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결과부터 말하자면, 일단 잘 해결되었다. 필요한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가게 되었으므로.
1.
지금껏 살면서, 가난을 증명해야 했던 적은 크게 없었다. ‘증명’하면서까지 도움을 청해야 할만큼 가난해 본 적도 없었거니와―누구에게서든 생활비를 빌려야 했던 부모님에게는 있었겠지만―, 가난함을 주장하기에는 소위 사회적 자본, 혹은 문화적 자본이라는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기자라는, 나의 서울대생이라는, 지위 같은 것들 말이다.
2.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경험, 을 처음으로 해 본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학교에서 조교 자리가 하나 났고, 나를 포함해 지원자가 둘 있었다. 결정권자인 지도교수님은 우리 둘, 그러니까 지원자 둘이서 합의해 결과만 알려 달라고 하셨다.
3.
장학금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지도교수와의 친분은 고려하지 않는다, 는 원칙을 가진 선생님 입장에서야 가장 합당한 안이었겠으나,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크나 큰 고역이었다. 서로 마주 앉아, 양보해 달라는 말도 양보하겠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시급한가를, 심지어 조심스레, 말할 수밖에는 없었다.
4.
온전히, 라고는 할 수 없지만―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없는 물리적 상황이 있다는 뜻이다― 대체로 지금의 나는, 말하자면 ‘자발적 빈곤’의 상태에 있다. 과외라든가 하는, ‘돈 때문이 아니면 절대 안 할 일’을 실제로 하지 않고 있으니, 일단은 그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돈 안 되는 일을 좀 줄이면, 예컨대 수업을 하나쯤 적게 들으면, 그리고 스스로의 양심이나 신념을 조금 접어 두면, 돈을 버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5.
가난을 증명하기도, (다소간) 자발적인 빈곤 상태에서 지원을 요청하기도 매우 생소하면서도 곤란한 경험이었다. 눈곱만큼도 자발적이지는 않는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기계 같은 공무원들을 상대로, 실은 희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해보는 수밖에는 없는 가난의 증명은 과연 어떤 기분일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조차 없음을, 여실히 느꼈다.
6.
전화로 십 분쯤, 이튿날 대면해서 이십 분쯤을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는 데에 보냈는데, 서로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말수는 줄어들고 표정은 굳어 가고. 그 불편함이, 단순히 내가 혜택을 받으면 상대방은 받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7.
누군가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아니 그렇게 되도록 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법인화 반대 자보를 얼른 써야 하는데. 꼴에 학교 좀 오래 다녔다고, 좀 뻘쭘해서 미루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