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자라는 말이 떠돈다. 사전적으로야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각자에게서 국가는 다른 상으로 그려지므로, 반동적인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에 가담한 이들을 가리키는 데에 더 자주 쓰이는 것 같다. (어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부역자 여성’을 이야기하자면 이런 식이다. 남성과 결혼하(고 심지어 남아 ― “한남유충”! ― 를 키우)는 가부장제에의 부역자, 남성을 상대로 성판매를 하는 성상품화에의 부역자, 혹은 게이 남성들을 싸고도는 여성혐오문화에의 부역자.
(부역자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일 테다. (완수되지 못했지만) 친일 행위자를 처벌하는 것이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에 필수적인 일이었듯이, 페미니스트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가부장제에의 부역자를 비판하는 일이 빠질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친일 행위자 색출과는 조금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가부장제는 식민 정부와 같이 구체적이고 분류 가능한 보상을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살기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는 것은 친일 행위를 변호하는 데에 자주 동원되는 수사다. 그저 ‘사는 것’ 이상을 누렸던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데도 이 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여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을 긋기 힘드니까 부역자를 비판할 수 없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 선을 찾기 위해, 혹은 정하기 위해,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일 뿐이다.
부역자란 어떤 존재일까.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저항력이 있을까. 누군가는 죽음으로 저항했던 어떤 국면에서, 여전히 살아남아 ― 저항과 동시에라도 ―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부역자일까. 당신은 이렇게 저항할 수 있었다, 고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부역자일 뿐이라고, 쉽게 말하지 않는 것은 내게 최소한의 윤리다.
그렇다면 그는 피해자일까? 거대한 체제니 구조니 하는 것 앞에서 겁에 질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던, 순전한 피해자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상상력이 종종 택하는 가장 쉬운 길이다. 개인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구조를 비판할 수 있어 보인다는 점에서, 어쩌면 윤리적인 상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구속당한 어떤 순간 정도를 빼면) 순전한 피해자라는 것이 있을까. 판단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상상하는 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매순간 체제와, 그리고 스스로와 타협점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사람만을 상상할 수 있기에,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란 언제나 피해자인 동시에 부역자이다.
역시나 당연한 말이지만, 당신의 선택이 있었으니 당신이 입은 피해는 당신 책임이다, 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의 주체성을 인정하려는 시도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가 처한 조건을 바꾸기는커녕 그의 선택을 비판할 수조차 없고, 그의 피해에 대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기껏해야 그를 타자화하며 내가 멋대로 상상한 세계를 펼칠 수 있을 뿐이다.
체제의 정점에 있으므로 기꺼이 논외로 쳐도 좋을 어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내가 아는 한 우리 모두가 부역자이자 피해자이며 피해자이자 부역자이다. 이것은 그들이 실제로 얼마만큼의 저항을 해 내었건에 상관없이, 모두가 나와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이 대화 없이, 누군가를 부역자로, 누군가를 피해자로 금세 치부해 버림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주체성이란, 주체적인 선택이란, 언제나 어떤 조건들 안에서 구현된다는 점에서 복잡다단한 문제다. 나의 삶이 그러하듯, 타인의 삶 또한 복잡한 맥락들 속에 얽혀 있다. 다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애초에 부역과 피해는 쉽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 때로 겁먹어 움츠러드는, 그러나 때로 제 힘으로 삶을 꾸리는 인간으로 ― 상상하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정치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