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여성인지 묻기: 페미니즘의 첫 번째 경유지

여성의 전화 소식지 <베틀>에 실은 글. 급한 마감을 맞추느라 엉망으로 썼는데 그냥 그대로 나갔다 흑.

 

 

 

누가 여성인지 묻기: 페미니즘의 첫 번째 경유지

 

 

 

‘양성평등기본법은 성소수자 관련 개념이나 정책을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전시 성평등 기본조례의 관련 내용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소수자 보호 및 지원’을 명시한 대전시 성평등기본조례에 대해 여성가족부가 밝힌 입장이다. 결국 대전시는 조례를 개정했다. 10월 6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는 이를 규탄하는 여성 성소수자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곳에서 장애여성공감 배복주 대표는 (받아 적지 않았기에 정확하진 않지만) 이렇게 말했다.

 

“양성평등기본법이 성소수자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장애인 문제는 장애인복지법에서만 다루어야 합니까?”

 

누군가는 이 말을 단순한 수사의문문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사회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나누고 위계를 매긴다. 낮은 위계의 사람들에게는 제약을 가한다. 그리고는 그 제약이, 마치 그 사람들의 탓인 것처럼 꾸며낸다. 낮은 위계에 놓인 사람들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운동이 이 구도에 갇힐 경우, 법은 선심 쓰는 모양새를 취한다. 장애인 복지 관련 법들, ‘다문화 가정’ 관련 법들, 그리고 양성평등기본법 같은 것들이 이러한 경우다.

물론 소수자들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법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법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한다. 법은 ‘정상인’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비정상인’들에게는 부수적인 법들만이 주어진다. ‘비정상인’들은 그 법 속에 갇혀, 끝내 ‘비정상’으로 남고 만다. 법의 양성평등이 성소수자를 부정할 때, 정체모를 그 양성은 정상이 되고 성소수자들은 비정상이 된다. 그래도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양성이 정상이라면, 그 양성에 속하는 여성 또한 정상인 셈이니까.

늘 이등시민이던 혹은 시민조차 되지 못했던 여성도 이렇게 정상이 되고 시민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양성평등기본법은 여성을 위한 법이다. 여성은 여전히 이등시민이고 그 자체로 ‘비정상’이다. 누가 여성인지, 아직도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여성 성소수자 궐기대회의 모토는 “왜 성소수자를 배제하느냐”가 아니라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였다. 과연 여성이란 누구일까. “여성 성소수자”가 여성에 성적 소수자성을 덧붙이는 것이라면 우리는 또 다른 다양한 여성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청소년 여성과 청년 여성과 노년 여성처럼 다양한 나이를 덧붙일 수도 있고 노동자 여성, 반대로 자본가 여성과 같은 것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이 속성들을 뗄 수 있을까? 나이와 여성을, 계급과 여성을 다시 나누어 “여성”만을 남길 수 있을까?

아무런 속성도 갖지 않은 여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양성”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어떤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 세계에 실은 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 저 속성들을 다시 붙여야 한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것의 실체가 없다면, 실은 “성소수자”나 “노년”, 혹은 “노동자” 같은 것들은 “여성”에 덧붙는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저 모든 것들이 “여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양성평등”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실체 없는 남성과 여성을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양성평등이 아니라 성평등 이라는 말을 쓴다(사전에는 없는 단어지만 말이다!). 수많은 요소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지는 성이라는 요소를 빌미 삼은 차별과 불평등에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남성과 여성 같은, 언뜻 분명해 보이는 표식 뒤에 있는 진짜 성을, 진짜 사람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평등이라는 말을 쓴다.

이에 궐기대회에서는 여섯 명의 성소수자 여성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노동운동하는 레즈비언 여성의, 학교에 남성으로 입학해 여성으로 졸업한 트랜스젠더 여성의, 성소수자 청소년 여성의 삶이 이야기되었다. 그 어디에도, 아무 수식어 없는 순전한 여성 같은 것은 없었다.

 

여성이라는 단 하나의 표식으로 수많은 여성들을 뭉뚱그리면, 정체 모를 이등시민이 탄생한다. 실체가 없으므로, 확인할 길 없는 편견을 덧씌우기도 쉽다. 된장녀, 김치녀, 김여사 … 이런 말들은 특정 여성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체 없는 “여성”이라는 이등시민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등시민들이 받는 제약은 그 자신의 탓으로 돌려진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는 아니지만 같은 정부 기관인) 교육부가 최근 그 증거(?)를 들이댔다. 바로 학교성교육표준안이다. (꼽자면 문제야 끝이 없지만) ‘성적 지향’과 같은 용어 사용 등을 비롯한 성소수자 관련 내용 교육을 배제해 또한 문제가 되기도 했던 이 ‘교육’안의 초등학교 고학년용 자료에 포함된 성별 차이 항목에서는 남성은 운동과 게임에, 여성은 외모와 수다에 관심을 갖는 뇌를 갖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쓴 것답게, 성폭력 관련 항목은 성폭력의 원인으로 ‘여성이 데이트 비용을 적게 낸다’를 드는 한편 성폭력 예방법이랍시고 ‘거절하는 법’을 내세우고 있다. ‘여성은 이러이러한 존재고, 그러므로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전형적인 사고의 흐름이다.

전혀 상관없는 일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양성평등기본법을 둘러 싼 문제와 학교성교육표준안의 문제는 정확히 같은 궤를 따르고 있다. 실체 모를 여성만을 생각하며, 다양한 여성들을 낳는, 다양한 여성들에게 영향을 주는 권력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성기 모양 정도나 생각하며 떠올렸을 여성이란 존재가 겪는 문제들을 권력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설명하는 법은 한 가지뿐이다. 여성 자신의 문제로 돌리는 것 말이다.

 

페미니즘(여성주의라고 불러도 좋고 아예 여성해방론이라고 불러도 좋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의 출발점은 바로 거기다. 실체 모를 여성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여성인지를 묻는 것, 여성이라는 이름에 얽힌 권력들을 묻는 것,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출발이다. 여성이라는 실체 없는 표식 뒤에 숨겨진 다양한 여성들의 삶, 그곳이 바로 페미니즘이 가장 먼저 가고자 하는 곳이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모든 행동주의 철학은 고유의 현실인식을, 그리고 그 현실인식을 위한 방법론을 갖는다. 페미니즘의 방법론이란 성의 이름으로 무엇이 어떻게 위계화 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지위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맥락에서 배제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따져야 한다. 누구나가 성별화되는 이 세계에서, 성의 이름을 얻지 못한 것들을 갖는 이들이 어떻게 ‘누구’조차도 아니게 되는지를 따져야 한다.

“우리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하고 물었던 여성들은 다시 이렇게 묻는다. “여성가족부가 말하는 여성은 누구인가?” 이것은 또한 우리 자신에게도 항상 물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이란 누구인가? 성이란 무엇인가? 그 답을 찾는 것이 페미니즘의 첫 번째 여정이고 그 답이 있는 곳이 ― 양성평등이 아닌 ― 성평등을 향한 페미니즘의 여정, 그 첫 번째 경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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