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고 두 달이 조금 넘었다.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고 생활의 많은 부분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변한 것이 없지 않으므로 ― 꽤 크게 변한 것도 있으므로 ― 결산해 보기로 했다. 주로 변할 줄 몰랐는데 변한 것과 변할 줄 알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 중 몇 가지를 쓰기로 했다.
1. 전기
“어릴 때부터 그랬다. 전기세가 아니라 전기가 아까웠고, 기름값이 아니라 기름이 아까웠다. […] 전기 공급이 불안정한 시대를 겪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시골에서 전기는 다분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기름은 말할 것도 없고. 땅을 파면 어디서든 나오는, 혹은 땅을 파지 않아도 어디서든 흐르는 물이랑은 전혀 달랐다.” 아마도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1]「경험의 편협함」. 물은 마구 쓰면서도 전기는 끔찍이 아낀다.
아니, 아꼈다. 건강에 문제가 없는 한 ― 물론 나는 건강에 문제가 있는 때가 아주 많지만 ― 여간해선 에어컨을 쓰지 않으며 살았고 종종 선풍기조차도 켜지 않았다. 일할 때가 아니면 형광등을 켜지 않았고 종종 일할 때조차도 컴퓨터만 켜거나 탁상용 조명만 썼다. 깜빡하고 욕실 불을 켜둔 채 집을 나서는 경우가 잦았지만 그걸 빼면 전원 차단에 퍽이나 열심이었다. 컴퓨터를 쓰고 나면 멀티탭을 끈다. 집을 나설 땐 인터넷 모뎀과 무선 공유기가 꽂힌 멀티탭의 전원도 끈다. 전자렌지는 사용할 때만 잠깐 꽂는다. 보일러도 쓰지 않을 땐 끈다. 이런 것이 일상적인 생활수칙이었다. 늘 켜져 있어야 하는 냉장고나 콘센트가 너무 깊숙이 있어 어쩔 수 없는 세탁기와 보일러를 제외한 모든 기기의 전원을 철저하게 관리하며 살았다.
이 수칙은 이사와 함께 무너졌다. 집이 넓어진 탓, 이라는 게 유일한 핑계다. 조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콘센트나 스위치가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옷을 챙겨 입고 현관을 나서기까지 거치는 경로 바깥에 있다는 것이. 오류가 생겨 껐다 켠 몇 번을 빼면, 두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인터넷 모뎀과 공유기는 딱 한번씩만 껐다. 보일러는 ― 아직 난방을 할 날씨는 아니고 온수 역시 저온으로 맞춰 두긴 했지만 ― 한번도 끄지 않았다. 그래봐야 몇 초면 다녀 올 거리인데도 그렇다. 매번 잊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전자렌지는 플러그를 뽑기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그 역시 며칠 안 가 방치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포기하고 시계를 맞춰 두었다. (전원선을 뽑았다 꽂으면 0시 0분으로 재설정되는 시계라 서울에 살면서는 시계를 쓰지 않았더랬다.) 거실의 형광등 두 개는 스위치가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고, 지금은 바깥쪽 조명만 필요한데도 아까 켠 안쪽 조명을 끄지 않고 그냥 둔 채로 이 글을 쓴다. 그나마 챙기는 것이 머리맡에 있는 콘센트, 그러니까 휴대전화 충전기를 꽂는 콘센트지만 그 역시 서울에 살 때만큼 철저하지는 않다.
인터넷 모뎀은 베란다에, 공유기는 거실에 있는데다 집이 여전히 엉망이라 그 거리를 가는 것도 나름대로는 꽤나 고역이었다는 핑계의 효용은 이제 반으로 줄었다. 거실이 큰 탈 없이 지나다닐 만한 상태로는 정리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습관을 되돌릴 수 있을까, 과연.
2. 플라스틱
플라스틱을 종종 생각한다. 반쯤은 ‘환경’ 때문이고 반쯤은 예의 ‘사건’ 때문이다.[2]“낮엔 전화가 한 통 왔다. […] 아파트 관리사무소였다. 전날 분리배출한 재활용품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플라스틱과 비닐을 모은 봉투를 들고 … (계속) 환경의 문제로 여기게 된 것은 미세플라스틱이란 것을 알게 된 후의 일이다. 적게 소비하기, 분리수거 철저히 하기 같은 데에 꽤나 공을 들이지만 실은 (전체로서의) 환경을 원형대로 유지하는 데에는 관심이 아주 적다. 어떤 종이 멸종하면 다른 종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라고, 먹이사슬이 무너지더라도 언젠가 다른 구조로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플라스틱은 썩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배우며 자랐지만, 미관상의 문제를 제외하면, 돌보다 오래 가는 가짜 돌이 흙 속 어딘가에 파묻혀 있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쨌든 덜 쓰기를 추구하며 살았지만 플라스틱을 집어서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세플라스틱은, 아니, 아주 미세하진 않더라도, 플라스틱 조각은 문제가 조금 달랐다. 내가 버린 무언가가 아주 직접적으로 어떤 개체를 해하거나 죽인다면, 이것은 (전체로서의) 환경 문제와는 내겐 조금 다르다. 누군가가 내가 버린 것을 먹고 죽는다면, 누군가가 내가 버린 것에 목이 졸려 죽는다면, 실수로 먹을 수 있을 만한 작은 것이나 한 번 끼이면 빠져나올 수 없을 만한 질기고 복잡한 것은 버릴 수 없다. 플라스틱을 버릴 때 좀 더 주의하기로 한 것은, 플라스틱을 조금이라도 덜 쓰기로 한 것은 이런 생각에 이른 시점에서다. 그렇다면 역시, ‘환경’이라는 말이 아주 적절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기껏해야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정도였다. 아니면 (종종) 깜빡 잊었을 때 (혹은 최근이라면 코로나19 유행에 따른 지침으로 텀블러를 부엌에 들이지 않기로 한 카페에 간 때) 일회용 컵을 쓰더라도 뚜껑이나 빨대를 받지 않는 정도. 이사를 하면서는 조금 더 해보기로 했다. 칫솔꽂이는 도자 재질로 된 것을, 욕실용 선반이나 휴지 걸이는 금속재의 것을 샀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휴지가 너무 젖어서 며칠 못 가고 새로 산 플라스틱 휴지걸이가 시작이었다.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다. 카페를 나와서는 일부가 플라스틱인 수건걸이를 사고 플라스틱 섬유로 된 다른 물건도 샀다. 플라스틱 용기로 되어 있는 제습제도 샀다. 조금 전에야 주문했지만, 플라스틱제 식탁 의자와 욕실장도 샀다. 이렇게 늘어 놓으면 마치 지금껏 플라스틱 제품을 안 사고 잘 버틴 것 같지만 슬리퍼도 발매트도 칫솔도 모두 플라스틱이다.”[3]「2021.08.15(일)」. 게다가 텀블러라고는 하나도 갖지 못한 사람처럼 살고 있다. 집을 나설 때부터 테이크아웃 음료를 마실 작정을 한 날은 없다고는 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 걷다 더워서, 혹은 카페에서 일을 하다 예정보다 빨리 일어섰는데 커피가 많이 남아서 ― 자주 플라스틱 잔을 썼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챙기지 않는다.
3. 부피와 면적
부피와 면적을 줄이기, 가 이사의 목표였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 터이므로 어쩌면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이다. 다만 아주 뜻밖은 아니므로 세 번째로 쓴다. 예상한 대로 흘러서는 아니다. 아직 무어라 말할 만큼 시간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피와 면적. 생활에 필요한 사물들의 부피와 내가 생활하는 공간의 면적. 집이라는 형태로 사적으로 점유하는 공간 외에는 모든 것을 줄이는 것이 목표다. 집을 채운 사물도, 집 밖에서 (건축물 속에서) 보내는 시간도 (연료를 소비하며) 오가는 거리도 줄이는 것이.
아직까지는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이사 직전에 맡게 된 일로 주기적으로 서울을 오가야 했고 이사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맡긴 일로 (바빠서, 가 아니면 일을 잘 거절하지 않는다) 서울을 오가기도 했다. (생각보다는 놀러도 자주 갔지만.) 바쁜 탓에 짐 정리를 못해 (오늘부로 거실이 돌아다닐 수 있는 상태가 되긴 했지만 정리가 끝나서가 아니라 거실 한가운데 쌓여 있던 물건들을 구석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매일 카페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식사했다.
이사 직후엔 필요한 것이 많으므로 집을 채운 사물도 (이사 직전에도 이사 직후에도 이것저것 많이 버렸으므로 짐의 총량은 줄었지만) 어떤 영역에서는 오히려 늘었다. 집이 넓어져서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식사하는 자리와 일하는 자리를, 그러니까 식탁과 책상을 따로 쓰게 되었으므로 식탁용 의자가 필요해지거나 하는 식이다. (식탁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만) 조금 더 갖추기로 했달까, 하는 말로 표현해야 할 것도 있다. 예컨대 몇 년만에 쓰레기통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그냥 종량제 봉투를 대강 세워 놓고 살았다. 종종 넘어져 쏟아지곤 했다.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책도 몇 권 늘렸다.
이곳에서의 삶이 좀 더 익숙해지면, 그리고 이곳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서울에 오가는 일도 집을 채운 물건도 조금씩 줄어들 것이다. 이것은 예상이나 기대가 아니라, 여전히 다짐이다.
4. 산책과 우익
서울이 아닌 곳, 중에서도 이곳을 택해 이사한 것은 한편으로는 집을 나서면 논밭이 보이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시장이나 국희의원이 적어도 국민의힘 소속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당선되는 곳인 것이 그 자체로 장점일 리야 없고 어느 영역에서든 운동이랄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것은 아쉽다면 아쉽지만.
논밭 사이를 자주 걷는다. 이사 직후엔 거의 매일 걸었다. 꽤 긴 시간을 바빠서 드문드문만 걷고 있지만 그래도 꽤 걷는다.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논밭 한가운데 혹은 산기슭에 산다면 아마도 걷지 않고 그냥 마당에 누워 있겠지만 아직 그만한 삶은 못 되므로 자주 걷는다.
서울에선 매일 같이 보이던 국민의힘 지지자들, 아예 우리 공화당 지지자들을 여기에선 볼 일이 거의 없다는 것도 좋은 점이다. 우리공화당의 박근혜 석방 서명운동 부스를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아주 작았다. 연휴를 맞아 국민의힘과 우리공화당에서도 플래카드를 걸었지만 서울만큼 크고 많지는 않다. 속이 덜 시끄럽다.
5. ‘친구’
종종 미뤘지만 매일의 일을 기록했다. 쓰지 않은 것이 있다. 의자를 두 개 산 이유나 베개가 있음에도 하나를 더 산 이유도 쓰지 않았고 오늘 낮에 눈을 떠 보니 집이 청소돼 있었다는 것도 쓰지 않았다. 두리뭉술 쓴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 고 쓴 문장 중 여럿은 ― 내가 지인이 전혀 없는 곳으로 이사했다는 것을 아는 이들에게는 통화나 메시지로 수다를 떨었다는 말로 읽혔겠지만 ― 친구와 마주 앉아 수다를 떨었다는 뜻이다. 밥을 먹었다거나 서울에 다녀왔다거나 카페에서 일했다거나 하는 문장들은 ‘나는’이라는 주어나 ‘혼자서’라는 부사가 생략된 문장으로 읽혔겠지만, 생략된 말은 실은 종종 다른 것이다. 나는 친구와. 혹은 우리는 둘이서.
친구, 라고 쓴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전에도 그랬다. 그러니까, 전 연애들에서도 그랬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난 일기 중 어느 시점 이후의 것에 쓰인 친구라는 단어는 여럿을 애인, 으로 바꾸어 읽어도 좋다는 뜻이다. 예상치 못하게 그렇게 되었다. 그의 터전은 서울이므로 매일은 아니지만, 그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나는, 예상과 달리 ― 혹은 기대와 달리 ― 아주 적은 시간만을 혼자 보내고 있다.
주
↑1 | 「경험의 편협함」. |
---|---|
↑2 | “낮엔 전화가 한 통 왔다. […] 아파트 관리사무소였다. 전날 분리배출한 재활용품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플라스틱과 비닐을 모은 봉투를 들고 내려갔다가 수거함이 가득 차 있어서 봉투 째 옆에 두고 왔는데, 무언가 다른 게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 나갔다 오는 길엔 5층 주민과 마주쳤다. 아까 관리사무소에서 나를 찾았다고, 분리배출 관련해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고 했다.” 「2021.08.18.(수)」. |
↑3 | 「2021.08.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