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2.(화)

비교적 일찍 일어났다. 열 시쯤이었을까. 샤워를 하고 버섯을 볶고 두부를 튀겼다. 다 마치고 보니 두부는 이미 상해 있었다. 전자렌지로 단호박을 익혔다. 버섯은 샐러드용 채소팩과 발사믹 소스로 버무렸다. 먹고는 또 누웠다.

빈둥거리다 보니 한 시가 넘었다. 배가 고파 와서 분식집으로. 대강 요기를 하고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분식집에서는 옆자리에 초등학생 둘이 앉았다. 자리를 잡으며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에게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를 물었다. 카페에서는 옆자리에 백일 좀 넘어 보이는 아기를 대동한 무리가 앉았다. 성인 여성 넷이 번갈아가며 아기를 안고 달랬다. 아기는 자주 울었지만 매번 조용히 울었다.

맞은편에는 너댓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동반한 일행이 앉았다. 아이는 카페를 빙빙 돌며 스피커며 벽이며를 두드렸다가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가 방석을 바닥에 깔고 머리를 박았다가 했다. 사장은 아이가 수납장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때 한 번 ― 손이 끼면 다칠 수 있으니 말려 달라고 ― 한참을 논 후에 한 번 ― 조금만 조용히 시켜 달라고 ― 그 무리의 성인에게 말을 걸었다. 두 번째로 말을 걸자 그는 죄송하다며 곧 갈 거라고 했고 정말로 이내 일어났다.

그런 걸 구경하며 곧 써야 하는 글에 참고할 자료를 읽었다. 진도는 더뎠다. 세 시간쯤 있다가 일어나 마트에 가서 쌀과 두부와 양파를 샀다. 양파를 냉장고의 애호박과 버섯과 함께 썰어 볶았다. 된장을 푼 물에 미역을 넣어 끓이는 동안 양파를 다지고 냉동실의 마늘도 다지고 고춧가루와 간장과 설탕을 섞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두부를 부친 후 양념장을 얹어 졸였다. 그 사이 언젠가 밥을 안쳤다.

찬은 다 했지만 밥이 아직이었으므로, 나가기 전에 돌린 빨래를 널었다. 원래 널려 있던 빨래를 갰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집을 나섰다. 많이 쌓여 빼 둔 빨랫감 약간, 곧 추워진다고 해서 꺼낸 가을옷 약간을 트렁크에 담아 덜덜 끌며 걸었다. 집 근처 빨랫방 건조기에서 냄새가 난다는 심증을 얻었으므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빨랫방에 가기 위해서였다.

새로 생긴 상가에 입주한 프랜차이즈 빨랫방이다. 깔끔했다. 빨래를 돌려 놓고 캔커피를 마시며 글을 조금 더 읽었다. 한 시간 조금 더 걸려 빨래를 마쳤다. 먼지 먹은 빨래 하나에서는 이번에도 냄새가 조금 났는데, 다 식히고 보니 괜찮은 것도 같았다. 열을 받으면 그런 냄새가 나는 섬유가 있는 걸까. 이 옷은 무릎담요랑 비슷해 보이는 재질이다. 저번에 냄새가 난 건 어떤 옷이었더라. 여러 옷가지에서 같은 냄새가 났던 것 같은데.

집에 돌아와서는 지난 번에 스캔 받은 필름 사진을 대강 편집했다. 지금은 자정을 삼십 분 가량 넘긴 시각. 일찍 잘까 싶다. 졸린다.

2021.10.11.(월)

또 그랬다. 점심께쯤 일어나 밥을 먹고는 다시 누웠다. 오후 느지막히 하루를 시작했다. 밥은 생선구이집에서 먹었다. 집 보러 왔을 때 가 본 적이 있는 곳이다. 이사 온 후로도 두어 번 갔는데 한 번은 일요일 휴무, 한 번은 휴가였나. 아무튼 이사 오고는 처음 먹었다. 임연수 구이와 된장찌개. 이 집에서만이 아니라 생선구이 자체를 처음 먹은 것 같기도 하다.

밥만 먹고 귀가한 건 예정한 일이었지만 다시 누운 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뒹굴거리다 자다 하다 보니 전날과 마찬가지로 하루가 거진 사라지고 없었다. 전날 읽던 글을 마저 읽었다. 불구의 시간을 보는 여섯 가지 방식(엘런 새뮤얼스, 2017). 그랬더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점심 먹고 오는 길에 쌀을 살 생각이었으나 깜빡한 탓에 곤경에 처했다. 파스타를 하려다 말고 마트에서 사 둔 누룽지를 끓였다. 밑반찬에 남은 된장국 약간을 곁들여 먹었다. 전자렌지로 익힌 단호박도.

남은 하루는 대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냈다. 그냥 누워 있거나 괜히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이미 몇 번을 돌려 본 시트콤을 조금 보거나. 그래도 시간은 잘도 가서 두어 시쯤 누웠다.

불구의 시간을 보는 여섯 가지 방식(엘런 새뮤얼스, 2017)

원문: Ellen Samuels, “Six Ways of Looking at Crip Time,” Disability Studies Quarterly, Vol 37, No 3 (2017).

불구의 시간을 보는 여섯 가지 방식[1]일라이 클레어Eli Clare, 엘리슨 케이퍼Alison Kafer, 조너 켈러Johnna Keller, 스테파니 커시바움Stephanie Kershbaum, 크리스틴 린드그렌Kristin Lindgren, 새뮤얼 … (계속)

엘런 새뮤얼스
Ellen Samuels

장애가 있는 이들이 불구의 시간이란 말을 쓰는 건 한편으로는 우리가 늘 늦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에 비해 수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경우도 있겠고 [휠체어 이용자 등이] 접근할 수 있는 지하철역 입구가 잠겨 있는 경우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구의 시간이란 보다 아름답고 너그러운 무언가를 뜻하는 말이다. 나의 친구 마거릿 프라이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규범적인 시간 틀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우리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업무 시간표나 데드라인, 혹은 그저 언제 자고 언제 깨는지 같은 것들에 있어서 말이다. 나의 친구 엘리슨 케이퍼는 “불구의 시간은 장애가 있는 몸body과 정신mind을 비틀어 시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계를 비틀어 장애가 있는 몸과 정신에 맞춘다”고 말한다. 나는 오래 전에 이 아름다운 개념을 끌어안았고, 내 고유의 “정상”을 규정할 수 있게 해주는 불구의 시간에 안겨 살고 있다.


1995년 여름, 어느 진료실에 앉아 있었던 때로 돌아가곤 한다. 나는 스물셋이었고 장애를 수반하는 질환의 세계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건강 문제가 있는 사람에서 ― 아마도 해결할 수 없는 ― 문제 자체가 되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끔찍한 문턱을 넘었던 것이다. 늘 통증이 있고 체중은 줄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심장은 두근거리는 이유를 찾아 여러 달을 보내고 여러 의사를 거친 끝에 이 정신과 의사를 만났다. 다들 그랬듯 그도 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공감을 표했고 기꺼이 들어 주었다.

불구의 시간은 시간 여행이다. 장애와 질환은 우리를 규범적인 생애 단계를 따르는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시간에서 떼내어서는 웜홀로 던져 넣는다. 방향은 제멋대로에 급발진과 급정거로 가득하고 지지부진하다가도 일순 끝나버리는 곳이다. 젊은 나이에 노인성 손상과 씨름하는 이들이 있다. 몇 살을 먹든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는 이들이 있다. 질환을 다루는 의료의 언어는 만성, 진행성, 말기니 하는, 재발이니 몇 기期니 하는 말들로 다시금 선형성을 부과하려 한다. 하지만 불구의 시간을 살아가는 몸을 가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결코 선형적이지 않음을. 그리고 조용히 ― 어쩌면 딱히 조용하지는 않게 ― 화낸다. 규범적 시간이라는 지붕 아래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차분한 직진에.

나는 체육관에 있는 치료용 온수 풀에서 수영을 한다. 대개 60대, 70대, 80대인 사람들과 함께다. 나를 곁눈질하는 그들의 시선은 때로는 공격적이고 때로는 호기심이 어려 있다. 우리 자리에서 뭐하는 거야? 젊어 보이고 건강해 보이는, 빠릿빠릿하게 헤엄치는 사람들이랑 같이 일반 풀을 쓰지 않는 이유가 뭐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질문에 정중하게 답한다. 하지만 티내지 않는 것도 있다.

나는 그들이 싫다.

내 몸의 이야기를 캐묻고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다. 예순둘이 되어 결국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그만두게 된 이야기, 더는 등산을 못하는 것이 얼마나 좌절스러운가 하는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들이 온전히 건강하게 보낸 수십 년이, 그들의 무의식적인 특권이, 그들은 노인이 되어서야 등산이나 자전거타기나 뜨개질을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뭐가 됐든 삼삼오오 짝을 지어 풀장 주위를 돌며 나누는 화제들이 싫다. 물론 부당하다. 나는 그들의 삶을, 그들이 잃은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화는 속에 담아 둔다.

비탄은 속에 담아 둔다.

불구의 시간은 비탄의 시간이다. 상실의 시간이자 그에 따르는 세찬 역류의 시간이다. 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것은 스무 살 때였다. 십오 년을 암과 함께 살았고, 쉰둘이었다. 하지만 이런 숫자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느려지고 부풀어올랐던 나날들에 대해서는, 그 후로 켜켜이 쌓인 여러 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언제나 너무 많으면서도 끝내 모자라다. 두 해 후 내가 아파지자 의사들도 친척들도 그것이 내가 묻어 두었던 비판의 결과, 애도를 멈추고 내 삶을 이어가기를 거부한 데 따른 결과라고 믿고 싶어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Mourning and Melancholia」에서 “정상적인 애도”는 저절로 해소되며 아무런 개입도 요하지 않는다고 썼다. 우울만이, 끝없는 우울, 해소되지 않는 우울만이 병이라 할 수 있다. 심신bodymind이 상실된 대상을 놓아 보내기를 거부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일그러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워하면서도 어머니는 보낼 수 있었다. 건강했던 나 자신에 관한 기억을 놓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새로운 증상이나 새로운 손상이 생길 때마다 나는 상실된 시간을, 아직 오지도 않은 상실된 시간을 비통해 한다. 완치를 바란다는 말이 아니다. 전혀. 나는 나 자신이면서도 나 자신이 아니기를 바란다. 만성 통증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역설적인 소망에 사로잡히리라. 나는 시간이 갈라져 내 삶에 두 갈래 길을 내어주기를, 내가 뜻대로 그 둘 사이를 앞뒤로 오갈 수 있기를 바란다.

데이너 루시아노는 『비탄을 정돈하기: 신성한 시간과 19세기 미국에서의 몸Arranging Grief: Sacred Time and the Body in Nineteenth-Century America』에서 근대성과 함께 비탄의 시간이 진보적이고 기계적인 시간과 병치되는 시간적, 정서적 상태로서 등장한 궤적을 좇는다. 그는 “비탄은 시간에 ‘인간적’ 차원, 생산적이기보다는 회고적이며 선형적이기보다는 반복적이고 전진하기보다는 반추하는 차원을 부여하려 하는 감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고 쓴다. 엘리슨과 마거릿이 말한 불구의 시간 개념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엘리슨이나 마거릿, 나와 같은 장애 연구자들은 이러한 불구의 시간이라는 관념을 상찬하곤 한다. 그 비선형적 유연성을 즐거워 하곤, 그 힘과 가능성을 탐색하곤 한다. 우리가 퀴어 연구자 헤더 러브가 “역행해 느끼기feeling backward”라고 칭한 바 또한 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우리가 저 상찬을, 저 새로운 존재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또한 스스로로 하여금 불구의 시간의 고통, 그 우울, 그 엉망임brokenness을 느낄 수 있게 한다면?

불구의 시간은 조각난broken 시간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몸과 정신을 조각내고 그 틈에 새로운 리듬, 세계를 사유하고 느끼고 돌아다니는 새로운 방식을 끼워 넣게 만든다. 원치 않을 때조차, 계속 나아가기를, 전진하기를 원할 때조차 쉬어 갈take a break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우리의 심신을 너무도 꼼꼼하게, 너무도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신을 둘로 나누고 몸을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는 동시에 우리로부터 떼어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 문화 속에서 말이다. 불구의 시간은 우리 몸의 조각난 언어를 경청하고 번역하며 그 말들을 받드는 것을 뜻한다.


그 정신과의의 진료실에 앉았던 이듬해, 상실한 것을 인정하는 법을 배운 나는 다시 한 번 건강을, 혹은 내가 건강이라 믿고 싶었던 것을 향한 길에 올랐다. 매일 태극권 수련을 했다. 느리고 기품 있게 세계를 통과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의 동작을 이루는 온갖 움직임이 타이밍을 맞추어 흘러가게 하는 법을 배웠다. 내 몸으로 사는 것이, 다른 이들의 몸과 함께 하는 것이, 전에 없이 편안했다.

이내 전부 무너졌다. 태극권 강사는 엉덩이의 균형을 맞추는 법을 줄곧 설명했고 줄곧 나를 웃기다는 듯이 쳐다보며 “뭐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틀렸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책장에 꽂힌 어느 책을 집으려는데 엉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통증에 다리가 찌릿거리더니 이내 감각이 사라졌다. 한순간이었다. 영원이었다. 몇 걸음이나마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 여섯 달이나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고 전처럼 걸을 수 있게 되지는 못했다. 깊이 사랑했고 나를 고쳐주리라 믿었던 태극권이 오히려 나를 망가뜨렸다broke. 그것과 내 몸은 가는 길이 달랐다.

그렇기에 나는, 앞이 아니라 뒤를 향했다. 건강이라는 상태를 향해서가 아니라, 장애의 세계, 이제는 내 것으로 여기게 되었던 그 세계를 향해 더 멀리. 몇 번이고 아파지기를 반복하던 사람에서 항상 아픈 사람이 되었다. 내부의 시계가, 내 것과는 다른 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의 외적 관례가 아니라 스스로의 신체적 상태에 맞춰져 있는 사람.

불구의 시간은 아픈 시간이다. 미국에서 종일제 근무 시간으로 규정되는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 주 40시간을 일하는 사람이라면 소정의 병가 일수가 쌓인다. 기이한 셈법이 있다. 여덟 시간을 일할 때마다 병가 한 시간이 쌓이는 식이다. 아니면 스무 시간마다, 혹은 마흔 시간마다. 1:1 비율인 경우는 결코 없다. 아플 시간을 벌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너무 자주 너무 아프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전제다.

신체적으로 더는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 하는 일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은 나는 미래가 두려워졌다. 심지어 나는 장애인 사회보장 자격이 될 만큼의 노동시간도 채우지 못했다. 내가 찾은 해법은 학계로 돌아가는 것, 대학원에 가서 박사 학위를 따고 혹시나 운이 좋다면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불구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어 보이는 유일한 길이었다. 여전히 그렇다.

대학원에서 보낸 시간은 대부분이 아픈 시간이었다. 특히 첫 두 해에는, 이따금 몸을 끌고 수업에 출석하고 과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생활은 학교에 갔다가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과제를 하는 것으로 구성됐다. 가벼운 노트북과 무선 인터넷이 생기기 전에는 가능한 한 누워서 일했다. 강의실 바닥에 엎드린 채, 다른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리저리 긁힌 책상 옆면을 응시했다.

좋았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의 리듬이 좋았고 이 시간은 내 시간이기도 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힘들었지만,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혼자였지만, 그랬다.

불구의 시간은 쓰기의 시간이다. 나는 불구의 시간 속에서 불구의 시간에 관한 글을 한 편 쓰고 있다. 이제 여러 해째다. 과연 끝마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한 대목에서는 작가 로라 힐렌브랜드Lauren Hillenbrand가 만성 피로 증후군으로 심각하게 아픈 가운데 베스트셀러가 된 『바다건빵Seabiscuit』을 쓴 이야기를 인용해 두었다.

화면을 응시하노라면 온 방이 말도 안 되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기에 하루에 겨우 두어 단락만 쓸 수 있었다. 빙빙 도는 걸 못 견딜 지경이 되면 마당에 베개를 가져다 잔디에 눕곤 했다. … 너무 피곤해 책상에 앉을 수 없을 땐 침대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너무 어지러워 활자를 읽을 수 없을 땐 엎드려서 눈을 감은 채 썼다.

힐렌브랜드의 경험이 담긴 이 에세이는 《뉴요커》에 실렸고, 잠깐은 일부 교양대중이 이 비밀투성이 질환에 대해, 나아가 만성 질환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위상은 그녀의 이야기에 일종의 신뢰감을 주었다. 수많은 만성 질환자가 얻어내고자 여러 해를 고전했던 그 신뢰감을.

힐렌브랜드는 자신의 방식을 문화적으로 타당한valid 것으로 써 낼 수 있었다. 비록 그녀 자신은 여전히 신체적으로는 병약했지만invalid 말이다. 그녀가 성공을 거둔 후 나는 언제 베스트셀러를 쓸 거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마치 으포라 윈프리가 북클럽에 골라 넣을 만한 무언가를 쓰는 것이 궁극의 성취, 내 몸의 실패에 대한 완벽한 해법이라도 되는 양 그랬다. 나는, 힐렌브랜드와 마찬가지로, 토크쇼에 출연하기에는 너무 아팠는데도 말이다.

다만, 내가 베스트셀러를 쓴다면 뱀파이어에 관한 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요즘은 좀비가 더 유행인 것 같다. 종종 ― 특히 열 시간 이상 자지 못한 날엔 ― 내가 좀비인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뱀파이어다. 불구의 시간은 뱀파이어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깊은 밤과 의식 없는 낮의 시간, 평범한 세계의 활동 시간과는 어긋나는 일과표를 따르는 시간이다. 때로는 몸이 관처럼 우리를 속박한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한정 흐려진다는 뜻이다. 《버피Buffy》의 천사나 《트루 블러드True Blood》의 빌처럼, 우리는 시간에 맞지 않게 살아간다. 어둠 속에 잔뜩 웅크린 채, 시곗바늘에 맞추어 흘러가는 타인들의 삶을 바라본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이를 먹고도 거짓말처럼, 고통스러우리만치 젊어 보이기도 한다. 뼈에 사무치도록 피곤한 일.

내게 장애를 안긴 병은 체내의 콜라겐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유전자 질환이다. 관절과 힘줄, 심장과 내장에는 나쁜 소식이지만 40대가 되도록 여전히 부드럽고 주름이 없는 피부에는 그야말로 희소식이다. 끝도 없이 더 어린 나이로 오해 받는다는 뜻이다. 내 병을 진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문자 그대로 “벨벳 같은” 피부다. 젊음에 집착하는 우리네 문화에서 뱀파이어의 불로장생은 대개 좋은 것으로 여겨지며 실제로 어떤 특권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때로 나는 진지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데에, 영원한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가운데 종신 교수직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아픈 스스로를 갈아 넣는 데에 지치곤 한다.

보다 깊은 층위에서, 불구 뱀파이어로 산다는 것은 나를 다시 시간 여행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스물다섯, 내가 느끼기에는 여든다섯. 그저 다른 마흔 몇 살 지인들처럼 살고 싶은 마음. 세계의 평범한 질서에 속하고, 그에 맞아들고, 그 시간과 함께 나아나고 싶다.

계절이 가면 물드는 나뭇잎처럼, 때로 나는 자연의 일부이기를,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내 삶은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지금 나는, 불구의 시간을 산다.

참고 문헌
  • Freud, Sigmund. “Mourning and Melancholia.”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ume XIV (1914-1916): On the History of the Psycho-Analytic Movement, Papers on Metapsychology and Other Works. London: The Hogarth Press, 1917. 237-258
  • Hillenbrand, Lauren. “A Sudden Illness.” The New Yorker. July 7, 2003. http://www.newyorker.com/magazine/2003/07/07/a-sudden-illness
  • Kafer, Alison. Feminist Queer Crip.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13.
  • Love, Heather. Feeling Backward: Loss and the Politics of Queer Histor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 Luciano, Dana. Arranging Grief: Sacred Time and the Body in Nineteenth-Century America.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9.
  • Price, Margaret. Mad at School: Rhetorics of Mental Disability and Academic Life.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11. https://doi.org/10.3998/mpub.1612837

1 일라이 클레어Eli Clare, 엘리슨 케이퍼Alison Kafer, 조너 켈러Johnna Keller, 스테파니 커시바움Stephanie Kershbaum, 크리스틴 린드그렌Kristin Lindgren, 새뮤얼 루리Samuel Lurie, 마거릿 프라이스Margaret Price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들이 나누어준 말이 아니었다면 이 글을 상상하지도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2021.10.11.(일)

잤다. 점심께까지 자고는 잠시 일어나 라면을 먹고 다시 잤다. 눈을 뜨니 네 시 반이었다. 또 자다 깨다 하고는 다섯 시가 지나 하루를 시작했다.

동료들과 함께 하던 일에 문제가 좀 생겼는데, 메신저 대화방에 내가 자는 사이 그들이 애태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뒤늦게나마 합류해 약간의 일을 하고는 나가서 저녁을 먹었다. 주말이라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고기 없는 메뉴를 파는 곳을 겨우 찾아 들어갔는데 재료 소진. 좀 더 헤맨 끝에 찾은 식당에서 잔치국수를 시켰다. 말도 안 되게 탕수육도 시켰다.

집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날리기 시작했다. 마침 집에 멀쩡한 우산이 없었으므로 ― 여럿을 잃어버렸고 구멍이 많이 난 것 하나와 살 두 개가 부러진 것 하나가 남아 있다 ― 동네 마트에 들어가 우산을 샀다. 영 취향이 아닌 띠를 두른 검은 우산과 무지개색 우산을 놓고 고민하다 후자를 골랐다. 퀴어라서 든 척이라도 하지 뭐, 하는 맘으로.

식당을 나온 시점에는 비가 좀 더 많이 오고 있었지만 크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먼 길, 종종 산책을 하는 길을 지나 귀가했다. 식당을 찾던 중에 산 양과자를 몇 입 먹었다. 언젠가 사과도 한 알 먹었다. 급한 일은 묻어 두고, 당장 쓸 데는 없는 글을 좀 읽었다. 읽다가 샤워를 하고는 또 읽었다. 그래 봐야 별 것 안 했는데 어느 새 두 시가 지난 시각이 되었다. 잠시 누웠다가 잠이 오지 않아 일어섰다. 멜라토닌 한 알을 삼키고 글을 좀 더 읽었다. 일기를 쓴다. 지금은 네 시 구 분. 다시 누워 보려 한다.

2021.10.09.(토)

일찍 깼다. 여덟 시쯤. 아홉 시까진 뒹굴거렸다. 씻고 나섰다. 시내 언저리 어느 주택가를 향했다. 어제 잡은, 중고 카메라 거래 약속이 있었다. 샀다. 지난주엔가 오만 원에 올라온, 썩 필요하지는 않은 컴팩트 필름 카메라다. 영 안 팔렸는지 몇 번 가격이 떨어져 삼만오천 원이 되었길래 냉큼 사기로 했다.

안내받은 주소의 집 앞에 도착해 메시지를 보냈는데 엉뚱한 곳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아침에 켜 보니 배터리가 다 됐길래 사러 다녀왔다고 했다. 거의 카메라에만 쓰는 배터리였고, 당연히 동네 잡화점에는 없었다.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매장에 가보려던 차라고 했다. 그의 차 조수석에 앉아 처음 가보는 동네까지 갔다. 그곳에도 없었다. 배터리는 내가 인터넷으로 사기로 했다. 배터리가 오면 확인해 보고 문제가 있으면 환불받기로 하고는 켜지지 않는 카메라를 들고 귀가했다. 집 근처까지, 역시 그의 차 조수석에 앉아 이동했다.

왕복 이십 분 정도를 둘만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판매 게시물에 아이들 키우느라 몇 번 사용 못 했는데 아이들은 어느덧 많이 컸다, 고 적어두어 사오십 대의 인물이 나오려니 했는데 그는 칠십 대쯤 되어 보였다. 이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가 먼저 많이들 놀란다는 말을 꺼냈다. 한때 수석을 모았고 그걸 정리하느라 인터넷 장터를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자식들이 동네 사람들이랑 거래하는 앱이 있다고 알려주어 안 쓰는 물건들도 팔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의 계정에는 아흔 개가량의 거래 내역이 있다. 자전거부터 실습용 반도체 기판까지 다양하다. 수석도 몇 점 있고 잡다한 문구 몇 개를 이삼천 원에 올려둔 것도 있다. 앱을 쓴지는 반년이 조금 넘었다고 했다.

오는 길에는 애호박과 버섯과 근대를 샀다. 애호박을 썰고 어제 냉장고 구석에서 발견한 팽이버섯, 양파와 함께 볶았다. 같이 있던 애호박은 색이 변했길래 버리기로 했고 오늘 산 버섯은 뜯지 않고 냉장고에 넣었다. 근대로는 된장국을 끓였다. 두부를 잘게 썰어 넣었다. 서울 살 적에 동생네에 갔다가 얻어 온 호래기젓 ― 꼴뚜기젓 ― 과 함께 먹었다. 잠시 여유를 피운 후 집을 나섰다.

편의점에 들러 복권을 샀다. 그다음에 나온 편의점에서는 택배를 부쳤다. 앞의 편의점도 택배 취급점일지도 모르는데, 택배 보낼 거리를 들고 있음을 미처 생각지 못해 확인조차 않고 복권만 사고 나왔다. 카페에서는 곧 써야 할 글에 참고할 글 두 편을 읽었다. 짧고 어렵지 않은 글이었지만 영어였으므로, 늘 그렇듯 집중엔 곤란을 겪으므로, 시간은 꽤 걸렸다. 카페 근처의 식당에서 곤드레밥을 먹고 귀가했다.

가방을 내려놓고는 얼른 세탁기를 돌리고 산책길에 올랐다. 조금 걷다가 문득 장을 보기로 했다. 사십 분쯤 걸어 대형마트에 갔다. 샐러드거리와 올리브유, 단호박, 요거트, 휴지, 냉동 채소… 꽤 이것저것 샀다. 계획 없이 나온 터라 장바구니가 없었으므로 쓰레기봉투를 달라고 했는데 없다고 했다. 대신 장바구니를 판다고. 오백원짜리 장바구니를 샀다. 녹색 배경에 곰이 그려져 있고 함께 가자는 문장이 적혀 있다. 친환경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는 않다. 물론 친환경적이지도 않다. 그냥 두꺼운 비닐 가방일 뿐이다. 알 수 없는 정책이다.

짐을 싸들고 집까지 걸었다. 갈 때는 시내를 지났지만 갈 때는 논밭 사이를 걸었다. (길을 잃었던 날) 가본 적이 있는 구간인데도 길이 낯설어 입구를 찾지 못했다. 휴대전화 지도 덕에 겨우 탈 없이 귀가했다. 가로등 없는 길을 한 시간 조금 넘게 걸었다. 별이 많이 보였다. 집을 나설 적에 서쪽에 낮게 걸려 있던 초승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집에 와서는 별 것 하지 않았다. 시간은 많이 흘렀다. 배를 하나 깎아 먹었고 빨래를 걷었고 새 빨래를 널었다. 그 사이 당첨번호가 발표됐을 복권을 맞춰보려 했는데 사라지고 없었다. 샤워를 했다. 샤워 전에는 재활용품을 내어놓으러 나갔는데 빈손으로 나가고 말았다. 이제 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