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로 그에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한국이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국가가 되었으면 한다는 발언(그나마도 나중에 수위 조절을 하려 애썼던 그 발언)으로 그를 약간은 다시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가 서울 곳곳의 농성장과 노점들에 어떤 짓을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에게 무언가 크게 기대한 적도 없고, 애초에 그와 나는 속한 선거구가 달랐으므로 투표용지를 들고 고민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이번 일은 놀라웠다.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어떤 정치적 계산이 깔린 일일 텐데, 아무리 뜯어 봐도 맞는 계산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수 기독교 세력의 지지 성명을 받아낸 것이 유일한 성과가 아닐까. 그들의 협조도 표도 아닌, 한 번의 지지 성명 말이다.
시장이라는 자리는 애매하다. 투표로 뽑힌 자리이자 정책을 입안하는 정치인이면서, 이미 정해진 법들, 시민들의 요구들을 효율적으로 집행해야 하는 행정 관료이기도 하다. 비리가 목표가 아닌 한에야 대부분 그렇겠지만, 그는 저 두 가지 일을 다 잘 하고 싶어 했고 다 잘 하는 티를 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놀라웠다. 그는 정책 입안을 거부했고,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인권 운운하며 살아오고 일해 온 사람이, 그 경력과 그 이미지로 시장이 된 사람이 ‘시장으로서는’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시민이 시장이라고 또 시민 말씀대로 하겠다고 하던 사람이, 시민들이 가결한 인권 헌장, 시민들의 운동과 시의회의 협조를 통해 제정된 청소년 인권 조례와 상통하는 그 인권 헌장의 공표를 거부했다.
당연히 보편적 인권의 보장을 원하는 (트랜스젠더의 인권까지도!) 착한 사람이지만 시장이라는 자리의 무게 때문에 그걸 내세우지는 못하는 균형 잡힌 사람, 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인간적으로 그를 믿었던 사람들에게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그리고 (믿음과 상관없이)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개인 박원순의 성향이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정치인 박원순, 관료 박원순, 서울시장 박원순이 어떤 입장들을 받아들이고 어떤 입장들을 시의 정책으로 선택하는지, 그 외의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이번에 내가 읽은 그의 입장은 두 가지다. 정치인으로서도 관료로서도, 그간 스스로 무엇을 표방해 왔건 간에 ‘논란’이 될 만한 것은 행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논란’이 될 만한 그것은 시민단체들이 맡으라는 것. 실은 앞의 것보다는 뒤의 것이 놀라웠다. 인권 변호사로 살았다고는 해도 지난 세대의 일이고, 체면상 폭 넓은 인권 개념을 갖고 있는 척 해 왔지만 실은 그 세대의 인권 개념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면, 게다가 뭔지 모르겠지만 정치적 야망을 갖고 있고 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위한 계산을 했다면, 많은 기성 정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을 낸 것일 뿐이니 앞의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뒤의 것은 그의 인생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민운동이라는 것을, 이번 일에도 불구하고(그들의 입장에서야 불구할 것도 없겠지만) 그를 지지할 많은 이들이 몸담고 있을 시민운동이라는 것을, 단숨에 깎아 내린다.
물론 그가 해 온 시민운동이라고 해 봐야, 말을 거르지 않고서도 겨우 정부 정책에 대한 ‘보완’ 정도였음을 생각한다면 이 역시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시민운동이라고 불린 한, 그가 해 온 것들 역시 정부보다 앞서 가며 정부보다 많은 이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지 정부를 받쳐 주고 정부의 도구가 되어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번 발언, 그런 문제는 시민단체들이 힘써야 한다는 그 발언은, 시민운동을 제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많은 이들과 많은 단체들이 그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인권이라는 것을 시민운동의 과제로 ‘내려 주시지’ 않았더라도 당연히 싸웠을 많은 이들이 싸우고 있다. 그 운동을 그는, 그 가벼운 한 마디로 모욕해 버렸다.
그는 자기가 무슨 선택과 무슨 말을, 무슨 계산에 따라 했는지 알고 있을까 궁금하다. 나로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우직하지도 않고 약삭빠르지도 않은 이 일련의 발언과 행위들을 나로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다, 는 그 한 문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