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쓰기를 멈춘지 한 달 열흘이 되었네. 제천생활 반년을 결산하는 일기를 덧붙이려고 했는데 아직 쓰지 못했다. 그간은 거의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스터디 발제문을 쓸 일이 있었지만 그 역시 쓰지 않고 발췌문으로 대신했다. 1월 말에 여기에 짧은 번역문 하나를 올린 게 전부인 것 같다.정말 아무것도 안 썼나. 가물가물하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쓰고 있긴 하다. 진척은 거의 없다. 원래는 작년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1월에, 며칠 전까지는 그제쯤 끝내려고 했던 보고서다. 보고할 내용도 마땅찮지만 그보다는 기운이 안 나서 못 쓰고 있다. 마감이 이제 정말 코앞이 되었다. 그제랑 그끄제 한 시간씩 썼고 어제는 컴퓨터를 켜지 않았다. 오늘은 어떻게든 진척을 보려고 카페에 와서 앉았으나 워드프로세서를 열지 않은 채 앉아 있다. 조금 전에는 엠씨더맥스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십여 년 전에 즐겨 듣고 불렀던, 이제는 듣지도 부르지도 않는 노래. 음악 취향이 변한 탓은 아니다.
글만 안 쓴 게 아니라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애니메이션을 본다거나 하는 걸 빼면 말이다. 친구가 이사를 해서 이것저것 설치를 조금 해 준 것이 전부다. 그 외엔 늘 하던 설거지와 빨래 같은 것들. 그나마도 밥하기가 너무 귀찮아서 포장주문을 종종 했고 덕분에 플라스틱 그릇을 엄청 버렸다. 오늘 밤에는 (보고서 말고) 마감이 하나 있다. 내일은 셰어 총회. 보고서는 아무래도 다음주 초에나 쓰겠지 싶네.
1월부터 짚어도 한 일이 별로 없어서, 올해는 지금까지 10만 원 벌었다. 그 중 5만 원은 작년에 일한 돈이 들어온 것이므로 정확힌 5만 원 벌었다. 오늘 마감을 하면 열흘 뒤쯤 또 5만 원이 들어올 것이다. 3월부터는 혹은 4월부터는 번역서 작업을 시작한다. 계약금 같은 구체적인 사항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계약서를 아직 쓰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건 언제든 엎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일이 흔치야 않지만). 하지만 내가 할 만한 ― 인문사회철학 어쩌고 하는 분야로 서점 도서목록에 오를 ― 책은 애초에 생계비에 못 미치는 돈만 나온다. 여러 쇄가 팔릴 가능성이 높지 않으므로 매절로 계약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꾸역꾸역 인세 계약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엔 매절 계약 한 건을 거절했다 (매절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절한 건 아니지만 나머진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이건 필요조건 같은 것이어서 여기서 논의가 멈췄다).
쓸모 없는 고집이다. 내가 쓸 수도 있었을, 어쩌면 써야 했을, 적어도 읽고 나서 할 말이 있는 책을 번역한다. 단행본을 기준으로 하자면 쓴 글보다 번역한 글이 분량이 더 많지만 스스로를 번역가로 여기지는 않는다 (단행본, 같은 이상한 기준을 드는 것은 그저 온라인 지면이나 잡지, 도록 같은 걸 더하면 쓴 글이 더 많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한 푼이라도 더 받을 길을 찾아서 이걸 생업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서, 또 한편으로는 그저 남의 말을 옮겨 넘기고는 내게서 떠나 보내는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인세를 고집해 보고 있다. 지적재산권이니 저작권이니 하는 개념에, 그리하여 하나의 산물로 반복적으로 돈을 받는 데에 불만이 있지만 동시에 지금 관례 속에서 매절 계약은 이를테면 노동소외 같은 것이기도 하여서 나름대로는 마음이 복잡하다. 어떻든 몇 푼 안 되는, 따지고 보면 적자라고 해도 좋은 일이란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생각해보니 수요일 스터디에 두꺼운 책을 읽고 그 중 일부를 발제하는 글을 써 가야 한다. 보고서는 언제 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