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를 지탱하는 것은 그저 회복력이 아니다. 아픔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고통에 목적을 부여하는, 믿음이다.

인종학살이 두 해 가량 이어지자 가자 바깥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질문을 반복한다 — 가자 사람들은 어떻게 아직 버티고 있는 거지?
어떻게 제 아이를 묻은 어머니가 계속 주변을 돌보지? 어떻게 집도 생계도 가족도 잃은 남자가 계속 희망을 이야기하지? 어떻게 공습과 피란, 기아를 겪은 아이가 계속 의사가 되고 교사가 되고 기자가 되는 꿈을 꾸지?
그 답은 서구 심리학은 결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곳에 있다. 바로 믿음이다.
전문가들은 세계에다 가자가 정신 건강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트라우마 수준을 측정하고 우울도, 불안도를 계산하고 인종학살이 장기적으로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경고한다. 그래프를 그리고 조사를 수행하고 진단을 내려 보통은 무너지고 말 공포 속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어떻게 계속해서 살아가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심리학계의 지배적인 학파들은 대개 종교가 공적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세속 서구 사회에서 발전했다. 그 결과, 많은 심리학자들은 믿음을 그저 개인의 스트레스 관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러 변수 중 하나로 여긴다.
서구 심리학은 가자를 볼 때 트라우마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구를 보곤 한다. 그들은 증상과 이상을 찾는다. 병리학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의 고통을 병리학의 언어를 통해 이해하지 않는다. 의미의 언어를 통해 이해한다.
아이를 살해 당한 어머니가 꼭 “내가 이 트라우마에서 어떻게 회복하지?” 하고 묻지는 않는다. 대신 “어떻게 인내심을 지키지? 오 알라시여, 제게 힘을 주소서”라고 할 수도 있다.
집을 잃은 아버지도 “이 불안을 어떻게 하지?” 하고 묻지는 않을 수 있다. 대신에 “오 알라시여, 제게 인내를 허락하소서. 어떻게 제가 수 년을 쌓아온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을 것이다.
공습에서 살아남은 아이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정의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의미론적인 차이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정상 상태’ 회복하기
서구 심리학은 개인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인의 존재는 지극히 집단적이다. 서구 심리학은 치유를 개인을 이전의 정상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으로 전제하곤 한다. 그런데 가자에서 정상 상태란 무엇인가? 이전의 어떤 상태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이전”이 없다. 폭력은 평범한 일상을 멈춰세우고 끼어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수 세대째, 폭력은 평범한 일상 자체와 하나로 엮여 있다.
교통 사고나 자연 재해로 인한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고안된 틀들이 영구적 봉쇄 하에 살아가는 사회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진단 자체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라는 개념은 외상이 과거에 일어났다고 가정한다. “후”라는 말이 중요하다. 가자에는, 후가 없다.
폭격은 끝나지 않았다. 추방은 끝나지 않았다. 스트레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새로 벌어지는 참상 하나하나가 이전의 상처를 죄 다시 후벼 판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계속해서 견딘다.
외부인들은 이 견딤을 종종 회복력resilience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회복력이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다. 개인의 심리적 특성, 예외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자를 지탱하는 것은 그저 회복력이 아니다. 확신이다.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확신. 부정의가 진실을 지울 수는 없다는 확신. 집이, 학교가, 병원이 무너져도 인간의 존엄은 살아남는다는 확신.
믿음은 고통에 도덕적 맥락을 부여한다. 고통을 덜어주지 않는다. 슬픔을 걷어주지 않는다. 두려움을 없애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견딜 힘을 준다.
의미로서의 믿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믿음은 슬픔의 반대항이 아니다. 슬픔이 목적과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아마 가자 바깥의 많은 이들은 이것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코란은 두려움, 굶주림, 부의 손실, 사랑하는 이의 상실, 인간이 일군 모든 것의 파괴 같은 경험을 미리 이야기해 두었다. “하나님은 두려움과 기아로써 재산과 가족과 곡식들을 손실케 하여 너희들을 시험할 것이라 그러나 인내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있으리라.”[역주1]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 구절은 그저 문장이 아니라 삶이다. 이 구절은 어떤 의학적 진단으로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경험들에 언어를 준다. 집이 폐허가 되고 가족이 실종되고 기아가 일상이 될 때, 많은 이들은 자신이 신에게 버림 받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신 스스로가 말한 시험을 견디는 중이라고, 절망이 아니라 사브르sabr — 믿음에 뿌리를 둔 꺾이지 않는 인내심 — 로 임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들의 눈물은 진짜이고 그들의 슬픔은 너무도 크지만,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고 약속한 이가 그 모든 상실을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 또한 그렇다.
바로 그런 이유로 가자 사람들은, 상상도 안 가는 참화 속에서도, 이렇게 응답하곤 한다 — 알함둘릴라, 하스부날라후 니말 와킬, 혹은 인나 릴라히 와 인나 일라이히 라지운.[역주2] 이것은 아픔에 무심함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고통은 신과의 관계는 끊어어버리지도, 정의가 끝내 신에게 속한다는 확신을 무너뜨리지도 못한다는 선언이다.
가자를 겪어본 이라면 누구나 않다. 믿음은 울음을, 절망을, 무너짐을 멎게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이 무의미한 일이 되지 않게 해준다.
간과되는 차원
외부에서 보는 이들은 이 점을 간과하곤 한다. 그들은 온가족을 잃은 사람을 만나서는 신께 감사한다는 그들의 말에 충격을 받는다. 생존자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코란을 읊는 것을 보며 그것을 부인으로 해석한다. 무너진 집 옆에서 기도하는 이들을 보며 종교가 그저 마음을 추스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믿음이 현실로부터의 심리적 도피가 아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믿음은 현실이다. 믿음이 삶, 죽음, 정의, 책임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관점을 빚어낸다.
믿음은 어떤 치료법도 줄 수 없는 것을 준다 — 견딤을 도덕적으로 설명해 준다. 온 세상이 보지 않으려 해도 누군가 당신의 고통을 보고 있다고 말해준다. 지상에서는 정의가 불가능해 보일 때조차조 어딘가에 정의가 존재한다고 말해준다. 삶이 지옥 같아 보이는 가자에서 죽음은 구제라고 말해준다.
온 집안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는 이들이게 이런 믿음들은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이 아니다. 심리적 생존의 원천이다.
이것을 질문지로 측정하거나 정신건강지수로 계량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가자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일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팔레스타인의 정신건강 위험에 관한 국제적 논의의 대부분은 믿음을 각주로 취급한다. 전문가들은 의미는 무시한 채 증상만 분석한다. 믿음은 못 본 체하며 절망만 연구한다. 트라우마를 논하면서도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종종 수 세대를 이어진 박탈 속에서도 이어온 전통과 공동체, 믿음으로부터 힘을 길어올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손상된 이들로 그려지곤 한다.
세계는 가자를 바라보며 인간이 고통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묻는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묻는 것은 다르다 —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은 대개 심리학 교과서가 아니라 기도에서, 공동체서, 기억과 믿음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서구 심리학은 계속해서 가자를 오해할 것이다. 우리 힘의 원천을 보지 못한 채 우리 상처의 목록을 작성하기만을 계속할 것이다.
↥역주1 『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 사우디아라비아: 파하드 국왕 꾸란 출판청, 이슬람력1422, 42쪽.
↥역주2 신께 찬미를(Alhamdulillah), 우리에게는 신으로 충분하며 신께서 우리를 돌보신다(Hasbunallahu wa ni’mal wakeel) 우리는 신께 속하며 신께서는 우리가 돌아갈 곳이다(Inna lillahi wa inna ilayhi raji’un) 정도의 의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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