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김대중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소규모 언론사였고 데스크의 개입이 거의 없는 곳이었는데, 아마 그때가 유일하게 특정 기사 작성을 요구 받은 때였던 것 같다. 별 건 아니었고, 김대중의 일대기를 작성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게는 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가 대통령직을 맡았던 시기의 나는 정치 같은 데엔 관심이 없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그의 삶에 대해 딱히 배운 것도 아니었으므로, 민주화 운동가로서의 그에 대해서 역시 잘 알지 못했다. 내게 그는 그저 노무현에 앞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친 전직 대통령에 지나지 않았다. 김대중 퇴진을 외쳐 본 적이야 물론 없지만, 노무현 퇴진을 외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였던 내게, 그는 탐탁지 않은 인물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삶을 되짚고 업적을 기리는 글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이 어제 저녁에 떠올랐다. 당시 일했던 언론사의 웹사이트는 사라졌기에 누군가 그 글을 찾아 읽을 일이야 없겠지만(특별한 글도 아니었으므로, 어딘가에 갈무리되어 있을 일도 없을 테다), 당시에 어떤 문장들을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노회찬이 세상을 떠났다. 면식이 있는 사이도 아니고, 내 삶에 큰 흔적을 남긴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김대중보다 내 삶에 가까웠던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무언가 해야겠다고 느꼈다. 특별한 일을 할 것은 아니다. 김대중 일대기를 쓸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사람의 활동을 되새겨 보는 일 정도는 해야겠다고 느꼈을 뿐이다.
나는 정당 정치나 의회 정치에 큰 관심이 없고 그와는 당적도 달랐으므로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주된 감정은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내가 말이 많은 사람, 특히 비유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종종 갖는 불안감이다. 그에 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그가 말실수를 한 장면이다. 2009년 한 방송 토론에서 진보 인사의 정치적 전향을 비판하며 그는 “내가 국회 법사위 있을 때 성전환 하는 분들, 소수자들의 권리를 옹호해온 사람인데, 국민 다수가 그렇게 성전환 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는가”라고 말했고, 이 일로 성소수자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1
그러나 많은 이들은 또한 그를 성소수자 인권 옹호에 적극적이었던 이로 기억할 것이다. 2007년 그는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로부터 무지개인권상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친구사이 간사는 노회찬이 트랜스젠더의 입양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일을 언급하며 “동성애자 사회에서도 하리수씨 입양에 대해서 ‘너무 앞서나간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입장 정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노회찬 의원실에서 입장을 발표해 문제를 가십거리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로 환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2
2006년 그는 성전환자의성별변경등에관한특별법안을 발의했다. 비록 현행 대법원 예규와 같은 수준의 요건을 제시하고 있지만, 국회와 정부는 여전히 그만한 법조차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3 2008년에는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다. 역시 통과되지 못한 이 법안의 차별 금지 사유에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명시되어 있었다. 같은 시기 법무부가 제출한 안에서는 삭제된 항목들이다.
한편 2005년에는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에관한법률안을 발의했다. 2004년에는 국가보안법폐지법률안을 발의했으며, 또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보장하는 내용의 병역법개정안을 내기도 했다. 의회 안팎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활동해 온 것이나 여러 집회에 참석하며 사람들과 함께 싸워 온 것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대표발의한 백 건이 넘는 법안 중 원안 혹은 수정안이 가결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도 누군가가 그의 업적으로 기억해 줄 만한 사안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그의 삶에 대한 지표가 되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폐기된 수많은 법안들은 물론, 정당인으로서 다른 당이나 정부를 향해 그가 발언했던 것들은, 한국 현대사에, 적어도 그 근처에 있었던 나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얕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조금은, 다른 기억을 가져보려 한다.
- http://runtoruin.com/1489 참조. ↩
-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13000/2007/12/021013000200712060688026.html?fbclid=IwAR2ijXjChlkpzeAn4Yi9IR4M1b7-I0qLy8bnrG0fzszrXN1VW550lCrpzEk 참조 ↩
- 성별 정정에 관한 법안이 발의된 것은 2002년 김홍신 의원안, 2006년 노회찬 의원안의 두 건이 전부다. 2008년에는 국가인권위원장이 법 제정을 권고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