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Vijay Prashad, “The theater of punishment,” People’s Dispatch, 2026.05.28.

글로벌 수무드 선단 활동가들이 이스라엘 국가안보부 장관 이타마르 벤-그비르에게 당한 취급에 충격을 받은 것은 여전히 안보라는 달콤한 언어로 식민 폭력을 숨기고 있는 이들 뿐이다. 이제는 인류 앞에 증거가 산처럼 쌓여 있다 — 가자는 그저 봉쇄 당하는 곳이 아니라 기아와 폭격이 정치적 관리 수단으로 쓰이는, 계산된 절망의 땅이 되었다. 배를 탄 활동가들은 무장 전투원도 아니었고 침략군도 아니었다. 가자에 가해지는 봉쇄를 깨기 위해 모인 각국의 자원활동가, 인권 옹호가, 의사, 의원, 조직가들이었다. 그들의 여정은 정치적, 도덕적, 인도적이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국은 그들을 모욕과 구금, 보란 듯한 폭력으로 맞았다.
벤-그비르는 자신이 하는 일의 상징적 기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극우의 정치학은 그저 안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교육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폭력은 반드시 보여져야 하며 모욕은 반드시 공개적으로 퍼져야 한다. 지배는 반드시 스펙터클을 통해 스스로를 꾸준히 재생산해야 한다. 이스라엘 극우의 이데올로기 기계의 중심에는 팔레스타인인과 그 동맹들에 대한 공공연한 모멸이 있다. 체포는 복종을 가르치는 교훈이, 몽둥이질은 메시지가, 구금은 저항했다가는 — 심지어 그저 상징적인 저항이라 할지라도 — 압도적인 힘을 맛보게 되리라는 선언이 된다.
선단 활동가들이 들어선 곳은 이미 봉쇄와 대대적인 파괴로 달라진 곳이다. 오늘의 가자는 그저 점령당한 영토가 아니라 처벌의 실험실이다. 이스라엘은 수 년째 식료품, 의약품, 연료, 전기, 사람의 가자 지구 진입을 통제하고 있다. 봉쇄는 안보가 아니라 사회적 질식을 낳았다. 국제 기구들에서는 인도적으로 재앙 같은 상황을 누차 경고했다. 그럼에도 포위는 계속된다. 팔레스타인의 삶을 파편화하고 집단의 사기를 꺾으려는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이 수무드 선단을 통해 이 질서에 도전하려 하자 벤-그비르와 그 동맹들은 도덕적인 증인을 마주한 식민 권력이 으레 하는 대로 응수했다. 활동가들은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라 국가의 적으로 그려졌다. 그들을 구금해 조롱하고 겁박했다. 그저 선반을 멈춰세우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연대 행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 패턴은 지금의 위기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 식민 체제들은 군사적 우월성 뿐만 아니라 지배의 의식rituals을 통해 존속된다. 영 제국이 인도와 케냐에서 그랬고 프랑스 식민 당국이 알제리에서 이어받았으며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는 그것을 관료제적으로 세세하게 제도화했다. 모욕은 통치의 일환이 된다.
벤-그비르의 수사는 이 같은 정치 문화의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는 팔레스타인인을 권리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통제하고 제어해야 할 인구학적 위협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연대 자체가 범죄가 된다. 인도주의는 테러리즘으로 재구성된다. 국제법은 불편요소가 된다. 선단 활동가들이 위험했던 것은 그들이 무기를 들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증언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전 지구의 청중 앞에서 봉쇄의 구조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가자의 고통은 정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라는, 이스라엘이 세심하게 만든 서사를 약화시켰다. 벤-그비르가 두려워 하는 것은 무장 저항만이 아니다. 그가 두려워 하는 것은 정치적 상상력, 세계 각지의 평범한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안보 브리핑의 언어가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성의 언어를 통해서 보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렇기에 선단 활동가들에게 가해진 가혹행위는 일탈이 아니었다. 벤-그비르가 사는 이데올로기적 세계 — 지배란 반드시 무력, 모욕, 공포를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해야 하는 세계 — 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삭제의 정치학
선단 활동가들을 구금하고 폭행하기 한참 전에, 벤-그비르의 화는 현대 팔레스타인 정치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마르완 바르구티Marwan Barghouti(1959년생)를 향했다.[역주1]
마르완 바르구티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삶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정치적 모순에서 자유로워서가 아니라, 수많은 힘 있는 행위자들이 삭제하고 싶어하는 민족 투쟁의 지속성을 체현하기 때문이다.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는 분열된 정치적 경향들을 통일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진다. 제1차 인티파다 당시 파타Fatah의 주요 인사였던 바르구티는 풀뿌리 정치적 결집, 민족 해방에의 요구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정치적 전략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그의 상징적 중요성은 널리 인정한다. 이스라엘은 이 같은 상징성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2002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바르구티의 수감은 그저 사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깊이 정치적인 문제다.
바르구티에 대한 벤-그비르의 적의는 이스라엘의 전략 — 팔레스타인 정치적 지도력의 페계적 파괴 — 을 보여준다. 식민 체제는 지도부를 죄인으로 만들려 하곤 한다. 조직화된 정치적 의식은 산발적인 소요보다 더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지도부 없는 민중은 파편화될 수 있다. 정치적 기억이 없는 민중은 관리할 수 있다.
바르구티의 수감은 이스라엘 극우가 보복의 정치를 상연할 수 있는 무대가 되었다. 벤-그비르는 팔레스타인 구금자들이 감옥에서 겪는 가혹한 처우를 몇 번이나 옹호했다.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기에, 수감자 권리 탄압, 가족 면회 제한, 그저 감금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멸감을 주기 위해 고안된 처벌 조치들이 심해지곤 했다. 팔레스타인 수감자들과 인권 단체들은 고립, 과밀 수용, 신체적 학대, 심리적 압박 등이 두드러지는 실태를 보고한다. 불시 수색은 지배의 스펙터클이 되었다. 책을 압수 당했다. 집단 처벌이 심해졌다. 이런 체제에서 감옥이란 그저 구금 장소가 아니다. 식민 관리의 수단이다.
바르구티의 사례는 벤-그비르 세계관에 핵심적인 무언가를 드러낸다. 그는 그저 팔레스타인의 무장 집단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존재 자체에 반대한다. 바르쿠티 같은 이들이 그다지도 위협적인 것은 바로 그래서다. 바르구티는 민족 해방의 언어로 말한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곳곳에 익숙한 반식민 전통을 일깨운다. 그의 정치적 상징성은 팔레스타인을 점령과 인종적 지배에 맞선 투쟁의 역사와 연결 짓는다. 벤-그비르에게 그런 인물들은 반대시 심리적으로 무너뜨러야 하는 대상이다. 그들의 존엄은 공개적으로 산산조각내야 한다. 그들의 이미지를 정치적 지도자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형자로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수감 당한 지도자들이 감금을 통해 더욱 강력한 상징이 된 사례가 여럿 있다. 넬슨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 지하에서 스물일곱 해를 감옥에서 보냈다.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두려운 이들을 수감한다. 그렇기에 바르구티의 인고는 큰 상징성을 띠게 되었다. 그의 수감은 그저 그 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점령 하에 있는 — 구속과 파편화, 정치적 주체성을 삭제하려는 시도 하에 있는 — 팔레스타인의 상황 전반을 표상한다.
2025년에 벤-그비르는 한 감옥에서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진 바르구티를 비웃으며 “너는 못 이겨. 이스라엘국에 엉겨 붙는 놈은 누구든 … 우리가 쓸어버릴 거야” 하고 말하는 13초짜리 영상을 게시했다. 위엄 있는 바르구티는 굽히지 않고 몇 번인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 영상은 팔레스타인 정치를 되살릴 것을 호소한 — 오늘에도 여전히 읽히는 — 2006년 수감자 성명Prisoner’s Document의 초안 작성을 도운 이 남자를 꺾으려 애쓰는 벤-그비르의 절박함을 드러냈다. 감옥은 저항의 학교가 될 수 있다. 기억을 삭제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기억을 강화할 수 있다. 긴 세월 수감되어 있지만 바르구티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정체성은 숱한 파편화 시도에도 살아 남았음을 상기하게 하는 존재다.
이스라엘 파시스트 정치학의 오랜 역사
벤-그비르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가 일탈적인 존재라는 속 편한 허언을 넘서어야 한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갑자기 끼어든 인물이 아니라 그 논리적 귀결이다. 벤-그비르는 난데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정착자 식민주의, 군사화, 종족민족주의ethno-nationalist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이스라엘 곳곳에서 수십 년간 벌어진 과격화가 낳은 산물이다.
젊은 시절 벤-그비르는 랍비 메이어 카하네가 주창한, [인종주의적 이념 및 아랍인 학살 사건 옹호 등을 이유로 1994년에 반테러 법률에 따라] 금지된 카흐Kach 운동에 몸담았다. 카하네주의Kahanism는 유대인 우월성과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팔레스타인인 축출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이스라엘국조차도 카흐가 너무 극단적이라 여겨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지정하고 금지했다. 하지만 한때 비주류로 여겨졌던 그 사상들은 꾸준히 정치적 주류로 옮아갔다. 벤-그비르는 도발을 통해 정치적 이력을 쌓았다. 분노를 돋우는 수사, 공개적인 선동, 팔레스타인인 거주 지역 방문을 통한 갈등 유발로 이름을 알렸다. 수년에 걸쳐, 타협을 유약한 일로 여기는 전투적인 거리 활동가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1995년에는 벤-그비르가 총리 이츠하크 라빈의 자동차 엠블럼을 들고 이스라엘 방송에 출연한 악명 높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우리는 그의 차를 해치웠다”며 “그도 해치울 것”이라고 선포했다. 몇 주 후 라빈은 오슬로 협정에 반대하는 어느 극우 이스라엘 극단주의자에게 암살 당했다.
이 역사는 어떤 정치적 분위기에서 벤-그비르가 나탔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그리고 종종 평화를 옹호하는 이들 자체에 대한 혐오가 정상이 되어버린 문화 말이다. 시간이 가면서 이스라엘 정치인들도 꾸준히 오른쪽으로 옮겨 갔다. 정착촌 확장이 가속되었다. 군사 점령이 강화되었다. 평화 과정은 현장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의례적인 외교로 전락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벤-그비르 같은 인물들이 정당성을 획득했다. 그의 부상은 또한 심층적인 구조적 현실들을 보여준다. 식민 체제들은 극단적인 정치체들을 배태하곤 한다. 지배에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폭력이 도덕적인 일이, 불평등이 합리적인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벤-그비르는 바로 그런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제공한다. 그는 구조적 폭력을 민족주의적 덕목으로 탈바꿈시킨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피식민 인구가 아니라 실존적 적으로 묘사된다. 인권 단체들은 배반자로 그려진다. 국제 사회의 비판은 음모의 증거가 된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비슷한 정치적 패턴은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다. 인도 나렌드라 모디의 힌두트바 민족주의에서부터 유럽과 남북아메리카 곳곳에서 보이는 권위주의적 종족민족주의까지, 작금의 극우 운동은 영구적인 공포의 정치학에 의존한다. 소수자는 희생양이, 이의는 반역이 된다.
벤-그비르가 특히 위험한 것은 그의 수사 때문이 아니라 그가 국가 권력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안보부 장관인 그는 치안, 감옥 운영, 국내에서의 탄압에 영향력이 있다. 지난 수십 년의 극단주 거리 정치학이 이제 통치 기계 속으로 들어왔다.
이 같은 변화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수반한다. 선단 활동기나 마르완 바르구티 같은 수감자에 대한 처우는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다. 잔인성 자체가 정책이 된 정치적 궤도 전체의 징후다. 하지만 역사는 또한, 영구적 지배를 토대로 한 체제들은 결국 정당성 위기를 맞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식민 체제들은 갑자기 무너지기 전까진 무적 같아 보이곤 했다. 프랑스령 알제리는 영원할 것 같았다. 남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는 단단히 자리잡은 듯했다.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들은 변치않을 것 같아 보였다. 억압에는 모순이 내재하고 폭력은 저항을 낳으며 모욕은 연대를 끌어낸다.
가자를 둘러싼 전 지구적 분노,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의 여전한 상징적 힘, 굳건한 국제 연대 운동, 이 모든 것은 팔레스타인 투쟁이 지금도 확고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벤-그비르는 공포를 통해 지배를 유지하려는 정치적 기획의 끝단이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는 실례다. 하지만 공포만으로는 정의도 정당성도 평화도 이룰 수 없다. 이것은 지금 순간의 궁극적인 비극이기도 하다. 무력의 언어로밖에는 공존을 상상하지 못하는 정치적 계급이 있다는 것 말이다. 선단 활동가들은 이를 알았다. 마르완 바르구티도 그렇다. 전 세계 수백만 명도 마찬가지다. 이제 문제는 국제 체제가 계속해서 그런 잔혹성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전 지구적 여론이 마침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저 동등한 두 쪽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자유, 존엄, 인간성 자체의 의미에 대한 투쟁임을 인식할 것인가이다.
주
↥역주1 마르완 바르구티에 대해서는 또한 다음 글들을 참고. 「생지옥: 억압 수단으로서의 이스라엘 감옥 체제」(비제이 프라샤드, 2026). 「하다림 감옥 대학 ― 감옥과 대학에 저항하기」(카삼 알-하즈,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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