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석

서울과 경기를 오가는 지하철은 다소 절망적이다. 승객 대부분이 시와 도의 경계를 넘는 장거리 이용객이라서, 또 그 상당수가 고령이라서 앉을 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직장 혹은 학교, 그것도 아니라면 놀이 공간 가까이서 살 것을 허락받지 못한 이들, 무임승차권*이 나오는 지하철 열차가 아니면 갈 곳―이동 수단으로서도, 그야 말로 ‘곳’으로서도―을 바랄 수 없는 이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경기도에 있는 선배의 병원을 한 주에 한 번씩 다닌다. 이제 겨우 두 번을 갔는데, 언제나 지하철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아파서 병원에 가는데 병원에 가느라 더 아플 지경. 그래서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던 중, 지난주에 한 시간 반을 서서 병원에 갔다가 또 사십분 쯤을 서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자리 하나를 잡았다.

두 정거장 쯤 지났을까, 아직 경기도를 채 벗어나지도 못한 어느 역에서 자리를 구하지 못한 노인을 발견했다. 자리를 내어 주고 또 서서 두어 정거장을 가자 그가 나를 불렀다. 내게 앉으라며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던 그는, 이제 내 자리로 가야지, 하고 말했다. 객차를 가로질러 그는, 한 자리가 빈 노약자석을 향했다.

그가 그 자리로 가던 중에 누군가 먼저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는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배려라는 멋들어진 이름으로 선심 쓰듯 사회가 내어주는 자리는 게토―이 말을 써도 좋을지 모르겠지만―가 된다. 그가 다시 일어나 늙은 몸을 끌고 비척이며 노약자석으로 간 것은, 내가 노약자석에 앉을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유도 모르면서, 만원 지하철에서 노약자석이 아닌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나 않았을까. 그를 노약자석에 가두어 두고 싶지 않았던 나는, 아니에요 그냥 앉아 계세요, 하고 말해도 좋았을 텐데. 미처 그리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몸이 무거워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 우대권이라는 말은 기만적이다. 대중교통이 공공재라면,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지 못하는 데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표 정도는 당연히 공짜로 주어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불편한 계단만 끝없이 늘어놓고 엘리베이터를 충분히 설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며 ‘교통 약자’들이 사용할 때마다 사죄금을 주어도 모자랄 판.



나와 직접 대면을 하지는 않는, 주위의 노동자들에게 굳이 인사를 하지는 않는다. 청소 노동자에게 인사를 건네주세요, 따위의 포스터나 자보를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들의 노동에 지금 이상의 보상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나의 인사가 아니라 임금과 처우를 통해서여야 한다고. 대접 받지 못하는 육체노동에, 나의 인사가 조금의 자존감을 줄 수 있을까 한 때 고민했던 적이 있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인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면, 눈이 마주쳤을 때 정도다. 계단을 닦고 있던 이가 내가 지나갈 틈을 내어 주느라 허리를 펴고 나를 치어다 볼 때, 식당 퇴식구에서 식판을 정리하는 이가 내 것을 받아들기 위해 나를 바라 볼 때, 정도다.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이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초에 동시에 같은 공간에 있지 않으려 노력한다. 남자 화장실을 청소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고충을 익히 들어 왔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청소 시간에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는 것뿐이므로.

계단을 닦는 이와 마주치는 건 흔치는 않은 경험이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번 있을까 한 일이니, 내가 인사를 하는 노동자는 주로 식당 퇴식구에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일이 사라졌다.

언제부턴가, 퇴식구에 벽이 생겼다. 식판을 밀어 넣을 약간의 틈만을 두고, 그와 나의 얼굴 사이에는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내게 보이는 것은 고무장갑을 끼고 바쁘게 나의 식판을 받아 가는 그의 손뿐이다. 그에게는 아마, 내 손조차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인사를 할 기회는 사라졌다.

어쩌면, ‘소비자’로서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과 굳이 얼굴을 마주하기가 불편한 노동자들의 감정을 위해 만든 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했으리라 생각할 만큼, 학교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지는 않다. 아마, 식사하는데 잔반통이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랬겠지, 정도가 학교의 이미지에 걸맞다.

이제 나는 누가 어떤 표정으로 내가 밥 먹은 흔적을 씻어내는지 알지 못한다. 그 속에서 그 누군가는 어떤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을까. 그곳이 그의 자리일까, 그의 우리일까,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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