊어 보이기도 한다. 뼈에 사무치도록 피곤한 일.
내게 장애를 안긴 병은 체내의 콜라겐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유전자 질환이다. 관절과 힘줄, 심장과 내장에는 나쁜 소식이지만 40대가 되도록 여전히 부드럽고 주름이 없는 피부에는 그야말로 희소식이다. 끝도 없이 더 어린 나이로 오해 받는다는 뜻이다. 내 병을 진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문자 그대로 “벨벳 같은” 피부다. 젊음에 집착하는 우리네 문화에서 뱀파이어의 불로장생은 대개 좋은 것으로 여겨지며 실제로 어떤 특권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때로 나는 진지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데에, 영원한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가운데 종신 교수직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아픈 스스로를 갈아 넣는 데에 지치곤 한다.
보다 깊은 층위에서, 불구 뱀파이어로 산다는 것은 나를 다시 시간 여행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스물다섯, 내가 느끼기에는 여든다섯. 그저 다른 마흔 몇 살 지인들처럼 살고 싶은 마음. 세계의 평범한 질서에 속하고, 그에 맞아들고, 그 시간과 함께 나아나고 싶다.
계절이 가면 물드는 나뭇잎처럼, 때로 나는 자연의 일부이기를,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내 삶은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지금 나는, 불구의 시간을 산다.
참고 문헌
- Freud, Sigmund. “Mourning and Melancholia.”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ume XIV (1914-1916): On the History of the Psycho-Analytic Movement, Papers on Metapsychology and Other Works. London: The Hogarth Press, 1917. 237-258
- Hillenbrand, Lauren. “A Sudden Illness.” The New Yorker. July 7, 2003. http://www.newyorker.com/magazine/2003/07/07/a-sudden-illness
- Kafer, Alison. Feminist Queer Crip.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13.
- Love, Heather. Feeling Backward: Loss and the Politics of Queer Histor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 Luciano, Dana. Arranging Grief: Sacred Time and the Body in Nineteenth-Century America.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9.
- Price, Margaret. Mad at School: Rhetorics of Mental Disability and Academic Life.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11. https://doi.org/10.3998/mpub.1612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