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1.(목)
언제 일어났을까, 점심은 시내의 ― 언제나 보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 보리밥집에서 먹었다. 아슬아슬할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여유롭게 터미널에 도착해 서울행 버스를 탔다. 원래는 일찍 출발해 밤에 돌아올 생각으로 아침 버스를 예매했다가 이튿날 돌아오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고 오후로 변경한, 결국 당일 저녁에 돌아오는 것으로 다시 계획을 바꾸었지만 그대로 둔 차편이었다.
서울에 도착해서는 카페에 앉아 글을 읽었다. 독서 모임을 운영하기도 하는, 책 읽기 좋다고 소문난 카페였는데 조명은 어둡고 의자는 불편하고 음악은 시끄러웠다. 맞은편에서는 어느 신문 제호 스티커를 붙인 노트북을 펼치고 앉은 이가 신발을 벗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얹어 놓고 까딱거리고 있었다. 양말은 원래부터 신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녁에는 친구의 일을 ― 또 마음으로만 ― 잠깐 도왔다. 저녁은 들깨칼국수를 먹었다. 제천서 늘 먹는 옹심이메밀칼국수에 비해 영 부실한 꼴을 하고 있어서 속으로 역시 서울이란, 했는데 생각해 보니 적으나마 보리밥도 같이 나오는 메뉴였고 먹기에 딱히 부족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또 한 번 계획을 바꾸어 밤새 일하기로 했다. 돌아가는 버스의 예매를 취소하고 잠시 일을 하다가 또 마음을 바꾸어 숙소를 잡았다. 언젠가 한 번 잔 적이 있는 곳이었으나 저번과는 다른 ― 방 안에, 그러니까 화장실 밖에, 욕조가 있는 ― 구조의 방이었다. 숙소에서 욕조를 볼 때마다 잠시 고민하지면 결국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곳의 것도 썩 깨끗하지는 않아 보였다. 화장실 휴지걸이 위에는 앞선 객이 쓰고 간 일회용 치약이 남아 있었다. 슬리퍼가 없어 기이하게 여겼는데 알고 보니 현관 벽에 걸려 있는데 그냥 지나친 것이었다.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누워 있다가 시트콤을 보다가 편의점에 가서 배를 채웠다가 하다 보니 어느새 네 시였나 다섯 시였나. 그러고도 조금 더 있다가 잠이 들었다.
2021.10.22.(금)
아홉 시가 좀 안 돼서 깼다. 일을 해야 하므로 여덟 시부터 띄엄띄엄 열 번 가량 알람이 울리게 해두었는데 한 번도 깨지 못했고 알람이 울리지 않는 언젠가 돌연 깼다. 힘차게, 는 아니었다. 열 시를 조금 넘기고서야 꾸역꾸역 몸을 움직여 씻고 길을 나섰다.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서울에 살 때 종종 다니던 곳이다. 거의 매번 밥 두 그릇에 반찬 두 벌을 먹었는데, 그간 양이 줄었는지 밥 한 공기 반을 겨우 먹었고 반찬도 남았다. 굳이 반 공기를 더 먹은 것은 실수로 내어주신 한 공기에 손을 대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 공기만으로 배를 채웠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는 카페로 옮겨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시 이십 분 버스로 제천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남는 시간이 딱히 없을 만한 타이밍에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밍기적거리느라 지하철을 한 대 보냈고 다음으로 들어온 차량은 신호 대기로 조금 늦게 출발했다. 환승할 차량이 한 대 밀렸다. 배차 간격이 긴 노선이었고 달려도 고속버스 시간에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두어 정거장을 가고 보니 반대로 가고 있었다. 내려서 또 조금 기다려 제대로 된 차를 탔고, 달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다음 버스를 타게 되었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가는 길에 연락을 주고 받아야 할 일이 있었다. 터미널에서 삼십 분 가량을 보내게 되었으므로 충전기를 사기로 했다. 잡화점 위치를 헷갈려 시간을 날렸고 콘센트를 찾느라 ― 콘센트가 있었을 자리가 거의 다 막혀 있었다 ― 또 한참 시간을 썼다. 10분 정도를 겨우 충전하고 버스에 올랐다. 휴대전화를 초절전 모드로 설정했다. 다행히 집에 도착할 쯤까지 버텨주었다.
제천에는 소나기 예보가 있어 조금 걱정했는데 가는 내내 하늘이 맑았다. 버스를 내리고 보니 땅이 젖어 있었다. 라면을 먹기로 하고 터미널 앞의 분식집에 들어갔다. 주인과 친구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할 때까지도 주인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플라스틱 바가지로 난로 위 주전자에서 물을 퍼다 가스렌지 위의 냄비에 붓고서야 마스크를 챙겼는데, 목에 걸었을 뿐 역시 쓰지는 않았다. 라면이 다 익자 마스크를 쓰고서 내게 가져다 주었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는 다시 벗었다.
친구가 떠나고 그와 나만 남았다. 그는 내게 몇 마디를 붙이다가 이내 라디오 소리에 빠져들었다. 짧은 대화로 제천에는 그냥 소나기 정도가 아니라 우박이 쏟아지고 눈씨래기가 날리고 천둥번개가 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며 그는 종말인지 말세인지 하는 말을 썼다. 날씨가 안 맞아서 배추 가격이 너무 오르는데 그나마도 없어서 살 수가 없다고, 이제 라면에 김치는 못 주고 단무지나 줘야 할 판이라고 했다. 내게는 김치가 수북이 담긴 접시를 준 후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잠시 짐을 정리한 후 언젠가 신청해 둔 온라인 화상 강의를 들었다. 두 시간짜리였으나 두 시간 반이 다 되도록 끝나지 않았고 결국 몇 분 남기고 먼저 나와버렸다. 배가 고파져, 빵집이 문을 닫기 전에 다녀와야 했다. 식빵을 사다 먹으며 일을 조금 했다. 강의를 듣던 중에 조금씩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저 기분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일찍 이렇게 판단했다면 좋았을 테다. 더는 무리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밤이 깊어버린 시점이었다. 담당자에게 미리 말하지도 못하고서 멋대로 마감을 미루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