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7.(수)

시답잖은 꿈을 꾸다 깼다. 주웠는지 샀는지 아무튼 오디오 하나가 생겨서 살펴 보고 있었다. 꽤 커다란 것이었는데 대부분 빈공간이고 카오디오 ― 카오디오일 리 없는 하얗고 미니멀한 디자인이었지만 ― 를 꽂아두었을 뿐인 것이었다. 케이스를 열자 빈공간 가득 과자 봉지가 차 있었다. 뜯지도 않은 과자가 열 봉지쯤 나왔다. 과자 말고도 무언가 있었고 그것이 더 신기하면서도 맘에 드는 물건이었는데 뭐였는지는 잊었다.

이걸 어떡하나 생각하다 깼고 한동안 누워서 뒹굴거렸다. 주섬주섬 일어나 커피를 내려 반 잔쯤 마시고 샤워를 한 후 나머지 반을 마셨다. 커피를 마시면서는 내일 마실 원두를 갈았다. 내일 마실 원두, 라는 말은 이상하지만 이상하지 않게 쓰면 문장이 너무 길어진다. 원두는 핸드 그라인더와 전동 드릴로 갈았다. 그저께부턴가 이렇게 하고 있다. 핸드 그라인더 손잡이를 떼고 나사를 드릴에 물려 돌린다. 그제와 어제는 다 마친 후에 손잡이를 다시 달았는데 이번엔 그냥 두었다. 내일도 이렇게 갈겠지.

집을 나섰다. 오늘 신은 운동화는 오른발목쪽 안감이 닳아 내장재가 튀어나와 있다. 양말 목이 짧으면 발목을 긁힌다. 그래서 발목을 다 덮는 걸 신고 나갔는데 하필 늘어난 것이었다. 양말이 계속 아래로 말려 발목이 드러났다. 길가에 놓인 박스 더미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들어 종이를 찢었다. 발목에 댔다. 더는 긁히지 않았다. 곧 영월군 주천면행 버스를 탔다. 원래는 자전거를 탈 생각이었지만 추운 날 쓰는 머플러형 방한대를 찾지 못했고 자전거 정비도 미루고 미루다 끝내 하지 못했다. 며칠 전에 산 프레임 거치형 주머니만 뻘쭘하게 달려 있다.

주천까지는 한 사십 분 걸렸을까. 포털사이트 지도에 뜨는 시간보다는 짧았다. 면소재지에 내려 꼴두국수로 요기했다. 김치말이메밀칼국수쯤 되는 음식이다. 70년대부터 영업했다는 가게 벽면에 붙은 설명에 따르면,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제일 흔했던 메밀로 만들어 종종 먹던 것이라 꼴도 보기 싫다 하여 꼴두국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꼴뚜국쑤 하나 주세요, 하고 나서야 그걸 보고는 꼴두국쑤라고 해야 했나 생각했는데 주문을 받은 사람도 ―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을 엄마라 부르던 ― 꼴뚜국쑤라고 발음했다. 강원도에서 꼴도를 과연 꼴두로 발음할까 궁금했는데 골뚜로 발음한다면 더더욱 의아하다. 강원도 말은 모르지만.

그리고는 무릉도원면을 향해 걸었다. 영월에서 지낼 때 하루 걸러 하루씩은 걸었던 두 시간 반 정도 되는 코스를 돌기로 했다. 지난번에 갔던 곳 ― 요선암 돌개바위 ― 은 들르지 않고 그냥 큰길을 따라 걸었다. 사진을 여남은 장 찍었다. 중간이 필름이 다 돼서 새 걸 끼웠는데, 끼우고 보니 이 ― 셔터스피드가 최고 1/500초인 ― 카메라에 쓰기에는 감도가 너무 높은 것이었다. 필름을 빼고 렌즈 커버를 닫았다. 늘 하는 대로, 생각 없이 걷다 엉뚱한 길을 드는 바람에 네 시간을 걸었다. 나머지 하루 걸러 하루 중에서도 며칠에 한 번만 갔던 긴 코스. 조금 피곤하지만 실은 더 좋아하는 코스다. 덕분에 저번엔 못 봤던 숙소 앞도 지났다. 아직 영업 중인 듯했다.

다시 면소재지에 도착해 카페에 들렀다. 그래놀라를 사려고 했는데 잠시 생산이 중단된 상태라고 했다. 그냥 거기 앉아서 커피를 마셔도 되었을 것을 굳이 지난번에 갔던 카페로 발길을 옮겼다. 정기휴무일이었다. 결국 영월에서 지낼 때 종종 갔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그러고는 제천시 버스 앱으로 버스 정보를 확인했는데 20분 뒤면 도착한다고 했다. 포털 사이트 지도는 50분 뒤라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이쪽이 옳다. 애초에 포털 사이트에는 실시간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 시에서 API를 공개하지 않는 것인지 포털사이트에서 군소도시 정보는 굳이 받아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시 앱에서는 실시간 정보는 볼 수 있지만 발차 시각은 볼 수 없다. 하루에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있는 노선이므로 대개는 “운행 중인 버스가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마주하게 된다. 포털 사이트에는 첫차, 막차 시각이 뜬다. 최종적으로는 시 교통정보 웹사이트에서 PDF로 제공하는 시간표를 확인해야 한다. 아주 어렵지야 않지만 처음 보면 당황할 법한, 세 개의 축을 따져 찾아야 기종점과 주요 경유지 한 두 곳의 발차 시간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표다. 커피를 반은 남기고, 가져간 책은 한 번 꺼내보지도 못한 채, 얼른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돌아오는 데 다시 오십 분. 딴짓을 하다 내릴 곳을 지나쳐 몇 정거장 더 걸었다. 딴짓이란 팟캐스트 《흉폭한채식주의자들》의 42화 〈코미디의 무늬〉 듣기. 그 전까진 얼마 전에 녹음한 B의 노래를 들었다. 네 시간을 걷는 동안에도, 낮에 제천에서 영월로 가면서도 그걸 들었다. 총 30분 남짓 되는 몇 곡의 노래를 다섯 시간 좀 넘게 돌려 들었다. 〈코미디의 무늬〉를 마저 들으며 집으로 걷는데 식당마다 냄새가 어찌 그리 진하던지. 하지만 크게 흔들리지 않고 귀가해 밥을 안치고 냉장고에 넣어둔 ― 시판 양념에 채소와 두부만 썰어 넣은 ― 강된장을 꺼내 데웠다. 조금 많다 싶었지만 두 번에 나눠 먹기만 애매한 양이어서 전부 비벼 조금 짜게 먹었다.

종이가 충분치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종이를 댔기 때문이었는지, 발목 아래, 뒤꿈치 바로 위에 물집이 잡혔다.


주천면 도원리 구석을 걷다가 흙에 파묻힌 채 녹이 슬어 있는 LED 헤드 랜턴 하나를 주웠다. LED만 떼어 쓰려고 했는데 방금 보니 몸통만 남아 있다. 버스를 타기 전에 한 번 떨어뜨렸는데 그때 떨어져 나간 모양이다. 몸통을 분해해 플라스틱과 금속과 전지를 나누어 분리수거함에 담았다. 제천 시내를 걸으면서는 압축 스펀지 조각 하나를 주웠다. 며칠 전에 필요한 일이 있었던 것이 생각나서 주웠는데 그게 뭐였는지 도통 생각이 안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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