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잔. 그리고 세 잔. 어제와 오늘 마신 커피의 수다. 내 집을 갖지 못한 탓이다. 눈을 뜨자마자 씻고 집을 나섰다. 분식집에 들러 천 원짜리 주먹밥 하나를 사서는 길을 걸으며 꾸역꾸역 씹었다. 카페에 들어섰다. 익숙한 풍경이다. 적당한 빈 자리를 골라 짐을 내려 놓았다. 커피를 주문한다. 아메리카노, 이천 원이다. 물가가 싼 동네에서 싼 카페를 찾고 거기서 제일 싼 음료를 찾는다. 내 집을 갖지 못한 탓이다.
커피를 홀짝이며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르바이트라고 해 봐야 큰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을 위해 새로 산 컴퓨터, 일을 위해 매일 마시는 커피. 여기까지만 해도 급여의 대부분이 사라진다. 돈을 모으기 위한 일은 아닌 셈이다. 그저 번 만큼 씀으로써 하루하루를,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다. 내 집을 갖지 못한 탓이다.
월세방에 산다. 한 달에 이십팔만 원. 공과금을 더하면 매달 삼십만 원 가량이 꼬박꼬박 빠져 나간다. 삼십만 원. 월세를 제외한, 밥값이며 교통비며를 더한 돈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에는 조금 더 쓴다. 카페에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내 집을 갖지 못한 탓이다.
집은 좁다. 벽을 따라 책장이며 서랍, 옷걸이며 냉장고며가 늘어서 있고 방바닥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공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딘가에 쓸모가 있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그저 머리칼이며 먼지며가 뒹구는, 쓸모 없는 공간일 뿐이다. 하지만 그 공간마저 없으면 더 숨이 막힐 것이다. 집은, 아니 방은, 좁다.
방 한켠엔 빈 맥주캔이 쌓여 있다. 커피는 싼 동네지만 술값마저 싸지는 않으므로, 혼자 술집에 가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한다. 술은 집에서 마신다.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호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캔에 천오백 원, 이따금 한 캔 정도씩 마실 만큼은 돈을 번다. 아직은 말이다. 캔을 찌그려 비닐봉지에 담고 있자면 묵은 술냄새가 훅 하고 올라온다. 술 생각이 가시는 냄새다.
다른 쪽엔 라면을 끓여 먹고 씻지 않은 냄비가 있다. 냉장고가 있기는 하지만 든 것은 없다. 불규칙한 생활, 몇 달을 열지 못한 김치통엔 곰팡이가 슬었다. 곰팡이 슨 김치를 내다 버리고 나자, 냉장고 속엔 남은 것이 없었다. 가끔의 사치로 산 과일이 들었다. 내가 사치를 부렸다는 사실을 어느 날 이후로 냉장고는 열리지 않았고, 두 알 남은 참외는 뭉그러진 채 냉장고 속에 남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만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므로, 참외는 껍질째 먹었다. 꼭지가 있는 부분은 먹을 수 없었지만, 날이 쌀쌀하므로, 그 정도는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다. 담뱃재가 수북한 쓰레기통이다. 집에서는 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쓰레기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은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다. 여름에는, 적잖은 벌레가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잠만 자는 집을 나서면 가는 곳은 주로 카페다. 아침을 대강 해결하고 카페에 앉아 일을 한다. 점심을 먹을 때가 되면 짐을 싸서는 싸구려 식당을 향한다. 운이 좋으면 밥을 먹은 후에 원래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다. 이따금 컵을 치우지 않고 나가는 수를 부리기도 한다. 내 자리라는 것은 없으므로, 다른 이가 앉아버렸다면 하릴 없이 다른 자리를 찾아야 한다. 내 집이 없는 탓이다.
집은 좁다. 카페의 작은 테이블이 더 움직이기 편할 만큼, 집은 좁다. 카페 테이블에 물건들을 늘어두면 내 방 같다. 남는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아서, 키보드를 아슬하게 올려두고 손목을 겨우 걸치고 일한다. 저녁이 되면, 점심 때와 같은 일을 반복한다. 오늘은 점심으로 자장면을, 저녁으로 라면을 먹었다. 커피는 세 잔 모두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잠을 자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 탓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