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8-29.(목-월)

한도 끝도 없이 미루는구나…

2021.11.18.(목)

낮엔 뭐 했을까, 저녁엔 회의했다. 밤까지. 한 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 활동을 구상하는 회의여서 한 명씩 돌아가며 소회와 포부를 밝히는 시간이 있었는데 평소처럼 의연하게 했다. 전 한 게 없어서 딱히 소회랄 건 없고요,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은 아무 계획도 없습니다.

2021.11.19.(금)

서울행. 원래 스터디가 있는 날이지만 친구네 집들이로 대체했다. 이 스터디에는 함께 하지 않는, 이전 스터디를 함께 했던 친구다. 이러나저러나 스터디를 쉬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달리 날을 맞추기가 애매하여 스터디를 한 주 쉬기로 했다. 인문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따는 일의 지난함과 대책 없음과 기약 없음 같은 것들을 종종 이야기했다. 하나는 박사, 하나는 곧 박사. 나는 또 평소처럼 의연하게, 힘내세요, 했다.

집주인인 A가 잠시 먹을 걸 준비하러 주방으로 간 사이 B와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A가 왜 그렇게 조용하냐고 했던가 왜 그렇게 침울하냐고 했던가. B는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나는 말을 않는데 자신이 좀 피곤해서 그렇다고 했다. 관점을 바꿔 보라고, 나는 조용히 있는 사람인데 늘 열심히 반응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가 욕 먹었다.

저녁을 먹고 일어섰다. 식기건조대와 해초국수를 얻어 나왔다.

2021.11.20.(토)

계속 서울. 18일에 함께 회의한 이들 몇과 그 자리엔 없었던 이들 몇이서, 18일에 회의한 모임에 속한 모임의 회의를 했다. 나 외에도 서울 밖에서 오는 이가 있어서 장소는 고속터미널. 백화점에 입접해 있는 브런치 카페라는 곳에를 처음으로 가 보았다. 회의가 끝나지 않았는데 이용 시간이 끝났다고 하여 (다른 이들이) 터미널을 뒤져 도시락을 파는 카페에서 겨우 빈자리를 찾아 마저 회의.

바쁜 몇은 가고 안 바쁜 몇은 남아 서울대입구역으로 이동해 이른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마쳤는데도 여전히 이른 저녁이라 술도 마셨다. 고급 수제 맥주 전문점, 같은 슬로건을 달고 있었는데 추천메뉴는 오뎅꼬치였다. 고급인진 모르겠지만, 소규모 양조장의 생맥주들을 팔았고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근처에 사는 친구도 불러 합석했다.

2021.11.21.(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책을 읽었다. 카페에서도 읽고 어느 건물 로비에서도 읽고 걸으면서도 읽고 길가 벤치에서도 읽고 공원에서도 읽고 다른 공원에서도 읽었다. 그래봐야 읽은 분량은 아주 적다. 영어로 쓴 철학책. 업무차 읽는다. 재밌지만 더디고 더뎌서 가물가물하고.

공원에 앉은 것은 해가 지기 두어 시간 전쯤이었다. 텅 빈 작은 공원 구석에서 책을 몇 쪽 읽고 있는데 두 사람이 나타났다.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했다. 두 사람이 고양이에게 말을 붙였다. 고양이는 사람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들에게는 물론 내게도 다가왔다. 그들은 물론 나도 쓰다듬었다.

또 조금 지나자 사람 하나가 더 등장했다. 노년의 남성이었다. 나를 비롯한 세 사람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울타리 너머에서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 한참 찾았지 않느냐, 하는 식이었다. 두 사람은 저 분이 기르시는 건가봐, 놀러 나온 건가봐 같은 말들을 했다. 한 사람은 이윽고 밥을 먹자며 공원으로 들어 왔다. 넌 고기 싫어하지, 사료 먹자.

그밖에도 이런저런 말들을 했는데 잘 알아듣지 못했다. 고양이 이름을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벤치 밑에 있던 그릇에 사료를 부어준 그는 고양이를 한 번 쓰다듬지도 않고 떠났다. 작별인사는 말로만 했다. 고양이는 사료를 냄새만 한 번 맡고는 다시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밥보다 사람이 좋았을까.

문득 배도 고프고 목도 말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의점에 다녀 왔다. 두 사람은 가고 없었다, 고 생각했는데 그들도 다시 나타났다. 다른 편의점에 가서 고양이 간식을 사 온 모양이었다. 고양이는 그새 사료 그릇을 비운 뒤였다. 그들은 캔을 따서 그릇에 부어 주었다. 그러고는 마저 배드민턴을 쳤던가, 아니면 고양이를 보고 있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그대로 떠났던가. 모르겠다. 나는 책을 좀 더 읽고 다른 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조금 더 읽었다.

2021.11.22.(월)

뭘 했을까. 저녁은 곤드레밥을 먹었다.

2021.11.23.(화)

책을 읽었어야 했는데.

전두환이 죽었다.

전두환이 죽어서 책을 안 읽은 것은 아니다.

2021.11.24.(수)

역시나 책을 읽었어야 했지만, 굳이 카페에 가 앉아서는 아마도 시트콤만 봤을 것이다. 낮에는 화상회의로 강연을 하나 들을 생각이었다. 들으려면 들을 수도 있었지. 듣지 않았다.

2021.11.25.(목)

일어나 기차역 앞으로 갔다. 이른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읽다가 시트콤을 보다가 담배를 피우다가 했다. 마지막 담배는 세 시쯤 피웠다. 세 시 십육 분에 출발하는 동해행 무궁화호를 탔다. 동해역까진 세 시간쯤 걸린다. 동해역 앞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재떨이 옆에, 몇 개비 남은 담뱃갑을 두었다. 저녁은 칼국수를 먹었다. 1급 조리사 자격증을 걸어둔 백발의 주인은 마스크를 챙겨 쓰고 있었다. 주문을 받아 부엌에 들어가더니 마스크를 벗고 조리했다. 그리고는 다시 마스크를 쓰고 서빙했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 앞 마트에서 생수를 샀다.

몇 년 전에 친구와 와 본 적이 있는 숙소다. 낡고 낮은 아파트.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LP판 백 장 정도가 비치되어 있다. 대체로 맘에 들었던 곳이긴 하지만 맘에 들어서 다시 온 것은 아니다. 원랜 강릉에 갈 생각이었는데 한 번에 가는 차편이 없어 동해로 틀었다. 숙소를 찾기 귀찮아서 유일하게 아는 곳을 택했다. 물론 맘에 안 들었더라면 귀찮아도 다른 곳을 찾았을 것이다. 이사를 준비하던 시기에 이 아파트에 빈집이 있는지 확인했던 것이 떠올랐다. 없었다.

이용안내문에는 입실 직후 청소 상태를 확인해 알려주면 “다음 손님을 위해” 관리에 반영하겠다는 말이 있었다. 화장실이나 싱크대의 물때, 침구, 문들 먼지 같은 것들이 예로 적혀 있었다. 모두 문제가 있었고 알려주진 않았다. 타지에 사는 주인이 관리인을 통해 운영하는 곳이다.

밤에 문득 창밖을 봤는데 커다란 반달이 수면 가까이 떠 있었다.

2021.11.26.(금)

열한 시쯤 일어났을까. 근처 해안으로 갔다. 바닷가를 좀 걷다가 밥을 먹기로 했다. 저번에 갔던 식당은 폐업한 것 같았다. 그 옆에 있는 식당은 단체 손님 예약이 있어 식사가 안 된다고 했다. 그 식당 주인이 일러준 방향으로 조금 더 가서 마주친 짬뽕집에 들어갔다.

다시 원래 방향으로 돌아와 프랜차이즈 카페의 2층에 앉았다. 저번에 갔던 곳이다. 책을 읽을 생각이었지만, 일로 읽는 것도 영어로 쓰인 것도 철학책도 아닌 것을 챙겨 갔지만, 겨우 두어 페이지 읽고는 덮었다. 지난 여름에 선물 받은 책인데 아직 못 읽었네. 시트콤을 보다가 옥상에 올라가 바람을 쐬다가 했다.

바다를 따라 항구까지 걸었다. 좌판에서 회를 샀다. 숙소의 안내문에 추천 좌판으로 적혀 있는 곳. 회를 살 거라고 하자 물고기 몇 마리를 건져 보여주며 가격을 불렀다. 그대로 샀다. 어종은 듣지 못했다. 묻지도 않았다. 먹고 갈 거라고 하자 역시 아무 설명 없이 근처 어딘가로 이끌었다. 양념집 ― 고향에서는 초장집이라 불렀다 ― 앞에 이르러서야 어디로 가는 것인지 가격은 어떤지를 알려주었다. 역시 그대로 들어가 먹었다. 뭔가 인상적인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배불리 먹었다.

항구에 도착한 것은 저녁을 먹기엔 아주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항구를 조금 지난 곳에 있다는 작은 서점을 찾아갔다. 여행을 주제로 한 곳이었다. 주인은 친절하게 이런저런 말을 붙였다. 주제가 여행이 아니었다면 뭐라도 한 권쯤 샀을지도 모르는데. 빈손으로 나왔다. 근처에 연필 박물관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가보지는 않았다.

달동네랄까, 산비탈에 자리잡은 동네의 좁은 골목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굳이 관광지를 만들어 놓고는 사람이 사는 곳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팻말을 걸어둔 곳. 두 행위의 주체가 같은지 어떤지는 모른다. 동네 구경을 하지는 않았다. 가까운 길을 택했다. 조금 헤맸지만.

2021.11.27.(토)

전날과는 다른 경로 ― 일부 구간은 전날의 귀갓길과 겹치는 ― 를 지나 전날과 같은 해안으로 나왔다. 점심은 곰치국. 아귀나 곰치는 너무 못 생겨서 잡히는 족족 물에 던져 넣곤 했었고 그래서 흔히 물텀벙 같은 식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예전에는 쭈꾸미를 먹지 않았기에 잡히면 물에 던져 넣었다는, 그런 쭈꾸미는 서민의 애환을 안다는 말 ― 어느 식당에 붙어 있었다 ― 도 생각했다. 표준표기법으론 쭈꾸미가 아니라 주꾸미라고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도 받아들일 수가 없네.

전날과는 다른 카페에 앉았다. 역시 바다가 보이는 2층. 역시 책은 읽지 않고 시트콤을 보다가 옥상에 나가 바람을 쐬다가 했다. 나와서는 항구를 지나 한참을 걸었다. 고속터미널에서 친구를 보내고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역 앞에서 간단히 식사를 했다. 담뱃갑은 사라지고 없었다. 식사 전에는 노을을 몇 장 찍었다. 아홉 시가 조금 지나 제천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2021.11.28.(일)

시트콤만 봤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은 크게 괴롭지 않다. 일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담배를 피우지 않느라 일을 전혀 못하고 있다.

낮에는 버스 회사에 다녀왔다. 동해 가던 날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을 찾아 왔다. 차고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부엌에 있던 이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 음식을 내면서는 마스크를 썼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긴팔을 입고 들어가서는 반팔만 입고 나왔다.

2021.11.29.(월)

예의 식당에 다시 갔다. 옷을 찾으러. 겸사겸사 밥도 먹으러. 옷은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의자를 닦거나 의자를 치우고 바닥을 닦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조용히 챙겨 입고 가려다 혹시나 당황할까 싶어 가져가노라 말했다. 그리고는 카페에 앉았는데 일은 하지 못했다. 며칠의 금연으로 담뱃갑 몇천 원을 아꼈고. 간식값은 몇만 원을 썼다. 조각케익을 시켜 먹었는데 그다지 맛있지 않았다.

소득없이 일어나 길을 나섰다. 도보 삼십 분쯤 되는 곳에 있다는 모전석탑을 향했다. 아파트니 상가니 하는 것들이 있는 구역이 끝나고 천 하나를 건너 농가가 있는 구역이 시작되는 위치에 있었다. 절도 있었지만 자세히는 보지 않았다. 잔디밭이나 화강암 벤치나 나무 정자에 앉아 책을 조금 읽었다. 오래 읽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장을 조금 봤다. 집 근처까지 와서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시내로 나가 잡화점에 들렀다. 세탁조 청소제와 구연산을 샀다. 구연산은 스테인리스 냄비와 주전자를 씻는 데 쓸 것이다. 시내 가는 길에는 LED 전구를 하나 주웠다. 고장났으니 버려진 것이었겠지만 일단 주웠다.

집에 와서 분해해 보니 LED 기판과 변압기 기판을 잇는 선이 끊어져 있었다. 언제부턴가 납땜인두는 제대로 작동을 않는다. 겨우겨우 땜을 마쳐 전원을 넣었더니 한순간 불이 들어 왔다가 꺼졌다. 아무데서도 연기가 나거나 하지 않았으므로 이유는 알 수 없고 두 기판 중 하나쯤은 멀쩡할 수도 있지만 달리 테스트에 쓸 도구나 기판을 활용할 데도 없으므로 그쯤에서 포기했다.

LED 전구를 쓸 때마다 늘 궁금하다. 전기가 절약되는 것도, 전구 수명이 긴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래서 최종적으로도 LED가 환경에 덜 나쁜 걸까? 전통적인 전구는 구성이 단순하므로 (의지가 있다면) 약간의 수고만으로도 재활용할 수 있지만 종종 여나믄 개의 전자 부품으로 구성된 LED 전구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까지 다 계산해도 여전히 친환경적, 인 걸까.

밤에는 의림지에 다녀왔다. 급히 잡힌 화상회의가 하나 있었지만 나는 안 가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들어오라는 전화가 와서 길을 걸으며 접속했다. 늦지 않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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