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학살의 시대에 다른 엄마들에게서 배우는 것 (란다 자라르, 2025; 일부)

원문: Randa Jarrar, “Learning from Other Mothers at a Time of Genocide, ” in Eliasa Jahshan edited, This Queer Arab Family: An Anthology by LGBTQ+ Arab Writers, Saqi, 2025.
아래는 이 글의 도입부로, 저자가 출간 기념 행사 홍보를 위해 촬영한 한 영상에서 낭독한 대목이다.

당신에게는 성인이 된 팔레스타인인 아들이 있다. 당신은 그를 몇 년 동안 홀로 키웠고, 그가 대학을 졸업하려는 무렵에 인종학살이 시작된다.

당신은 시온주의 집단에, 그리고 그들이 교사, 시인, 미화원, 요리사, 축구선수, 음악가, 극작가, 간호사, 의사, 배우, 학생, 교수, 작가, 영아, 유아, 아동, 청소년, 노년 여성, 노년 남성, 연령 불문 장애인을 당당히 도륙하는 데에 화가 치민다. 당신은 잠을 자지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줄곧 죄 없는 가자 사람들 위로 쏟아지는 전쟁 범죄들을 보고 또 본다.

다른 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인 작가-어머니들과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가 이 먼 곳에서 매일의 공포를 보는 것이 도살장 옆방에 묶여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 살해 당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증언을 하거나 나중을 위해 기록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막을 힘은 없다. 이것이 당신을 화나게 한다. 막을 방법을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커뮤니티 공간에서 다른 퀴어 동지들을 만난다. 휴대전화는 모두 전파 차단 주머니에 넣어 문간에 둔다. 익명으로 남기 위해, 그리고 팬데믹이 도무지 끝나지 않으므로, 모두 마스크를 썼다. 시상식장, 대사관, 거리, 고속도로 점거를 모의한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모니터에서 아이들이 도륙 당하는 꼴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이들을 만난다. 사람들이 아동이 폭격 당해도 되느니 안 되느니 하며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 이 아이들을 들먹이는 데에도 신물이 난다. 이 아이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라나Rana, 라나Lana, 아야Aya, 와틴Wateen, 타레크Tareq, 살마Salma, 무함마드Muhammad, 바난Banan, 오마르Omar, 라얀Layan, 자나트Jannat, 미스크Misk, 비산Bisan, 아이만Ayman, 나야Naya, 주완Juwan. 이 아이들은 인간이다. 유니세프에서는 이 인종학살을 ‘아동들의 무덤’이라 부른다.

이 아이들의 어머니들 역시 이름이 있다. 당신은 이 아이들, 그 어머니들이 수사적 도구가 되어 버리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당신은 함께 행진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목 놓아 부른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꿈과 소망과 목소리가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밖으로 나가는 게 허락되지 않는 수용소에서 표적이 되었다.

퀴어 동지들과 함께 당신은 고속도로를 막는다. 서로에게 물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당부한다. 국가에 잡히면 안 된다. 감시를 피해 서로와 함께 물 흐르듯 움직여야 한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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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팎 아바타
    안팎

    뒤로는 탈출한 이들의 정착이나 남은 가족 구성원의 탈출을 돕기 위해 미국에서 퀴어, 장애인 동지들과 함께 모은 물품과 돈을 가지고 이집트에 다녀온 이야기, 퀴어 팔레스타인계 이민자로서 그들을 만나 나눈 대화 등이 서술된다.

    중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여러 가족의 이집트행 탈출을 돕고 있는 활동가들은 퀴어다. 수많은 퀴어들이 가자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돕고 있다는 걸 생각하며 당신은 자긍심을 느낀다. 퀴어 공동체는 조직화와 집단적 돌봄에 능하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몸이란 하나의 경계이며 퀴어들은 이 경계지대의 존재를 안다는 것을 안다. 당신은 매일 같이 수용과 거절 사이의 공간들을 헤쳐나아가며 당신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닌 체제의 균열들 속에 공동체를 건설한다. 그리고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이들이 서로를 위해 속할 데를 만들어주는 데에는 강렬한 무언가가 있다. 당신은 돌봄을 혁명으로서 실천한다. 당신의 존재가 틀렸다는 말을 듣다 보면, 그저 공간을 만드는 것도 급진적인 일이 된다. 취약성을 나누면서, 생존을 넘어 변혁으로 — 가두어 두기 위해 고안된 경계들을 모조리 가로지르는 종류의 깊은 사랑으로 —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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