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세월호

얼마 전에 구글에 들어 갔다가 우연히 한나 아렌트 탄생 108주년 기념일임을 알게 되었다. 세월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런 저런 말을 하기 어렵지만, 예전에 읽었던 한나 아렌트의 문장 몇 줄과 함께 세월호가 떠올랐다. 그래서 썼다.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은 한 인터뷰에서 “한 친구는 저에 대해 제가 모든 슬픔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견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이 문장을 고쳐서,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 그 중에서도 아마 핵심이라 할 수 있을 「행위」 장의 머릿말로 썼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견뎌질 수 있다. 그 밑에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서 아이작 디네센이라는 주를 달았다. 나는 저 말을 믿는다. 이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완전히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 끔찍한 일을 곱씹고 되뇌는 것, 그것은 그 일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지만 또한 다음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됨을 알고 있다.
세월호가 가라앉은지 어느덧 반 년이 넘었다. 그 배도, 그리고 열 명의 승객도 아직 물 속에 잠겨 있다. 그날 있었던 많은 일, 그 일이 있기까지 있었던 많은 일, 그리고 그 이후로 벌어진 많은 일은 여전히 의문 속에 잠겨 있다. 어떤 이들이 피로감을 말할 정도로 세월호라는 이름은 반복적으로 말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그 이야기는 완성되지 못했다. 당사자들 뿐 아니라 기자들, 활동가들, 변호사들 등 수많은 이들이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해 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누가 무엇을 당했는지 뿐만 아니라 누가 무엇을 했는지, 언제 왜 어떻게 그랬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대부분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미 행해져 되돌릴 수 없는 행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새로이 행위하는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용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처를 입기 전으로 되돌아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처가 저절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우리는 상대를 용서한다. 때로는, 어쩌면 대개는, 처벌로 용서를 대신하고 망각을 기다리지만, 이것 하나만은 변하지 않는다. 용서를 위해서도 처벌을 위해서도, 누가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므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용서는 물론이고 처벌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반 년이 흘렀다. 그날 사고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어떤 이들은 그 죽음을 야기했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죽음을 방조했다고, 이야기가 채 되지 못한 말들만이 반복된다. 선장과 선원들, 기업주와 경영진, 정부 인사들, 많은 이들이 지목되고 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죄인이라고 스스로 나서는 사람은 없고, 나서지 않는 사람을 조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또한 그들이다.
그 많은 이들이 죽었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영뚱한 사람들 뿐인 것 같다. 가족과 벗을 그 배에 실어 보낸 이들, 같은 배에서 같은 위험을 겪고 겨우 돌아온 이들, 뉴스를 보며 마음 졸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이들. 정말로 누군가에게 죄가 있고, 정작 그 사람은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다시 한 번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the evil)”.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한참 비판하다 말고 이 말을 꺼내며 다시금 자책을 시작하곤 한다. 악이 평범한 것이라면, 평범한 내게도 악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흔히들 그렇게 흘러 간다.
어쩌면 사실일 것이다. 내 속에는, 결코 작지 않은, 악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저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적어도 저 말을 보고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설픈 자기 반성이 아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움직인 것이 거대하고 절대적인 ‘악’이 아니라 그저 ‘사유하지 않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악마적인 본성을 타고 나지도 주입 받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이가 또한 사람임을 생각하지 못했던, 자기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임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뿐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내 속에도, 당신 속에도 있다라는 한 연구자의 말을 직접 부정했다. 자신이 뜻한 것은 “그것이 가장 추상적인 것보다도 더 추상적이라는 점”이며 여기서 “추상적이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 사유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경험하지 않고, 그저 이름표로, 숫자로, 어떤 재료로 여기는 것, 이 세계에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머릿속을 떠도는 글자와 숫자만을 두고서 계획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이 세계에 부과하는 것, 그것이 한나 아렌트가 본 악이었다.
아이히만은 내 속에도 있을 것이다. 벌레들을 죽일 때, 태연히 거짓말을 할 때, 많은 일들을 모른 채 할 때, 나는 세계를 벗어난 추상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것이 아니다. 저 ‘악’이라는 것이 심연 너머에 있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점, 지금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이것이다. 그들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아도, 악이란 것이 결국 텅 빈 것, 아무 내용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두렵고 아무리 강력해도, 우리는 결국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점, 그러므로 그것에 맞설 수 있다는 점, 지금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이것이다.
* “One of my friends said about me that I think all sorrows can be borne if you put them into a story or tell a story about them, and perhaps this is not entirely untrue.
Lynn R. Wilkinson, "Hannah Arendt on Isak Dinesen: Between Storytelling and Theory," p. 77, Comparative Literature Vol. 56, No. 1, Winter, 2004, pp. 77-98.
** Hannah Arendt, "On Hannah Arendt," p 308, ed. Melvyn Hill, Hannah Arendt: The Recovery of the Public World, St. Martin’s Press, 1979, pp. 30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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