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의 모든 것을 사랑해요 (인터뷰, 2024)

원문: Afeef Nessouli, “What Haven’t I Loved about Gaza,” Queer Palestine, Pinko, 2024.

이 인터뷰는 본지 최신호 《퀴어 팔레스타인》에 실렸다. 인쇄본디지털본을 구매할 수 있다.

가자를 절멸시키려는 이스라엘점령군의 공격이 두 달째 이어지고 있던 2023년 12월, 우리는 짧은 진zine으로 묶을 퀴어 팔레스타인인들에 관한 자료와 그들의 글, 사진 등을 모으기 시작했다. 구호 기금을 마련하는 한편 모순적이라 여겨지는 이들이 학살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작가, 사진가, 시인, 언론인, 미술인들이 연락해 왔다. 그 중 한 명인 뉴욕에서 활동하는 기자 아피프 네술리Afeef Nessouli는 지난 한 해 동안 가자 주민 여러 명과 정기적으로 연락하며 필요한 물품이나 탈출을 조율해 왔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특히 퀴어 두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네술리는 가자에 사는 그 두 명의 퀴어 팔레스타인인과 이메일로 나눈 대화를 보내주었다. 본인들의 동의를 얻어 이번 호에 실었다. 인종학살 중의 삶에 대한 이 증언들은 또한 가자 사회에서 퀴어함이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를 알려준다. 아래는 편집하지 않은 메일 전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안전을 위해 익명으로 처리했다. 이 프로젝트의 수익금 전액은 인종학살에서 살아남으려 고초를 겪고 있는 이 두 사람과 그 가족들에게 전달된다.

QFG와의 인터뷰. 인터뷰 당시 그는 맹폭격이 쏟아지는 라파(가자지구 남쪽)에서 천막 생활을 했고 현재는 카이로로 피신했다.

아피프: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어요?

QFG: 저는 스물세 살이고 양성애자로 정체화해요. 라파에 살고, 최근에는 보통 천막이나 병원에서 자요. 공습으로 양가족을 잃었지만 생물학적 가족은 살아있단 걸 알게 됐어요. 아주 가끔씩은 만나긴 하지만, 늘 혼자예요. 이 인종학살 속에서 보내는 매일이 끝나지 않는 고문, 생지옥이에요. 대부분 기도하고, 먹을 걸 찾고, 몇 킬로미터씩 걷고, 물이나 요리에 쓸 땔감을 구하며 하루를 보내요. 요리라고는 해도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이나 동물용 사료 같은 것들이에요, 기력이 다한 제 콩팥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요. 그저 자유롭게 퀴어한 삶을 살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의 퀴어한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남자도 좋아한다는 걸 언제 처음 알게 됐는지 기억나시나요?

언젠가 밤늦게 해변에 있을 때였어요. 전쟁 전에는 차도 있고 좋은 오토바이도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제일 친한 친구랑 제 차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죠. 담배를 물고요 하하하. 과자도 엄청 먹었고요. 아, 그냥 평범한 담배였어요 (끊은 지 한참 됐어요). 아무튼, 하루종일 같이 있다가 밤늦게 바다에 갔어요. 서로와 함께 지내는 게 얼마나 좋은 깊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죠. 전 늘 제가 걔를 좋아한다고, 남자들에게 감정을 느낀다고 이야기하기 겁이 났어요. 걔는 늘 저한테 플러팅을 했고요. 늘 농담이라고만 생각했지 걔도 저랑 똑같은 줄은 전혀 몰랐어요. 남자를 좋아할 줄은요.

전에는 남자친구 하나, 여자친구 하나가 있었어요. 따로 알게 된 사이지만 사랑이 우리 셋을 하나로 묶어줬죠. 남자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제일 친한 친구이자 양가족이에요 (형제죠, 제 가족이 저를 쫓아낸 후에 이 가족이 저를 받아줬어요). 여자친구는 대학에서 만나 사랑하게 됐어요. 우리 셋은 정말 특별했고 서로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어요. 둘 다 죽었어요. 가자에서 제일 유명한 피잣집 중 하나인 타본 식당에 자주 갔었는데, 그곳은 이제 그냥 모래더미가 됐어요. 추억까지도 다 무너졌어요.

지금은 어떤 게 힘드신가요?

이 지옥에서 제일 어려운 건 생존이에요. 기근으로부터든 폭격으로부터든 — 신께서 세상이 제게 주지 않은 사랑을 주실 곳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자살하고 싶게 만드는 — 정신적 트라우마로부터든이요.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끝도 없이 있어요. 저는 당신은 영화에서조차도 볼 일이 없을 삶을 살았어요. 언젠가 여기를 벗어나 평화를 찾으면 다 말해 주고 싶어요. 지금은 이 정도만 말해 둘게요.

제가 겪은 정신적 트라우마는 이 세상의 어느 생명체보다도 더 커요. 매 순간 자살을 생각해요. 가자 밖으로 나갈 희망만으로 버티는 거예요.

사람들이 어떤 걸 알았으면 좋겠나요?

세상에 사랑으로 저를 보듬어 달라고, 제 꿈이 이루어지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새 삶, 새 집, 끼니와 사랑과 평화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요. 저는 이곳에서 피신하고 싶고, 제 음악과 영화로 유명해지고 싶어요.

가자 북부에 사는 E.S와의 인터뷰

아피프: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어요?

E.S.: 제 이름은 E.S.예요. 스물일곱 살이고 HIV 양성, 장애인, 작가, 온라인 영어 교사예요. 가자시 서쪽(가자지구 북쪽)에 살아요. 어머니, 스물네 살 남동생, 반려묘 둘이랑요. 인종학살이 계속되고 있는 탓에 요샌 별 거 안 하고 지내요. 거의 매일 똑같이 보내죠. 목숨을 부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을 구하러 다니고 이 끝도 없어 보이는 인종학살이 주는 심리적 고통을 진정시키는 것 사이에서 저글링을 하느라 매일이 힘들어요. 지금 상황에서 쉬운 구석이라고는 없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제일 어려운 건 이 세상에 가자를 총체적인 절멸에서 구해주거나 이 피바람을 끝내줄 인간성이나 사랑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는 자각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걸 거예요. 개인적인 차원에서 제일 어려운 건 살아남는 거, 나중엔 나와 가족, 내 사람들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일 테고요.

퀴어로 정체화한다고 하셨어요. 가자에서 퀴어로 사는 것에 관해 해 주실 이야기가 있나요?

가자에서 퀴어나 동성애자를 만나본 적은 없는데, 어머니랑 같이 시장에 걸어갔던 때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저는 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하지 않고, 말투나 걸음걸이, 차림새를 갖고 누군가의 섹슈얼리티를 단정하는 건 — 제 생각에 — 부적절한 일이에요. 아무튼, 엄마랑 같이 종말한 세계의 시장쯤 되는 데를 걷다가 쫙 빼입고 손가방을 든 남자를 봤어요. 전 슥 보고서 엄마한테 “이 남자 게이야, 확실해” 하고 말했죠. 엄마는 그냥 한숨을 푹 쉬었어요. 제가 당신 생각에 “정상적인/자연스러운/평범한” 걸 벗어나는 이야길 하면 싫어하시거든요. 제가 반항적일 정도로 엄마한테 다 터놓고 지내긴 하지만 엄마의 무의식 속에 타락한 제 모습이 있단 건 알아요. 심지어는 의식에도요. 저랑 제 “이성애자이고 남자다운” 남동생을 다르게 대하는 걸 보면 티가 나죠.

네, 저는 퀴어로 정체화해요. 퀴어라는 말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야 알게 됐어요. 그 전에는 저를 설명할 말이 동성애자/게이 뿐이었죠. 정확히 그 말도 아니고, 그 말에 대응하는 아랍어의 비하적인 표현(루티Luti)이요. 저는 어릴 때 제 섹슈얼리티를 알게 됐고, 다섯 살 때부터 다른 남자아이들이랑 탐색 행동을 했어요. 가자에서 퀴어한 삶을 산다는 건 종교적, 가부장적, 동성애혐오적, 이성애규범적, 도덕들, 이상들, 이념들이 가하는 낙인 때문에 완전히 불가능해 보이기도 해요. 자기표현, 옹호, 심지어는 퀴어함을 포용하는 것까지, 어떤 형태든 저항이나 반항을 하다가는 안전은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어요. 가자 같은 곳에서 퀴어함을 둘러싼 낙인과 LGBTQ+ 의제에 대한 교육 부족은 심각한 결과로 이어져요. 제 경우가 그랬죠. 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 본 적이 없고, 어떻게 조심하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지도 배우지 못했어요. 그 때문에 처음으로 터키 이스탄불로 피신했을 때 HIV에 감염됐죠. 열여덟 살, 학생 때였어요. 점령은 그런 식으로 작동해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존엄이나 권리 같은 필수적인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하게요.

사람들이 어떤 걸 알았으면 좋겠나요?

이집트로 가면 현지인이 아니라도 HIV 약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제가 확인해야 하는 건 그게 제일 커요. 제가 평화, 사랑, 애정, 존엄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고 싶어요. 세상의 행태에 그런 게 없긴 하지만요. 팔레스타인인, 퀴어, HIV 양성이라는 저의 자긍심을 긍정하는 곳에서 살고 싶어요. 끔찍한 점령이나 합병증, 혹은 제 정체성을 받아들인 데 대한 박해를 끊임 없이 두려워하며 굴복하는 일 없이 살고 싶어요. 아무 조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저에 대한 수용과 사랑이 고파요. 생계를 꾸리고 안정적인, 평화로운, 성취감 있는 삶을 이루는 데에 꼭 필요한 것들을 가질 수 있는 곳을 꿈꿔요.

가자의 어떤 점을 사랑하나요?

가자의 무엇을 사랑하지 않는지를 물어야 해요. 무슨 말이냐면, 저는 가자의 모든 것을 사랑해요. 유감스럽게도 늘 그랬다고는 말 못하지만요. 어렸을 땐 가자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어요. 제가 가자를 싫어한 건 가자가 피점령지라는, 봉쇄 상태라는 거랑은 전혀 상관 없었어요. 나랑 같은 성별인 사람을 좋아하는 제 정체성이 결코 진정한 자신을 드러낼 자유를 가질 수 없을 거란 걸 알아서였죠. 나중에는 달라졌어요. 저에게는 가자 바깥에 갈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드러내고 실현할 수 있는 곳에서 살 수 있는 특권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결코 저를 떠나지 않았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해방이 밖으로 표출될 수 있으려면 안에서 결연히 해방을 쟁취하고 연마해야 한다는 걸 다 커서 가자에 돌아오고서야 온전히 알게 됐어요. 저는 가자를 사랑해요. 동성애혐오와 이스라엘의 봉쇄라는 족쇄로부터의 자유는, 비록 손에 잡히지는 않더라도, 마음 먹기에 달린 걸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곳이니까요.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이건 부정할 수 없어요. 10월 7일 전에 두 해 꼬박을 정말 힘들게 보낸 끝에야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슬프게도 10월 7일 이후로는 가자에서 어떤 종류의 자유든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이 질문에 더 구체적으로 답해 보려, 가자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과 사랑에 빠졌어요. 특히 사소한 것들이요. 하지만 완전히 솔직하게 말하자면, 바다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겠어요. 석양을 보는 거나 밤에 차로 해안 도로를 달리는 거, 수평선을 보는 걸 정말 좋아해요.


6월 24일에 ES가 소식을 전해 왔다.

저는 여전히 항구가 가까운 가자시 서쪽에서 지내고 있어요. 많은 일이 있었어요. 가자지구 북부는 다시 굶주리고 있어요. 45일 넘게 국경이 닫혀 있어서 인도적 구호품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요. 열린다고 한들 북쪽까지 들어오는 건 거의 없어요. 마지막으로 신선한 농산물/육류/유제품을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요. 그나마 남아 있는 통조림이나 가공 식품은 가격이 훨씬 비싸졌어요. 사람들은 현금이 떨어졌고 아직 영업하는 은행들마저도 그래도 더더욱 힘들어요. 결국은 죽음만이 구원인 영원한 악순환에 빠진 기분이에요. 군사적으로는, 북가자는 여전히 폭격 중이에요. 최근에는 IOF에서 쿼드콥터를 써서 표적 공격을 하는데 대상은 대부분 민간인이에요. 한 번은 시장에 갔는데 발포가 벌어져서 최소 세 명이 살해 됐어요. 정말이지 무서워요.

HIV 항바이러스제는 두 달 치를 갖고 있어요. 약을 구할 곳을 열심히 알아보고 있어요.

우리가 지난 아홉 달 내내 인종학살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버리기는 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살 자격이 있다는 걸 세상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세상이 강고하게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기를 멈추지 않기를, 무엇보다도 이 끔찍한 인종학살에 종지부를 찍기를 바라요.

약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인종학살이 시작된 후로 제가 구할 수 있었던 약은 전부 북가자의 감염병 부서 약품 보관고에 남겨진 것들이었어요. 운이 좋아서 꽤 꾸준히 약을 먹을 수 있었던 거죠. 같은 약을 처방 받은 사람이 남쪽으로 피신한 덕분에요. 가자에 HIV 감염인이 서른 명이 채 안 될 거라, 우리에게 약을 주는 게 급선무일지 모르겠어요. 약을 준다고 한들 북쪽에 있는 저에게까지 가져다 줄 수 있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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