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시에 깼다. 그저께 맞춘 알람 소리에. 네 시에도 알람 소리를 듣고 깼었나, 가물가물하다. 한 번 깨긴 했다. 창문을 닫았거나 열었다. 선풍기를 켰을 수도 있다. 금세 다시 잠들었다.
일곱 시가 조금 못 되어 집을 나섰다. 산책을 하기로 했다. 아파트 앞 논밭을 가로질러 건너에 있는 마을까지 갔다. 가는 덴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길을 기억해두지 않았으므로 아무렇게나 돌아왔는데, 오는 데는 40분 정도 들었다. 집이 가까워지자 볕이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밤엔 끈적한 발라드가 나오던 산책로 가로등 스피커에서, 아침이라 그런지 조금은 밝은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단지에서는 목걸이를 한 흰 고양이를, 건너편 마을에서는 줄에 목이 묶인 검은 염소를 만났다.
샤워를 하며 보니 가슴팍이 줄무늬 모양으로 붉어져 있었다. 왤까, 어디 엎드리지도 않았고 이렇게 길고 곧게 긁었을 리도 없는데. 한참 생각해 보니 흰색과 검은색이 이어지는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걸은 탓인 듯했다. 두면 가라앉을까, 이대로 까맣게 타는 걸까. 어차피 안 보이는 곳이니 상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 땀을 흘리지 않은 것만 생각하고 ― 씻고 나서도 다시 그 옷을 입었다.
낮엔 쉬기로 했다. 책을 들고 카페에 갈까, 도서관에를 가볼까. 전자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책을 잊고 맨몸으로 나섰다. 애초에 책을 고르지도 않았다. 그런 것도 모른 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카페를 향하다 멈췄다. 잠시 고민하고는 도서관으로 방향을 틀었다. 읽어볼까 싶은 책이 두엇 있었지만 소장도서 목록에 없었다. 신착도서 서가를 어슬렁거리다 『이세린 가이드』라는 만화를 뽑아들었다.
친구의 글에서 본 기억이 있는 책이었다. 친구의 글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이 책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는 대개 좋은 것에 대해 쓰므로 좋으려니 했다. 음식 모형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다. 첫 에피소드를 읽으면서는 자전적인 만화거나 적어도 인터뷰이가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쩌다 눈치챘더라, 이상하다 싶어 작가 후기를 먼저 읽었다. 음식을 좋아하지만 맛에는 관심이 없어, 다른 좋아하는 것인 모형과 더해 상상해 낸 이야기라고 했다.
음식 모형을 만드는 사람 ― 젊은, 오빠 둘이 있는, 가부장적인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결혼하지 않은, 여성 ― 의 이야기다. 작가 후기에는 여성이니 평등이니 혹은 노동이니 하는 말이 전혀 없었지만 음식이나 모형보다는 그런 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가끔 웃으며, 즐겁게 읽었다. 그러면 슬퍼진다.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것이 어떤 불의들임을, 배우거나 집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한 불의들임을 생각했다.
휴대전화로 친구의 글을 다시 읽으며 돌아왔다. 저녁 메뉴는 짜장밥, 으로 정하고 예의 대기업 수퍼에 들렀다. 춘장은 없었다. 대신 아이스크림과 청소용 솔을 샀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까지 마저 걸었다. 세면대를 청소했다. 또 샤워를 했을까, 잠시 후의 나는 누워 있었다. 오는 길에는 저녁에 잡혀 있는 회의 공지 메시지를 받았다. 곤란한 일이다. 저녁엔 글을 쓸 생각이었는데.
무어라 쓸지 생각하는 시늉을 하며 누워 있다가 저녁에 또 나가서 걸었다. 시간을 맞춰야 하므로 이번에도 의림지. 카메라를 챙겨 밝은 하늘의 커단 구름을 몇 장 찍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논밭도 두어 장 찍었다. 춘장이 없으니 또 카레, 로 정했던 것마저 취소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들어왔다.
회의는 조금 전에 끝났다. 씻고 다시 앉아 오늘 밤까지 보내기로 한 원고를 쓸 것이다.
여유는 있었는데 메일도 문자메시지도 돈도 보내지 않았다. 아침엔 등기우편이 왔는데 그것도 못 받았다. 내일도 못 받으면 반송된다고 한다. 국제우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