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시쯤 하루를 시작했다. 세 시쯤에 잠들어 (여덟 시쯤 한 번, 여덟 시 반쯤 한 번 잠깐씩 눈을 떴지만) 열 시쯤까지 잤다. 일곱 시간을 잤고 한 시간을 더 누워 있었다. 길게 잔 편이다. 최근에는 잠을 적게 잤다. 바빠서 혹은 불면증이 도져서는 아니다. 컨디션이 좋아서에 가깝다. (아무렇게나 말하자면) 나는 뇌 리셋에 필요한 수면 시간과 체력 회복에 필요한 수면 시간이 꽤 차이난다. 전자가 훨씬 짧다. 대개는 서너 시간만 자도 충분하다. 하지만 적어도 일고여덟 시간은 자지 않으면 체력이 달린다. 기분이 안 좋아서 잠이 느는 시기가 아니면, 그러니까 정신이 컨디션이 괜찮은 시기에는, 잠을 적게 잔다. 할 일이 많을 땐 곤란하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았으므로 적게 자고 잘 지냈다. 이사로 지친 탓일 것이다. 다섯 시간을 자고 깼다가 두 시간을 더 자고 또 한 시간을 마저 누워 있었던 것은.
잡다한 생필품을 사러 나섰다. 욕실에 둘 변기 커버나 비누받이, 칫솔꽂이나 수세미 ― 칫솔꽂이는 (쓸 수 있는 것을) 버리고 왔다 ― 따위 잡다하게 필요한 것이 많았다. 식사하고 장보고 카페에서 일기를 쓰고, 모두를 집 근처에서 할 요량이었다. (저번에도 그랬는데) 왠지 집 근처 식당들은 다 문이 닫혀 있었다. 어제 친구와 했던 대화 ― 둘 다 채식주의자이고 둘 다 일정한 상황에서 순대국을 먹는다 ― 가 생각나 순대국을 먹기로 했다. 식당은 걸어서 15분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맛있지는 않게, 식사를 마쳤고 쇼핑은 그 근처 다이소에서 했다. (변기 커버는 커다라므로) 커다란 봉투에 담아 들고 집 근처로 돌아와 봐두었던 카페에 갔다.
집 근처에 힙한 카페가 있더라, 고 친구에게 전한 곳이었다. 일요일은 휴무라고 했다. 오는 길에 발견한 “가비”니 “여시”니 하는 말들이 적혀 있는 카페로 갔다. 왠지 와이파이 안 될 것처럼 생긴 곳, 이라고 친구에게 전한 곳이었다. 큰 볼륨으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길래 조금 더 돌아가 다음 카페로 갔다. 역시 휴무. 또 조금 더 돌아가 들어간 곳에서 앞의 일기를 썼다. 테이블이 대여섯 개, 의자가 스무 개쯤 있는 곳이었지만 한동안은 혼자 앉아 있었다. 일기 쓰기를 마쳐갈 무렵 다른 객들이 들어 왔고 시끄러워졌다.
집으로 돌아와 세면대에 비누받이와 칫솔꽂이를 얹어 두고 짐을 정리했다. (맨손으로 변기를 만지고 싶지 않아 커버는 아직 갈지 않았다.) 책꽂이 하나를 채웠다. 책꽂이 근처에 놓여 있는 것들을 대강 꽂았는데 우연히도 제일 좋아하는 것들이 모여 있었다. 페미니즘 책들, 음반들, 그리고 선물 받은 소설들. 책꽂이는 총 여섯 개가 있고 책은 그 중 네 개 반 정도를 채울 만큼 들고 왔다. 책꽂이 말고도 짐이 많다. 이 페이스를 유지하면 한 주 정도가 지나 대강의 정리를 마치게 될 것이다.
시간도 체력도 남았지만 마음이 다해 또 한 동안 누워 있었다. 인터넷 설치 문의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지만 모든 상담원이 통화중이라는 말이 몇 번인가 반복되고는 끊어졌다. 아까 돌아올 때쯤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제법 굵어졌다. 잦아들 때까지,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빨래를 돌리고 산책을 나섰다. 단지 출구를 나서 다른 단지 하나를 지나면 큰길이 나온다. 길가 편의점에서 우유를 한 병 사 들이켜고 길을 건너 논밭 사이 길로 접어들었다. 솔방죽이라는 작은 저수지에 이것저것을 설치한 생태공원이라는 데를 슬쩍 둘러 보고 조금 더 길을 가자 꽤 넓고 길게 만들어 놓은 산책로가 나왔다. 촘촘히 박혀 있는 낮은 가로등마다 스피커가 붙어 있었고 끈적하거나 감상적인 가요가 흘러 나왔다.
아무 방향으로나 걷다가 지도를 보니 곧 큰 호수가 나온다고 했다. 의림지. 지도를 넣고 대강 그 방향으로 걸었다. 멀리서 전광판이 번쩍이길래 호수공원 입구인가 했는데 웬 교회만 있어서 돌아 왔다. 가는 길에 지나친 정자를 다시 만나 누웠다. 지도를 확인하니 교회 뒤로 돌아가면 호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안 되는 거리였지만 다시 가지는 않았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내일도 산책을 나올 테니까.
이십 분쯤 누워 있었다. 이미 주위가 어두웠다. 대충 집이 있겠다 싶은 방향으로 걸었다. 아파트가 좀 많아 보이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풀벌레 소리를 듣고 청개구리를 보았다. 낯선 큰길가에 이르렀다. 집에서 도보로 25분 거리. 큰길을 따라 집까지 걸었고 중간 지점 쯤에서 ― 놓친 집이 있는 단지 근처에서 ― 분식집에 들러 밥을 먹었다. 집앞 마트에서 욕실 앞에 둘 발매트와 생수 한 병, 파스타 면 한 봉지를 샀다. 발매트는 다이소에서 사려 했었지만 다이소 물건엔 늘 알 수 없는 그림이 박혀 있으므로 사지 못하고 나왔었다. 무늬 없이 하얀 것을 골랐다.
짐을 뒤져 빨래 건조대를 조립했다. 부품이 세 개의 봉투에 나뉘어 담겨 있었다. 이전 집에서는 부엌에 놓고 썼는데 통로가 좁아 반만 펼쳐 두었더랬다. 쓰지 않았던 쪽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이번엔 베란다에 둔다. 이번에도 역시 양쪽 날개를 다 펴면 길이 막히지만 베란다는 빨래 너는 데밖엔 쓰지 않을 것이므로 상관 없다. 휴지를 적셔 먼지를 닦고 빨래를 널었다. 아침이 되면 볕이 들 것이다. 비가 오므로 창은 닫아 두었다. 리모델링 하면서 (아마도 보일러 배관을 새로 설치하느라) 바닥을 높인 집인데 베란다 바닥은 합판으로 얼기설기 만들었다. 퀴퀴한 냄새가 난다. 집을 보러 왔을 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알지 못했다. 환기를 자주 하면 되겠지,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씻고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이 일기를 쓴다.
쉰 시간을 빼면 집을 정리하고 주변을 둘러 보는 데에 하루를 보낸 셈이지만 서울을, 정확히는 두고 온 것들을 많이 생각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달고 온 것들을. 물리적으론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여전히 겹치는 삶을 살 것이므로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그러나 어떻게 해야 잘 겹칠 수 있을지 모르는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