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웹진 《글로컬 포인트》 광장 특별호에 공동저술로 실은 글(http://blog.jinbo.net/glocalpoint/65)의 초고. 브레인스토밍 정도 식으로 쓴 거라 흐름이 잘 잡혀 있지는 않다. 다른 글들은 흐름이 잘 잡혀 있다는 건 아니지만.
광장의 언어
2016년은 육십갑자로 따져 병신년(丙申年)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여성인 박근혜와 병신(病身)을 엮어 "병신년”이라는 조롱이 적지 않습니다. 조롱만으로도 부족하다는 심정 이해합니다. 그러나 병신년은 장애인과 여성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악의 없는 비유라도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면 버리고, 피할 수 있으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길입니다. 때론 언어가 의식과 행동을 규정합니다. 근로자, 민노총, 노가다, 잡부, 노무자 등 민주노총은 잘못된 언어의 피해자기도 합니다. 무심코 던진 말과 언어의 유희에 애꿎은 피해자가 있을까 걱정합니다. 민주노총은 약자에 대한 비하 우려가 있는 말을 쓰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구성원들도 함께하길 권유할 것입니다. 내년에도 민주시민들의 멋진 풍자를 기대합니다.
이 짧은 글은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우리가 익히 아는 민주노총이 지난해 마지막 날 낸 논평의 전문이다. 현장에서 부딪혀 온 이들에게서는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글이었다. 놀라웠고, 반가웠다.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무대에 오르지 못한 이들이 있다. 무대에서 끌어 내려진 이들이 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수식어들은 논의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가닿아야 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혐오 발언으로 누군가를 ― 어쩌면 티나지 않게 ― 배제하는 이들이 무대에서 끌어내려 졌고, 입장을 허락받지 못했다. 야유를 받았다. 그들 중 누구는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잘못을 묻으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여성의, 장애인의, 청소년의, 비정규직의, 성소수자의 요구는 “우리”의 요구와는 달랐다.
흔히들 ‘87년 체제’를 이야기한다. 민주공화국으로서의 2016년 한국을 지탱하는 근간이다. 이명박 정권 때부터 이미, 혹은 그 전부터도, 87년 체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가 쉼 없이 나왔다. 좀 더 강력한 삼권분립, 대통령 권한의 축소와 같은 것들이 언급되곤 했다. 개헌을 통해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고들 했다. 기본소득 운동이나 인권 운동 등의 영역에서 조금은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힘을 가진 쪽에서는 대개 87년 체제 ― 형식민주주의의 완성 이상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같다고 믿었다. 제도를 정비하면, 우리가 “공화국”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공화국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한 교수는 최근의 칼럼에서 “공화국의 최후 골간”은 “공공성”이며 이것은 “군인과 음부를 뜻했다”고 썼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과 국가 생명은 죽기 때문”이란다.(명림, 「민주공화국의 부활은 광장에서…사실상의 하야와 헌법적 하야」, 《한겨레》 , 2016.11.11.)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새로운 국민을 생산하는 사람이 없으면, 나라가 유지되기 힘들 테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민중총궐기의 한 사회자는 “국가는 모두의 어머니여야 한다”고 말했다. 국부 이승만, 제 2의 국부 박정희 모두 국민들을 죽이기만 했으니 이제쯤 어머니를 그리는 그 마음을 이해해 주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음부에게도 자신만의 쾌락이, 어머니에게도 자신만의 꿈이 있을 것이다. 여성은 자식을 낳고 기르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믿는 이들이 항의했다.
광장의 언어. 성차를, 민주주의를, 공화국을, 박근혜 이후를 말하기로 한 이 글에 썩 어울리는 제목은 아니다. 광장에서는 많은 이들을 만난다. 서울말을 쓰는 이도, 전라도 말을 쓰는 이도 있다. 무능한 나로서는 대화할 수 없는 수어를 쓰는 이들, 외국어를 쓰는 이들도 있다. 서로 다른 말들이 서로 다른 내용들을 담고 광장을 떠돈다. 그런 점에서 광화문 광장은 백만이 모이든 이백만이 모이든 아직 그리 큰 광장은 아닐 성 싶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직 부족하다. “광장의 언어들”을 알 때에야 87년 체제의 완성이 아닌 극복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흔히들 하는 말로 본론을 시작하자. 공화국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public의 어원은 ‘공공의 것’을 뜻하는 라틴어 res publica이다. 국어대사전은 “공공”을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국가의 체제와 제도가 누구 하나에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될 수 있는 것, 그것이 공화국이다. 이런 말로 풀어 쓴 사람도 있다.
공화국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운용, 유지되는가? 간단하게 말해 공화국이란 사회적 갈등이 제도 정치의 영역에서 말과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체제가 아닌가? 말로 하자는 것, 제도권의 영역에서 말로 타협하여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체제, 그것이 바로 공화국이다. 그래서 공화주의자 안에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도 있고, 보수주의자들도 있을 수 있다. 공화주의는 철저하게 제도의 운용에 대한 형식적 문제이지 정책 내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엄기호, 「공화국의 죽음과 새로운 시민의 탄생」, 《프레시안》, 2009.06.05.)
그런 점에서 한국은 공화국이 아니고, 아니었다. ― 저 글을 쓴 이는 공화국이었던 시기가 있다고 믿는 것 같지만 말이다. 단순히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혹은 그 이전의 정권들이 여론을 무시하고 소수의 뜻대로 권력을 휘둘렀음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역적으로는 호남과 강원을, 사상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을, 성적으로는 여성과 성소수자들을, 또한 장애인들을, 비-성인들을, 언제나 배제해 온 것이 한국의 역사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공화국다운 헌법을 마련한지 이미 스무 해가 넘었다고는 해도, 한국은 늘 죽은 공화국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심심찮게 울려퍼지는 노래다. 누군가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저 노래를 따라 부르지만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이 한구석에는 있다. 지금의 집회에서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청소년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퀴어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장애인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는 이들이다. 무대에서 혐오 발언을 하는 이들을 끌어 내리는 이들, 무대의 사회자에게 야유할 줄 아는 이들, 여지껏 “두루 관계되지” 못했던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속한 국가가 자신을 혐오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 나라의 국민으로 남는, 자신이 속한 정당이 자신을 혐오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 정당의 당원으로 남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집착하고 있다, 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꾸고자 하는 이들, 바뀌고자 하는 이들 ― 이들이야 말로 공화주의자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87년 헌법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 그것을 완성하고자 하는 이들, “우리”가 하나임을 믿는 이들이 아니라 말이다.
광장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나는 광장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 합심해서 박근혜 하야를 요구하는 이들, 백만이 모이건 이백만이 모이건 그 사이에서 나는 “광장의 언어”를 찾을 수가 없다. 차벽을 넘을지 말지에 관한 논쟁에 흥미가 가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차벽을 넘으면 청와대가 있다. 청와대에는 박근혜가 있다. 차벽을 넘을 수 있다면 박근혜를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다음엔? 아무것도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박근혜를 하나의 오점으로 생각하는 한, 그 오점을 지우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뿐이다. 포스트박근혜 시대가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다른 무언가를 상상할 줄 모르는 한, 남는 것은 여전히 죽어 있는 공화국 뿐이다. 우리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공화국이라는 ‘최소한’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공화주의는 철저하게 제도의 운용에 대한 형식적 문제”라면, 공화국은 영원한 거짓말이다. 제도에 누가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누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한 말이다. 이미 쫓겨난,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지 않는 한 말이다. 그저 형식적인 주권자들로서가 아니라, ‘최소한’에 멈춘 자들로서가 아니라, ‘최소한’을 확보하고 거기서 출발하는 “우리”를 만들어 나가지 않는 한, 차벽을 넘건 말건 박근혜가 하야하건 말건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박근혜 이후”를 말하는 사람은 많다.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어떤 처세를 권하는 이도, 새로운 경제 정책 기조를 제안하는 이도 있다. 언론에 한 줄 글이나마 실을 수 있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러나 여전히 형식 민주주의 제도의 보완, 경제 양극화 완화 같은 선에 머문다. “병신”이란 말도 “년”이란 말도 쓰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또 다른 “병신년”이 대통령이 되지 않는 세계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많은 광장의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박근혜라는 오점을 지우는 걸레질이 아니라, 박근혜 이후를 그리는 붓질을, 박근혜 이후를 조각하는 망치질을 해야 한다. 하야해야 할 것은 박근혜라는 한 명의 권력자가 아니다. 그 권력을 유지하는 모든 것들 ― 권위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주의, 개발주의, 지역주의, 반공주의 등등을 함께 허물 언어를 우리는 필요로 한다.
시위라는 스펙터클
시위는 축제다, 라는 말이 2008년 이후로 통용되는 듯하다. 2008년 촛불집회에선, 밤새 공연이 펼쳐졌다. 누군가는 노래를 했고 누군가는 젬베를 두드렸다. 누군가는 플룻을 불었고 누군가는 춤을 췄다. 사람들은 집에 갈 생각을 않고 공연들을 즐겼다. 그런, 축제였다.
실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집회는 언제나 축제였다. 무대에 오른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문선대의 무용을 보고, 도로에서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만나는 타지역 사람들과 반가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집회가 그저 경찰들과의 대거리로 여겨졌을지 몰라도, 집회는 언제나 축제였다.
요즘의 축제에서는, 그러니까 시위에서는, <민중의 노래>가 톡톡히 역할하고 있는 듯하다. 이 제목을 접한 이들을 둘로 나뉠 것이다. “어둠에 찬 반도의 땅”을 떠올리는 사람과 “너는 듣고 있는가”를 떠올리는 사람으로. 요즘의 집회에 울려 퍼지는 것은 후자지만, 나는 전자를 떠올리는 사람이다.
꽃다지의 노래다. 민중가요, 혹은 투쟁가요로 불린다. 발표된지는 스무 해가 넘었다. 군사주의적 수사로 가득하다. 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후자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것이 탐탁지는 않다. (어쩌면 군가 풍이라서) 비교적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전자의 노래와는 달리, 후자의 노래는 공연을 위한 것이다. 그저께 집회에서는 뮤지컬 가수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했다.
정부 주최의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이 아닌 중창으로 무대에 올린 것이 몇 차례 논란이 되었다. 이것은 단지 보수 정권의 인사들이 노래를 따라 불러야 하느냐 그러지 않아도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중창은 분업이다. 자신이 맡은 파트만으로는 곡이 완성되지 않는다. 순전한 관객의 역할을 맡는 이들도 있다. 모두가 모여서야 하나의 세계가 겨우 완성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스펙터클일 뿐이다.
제창에는, 원칙적으로는, 모두가 참여한다. 한 명 한 명이 완성된 곡을 부른다. 참여하는 사람만큼의 노래가, 참여하는 사람만큼의 세계가 펼쳐진다. 후자의 노래가 울리는 것이 탐탁지 않은 것은 그래서다. 집회가, 축제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다.
박근혜만 아니면 되는, 광장에서 말할 자신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는 그저 구경하는 집회로 족하기에 집회가 이런 축제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박근혜 이후를 고민하지 않는, 집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지 않는 — 실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좋은 이들이 모여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래서, 광장의 언어
시위는 축제다. 그러나 그저 구경하면 되는 축제는 아니어야 한다. 구경거리가 많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구경꾼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연자 자신을 위해서여야 한다.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박근혜 퇴진이라는 텅 빈 말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 이후를 고민하는 꽉 찬 말을 내어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거창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 글이 어떤 답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승만의 시대에, 박정희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어느것 하나 청산되지 않은 역사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어쩌면 빈곤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말하려는 것이다. 상상해야 함을, 미래를 구상해야 함을.
혹자는 말한다. “광장은 앙시앵 레짐을 해체할 수 있지만,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지는 않는다"고.(「박근혜 이후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경향신문》, 2016.11.24.) 그는 그래서 직업 정치인들에게 지혜를 요구한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지 않고 – 비록 그것이 법적인 용어들로 정제된 것은 아니라 해도 – 어떻게 앙시앵 레짐을 해체할 것인가? 프랑스의 군중은 왕을 처형했다. 그것은 단순히 구시대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왕이 없는 새 시대를 여는 행동이었다.
장애인 혐오 없이, 여성 혐오 없이 박근혜를 내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장애인 혐오 없고 여성 혐오 없는 새로운 체제를 여는 일이다. 혐오 없는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그 언어가 통용되는 하나의 세계를 여는 일이다. 그 시작은 광장 한 구석의 작은 무리일지언정, 그것이 무대에 전해지고 시위에 참여한 ‘동료’들에게 전해질 때,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체제를 여는 언어가 될 것이다.
그래서, 광장의 언어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침묵하며 무대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 텅 빈 구호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기를, 각자의 새 시대 구상을 내어 놓기를, 그래서 토론하기를 바랐다. 박근혜 이후의 시대를 또 한 명의 구세력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자신이 새로운 세력이 되어, 새 시대를 맡아야 한다.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