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As An HIV Survivor, COVID-19 Stigma Is Sadly Familiar”(John-Manuel Andriote, Next Avenue, 20.05.20.)
(원문 편집자 주: 이 글은 존A.하트폴드재단이 후원한 “여전히 여기 있다, 여전히 양성으로(Still Here, Still Positive): HIV/AIDS와 함께 늙어가는 미국인 1세대에 대한 연재”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엘리자베스 마르투치는 열한 살 난 아들과 자신의 코로나19 완치라는 신나는 소식을 알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뉴저지에 사는 그녀는 심지어 “코로나19 생존자”라고 적힌 티셔츠도 만들었다.
마르투치는 생존자로서 자신이 그런 반응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때로 거슬릴 만큼 오래도록 그러리라는 것도. 《뉴욕타임즈》가 마르투치의 이야기를 보도하며 말했다시피 “다 나은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어떤 이웃들은 그들을 보면 도망을 간다.”
기사에 따르면 “연방 보건전문가들과 전염병학자들은 COVID-19에서 완전히 회복된 환자는 타인을 감염시킬 위험성이 없다는 데에 뜻을 모은다. 그럼에도 이 병을 겪은(survived) 이들 일부는 여전히 바깥세상에서 오는 공포에서 비롯된 낙인을 마주하고 있다”고 한다.
익숙한 낙인
온라인으로 “코로나19 낙인(COVID-19 stigma)”을 검색하면, 이 병에 걸려 있거나 다 나은 이들이 직면하는, 공포에서 비롯된 회피나 노골적인 박해에 관한 세계 곳곳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뉴욕타임즈》 기사에는 완치된 여성의 개의 치료를 거부한 수의사나 “지역 신문에 감염 사실이 보도된 적이 있는 선출직 인사를 보고 놀라 나자빠진” 세탁소 직원의 일화가 나온다.
《재팬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지주들이 세입자를 내쫓고 간호사들은 남편에게 버림받으며 코로나19 환자와 접촉했을 가능성만으로도 사람들이 쫓겨나는” 사례도 있다.
이런 류의 극단적인 낙인은 1980년대 HIV/AIDS 유행의 초기를 거친 이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하다. 이 바이러스를 가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집에서 쫓겨났고 가족들은 그들을 피했으며 제대로 된 장례 절차를 거부당했고 도덕적으로 타락해 “그런 일을 자초했다”는 취급을 받았다.
『스톤월 스트롱(Stonewall Strong)』을 쓰면서 지난 삶을 반추해보며 HIV와 그것이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한참 생각했다. 나는 그것을 도덕과 관련된 문제로 여긴 적이 없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위험 물질이 떠다닌다는 이상의 “의미”는 없는 그저 바이러스일 뿐이었다.
2005년에 나 스스로가 양성 진단을 받고서야 HIV 감염인으로 사는 것(living with HIV)이 내게 성격 결함이나 도덕적 패착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의 핵심을 이해했다. 그것은 내가 성적 행동들에 있어 늘 건강한 선택을 하지는 않음을 의미한다. 때로 삶의 트라우마가 내게 영향을 미치고 현명한 판단을 방해함을 의미한다. 내가 인간임을 의미한다.
HIV 감염인으로서 나는 내 건강을 돌보는 데에 책임감을 갖고 있다. 처방대로 약을 복용해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것 말이다. 이는 나 자신의 건강이 더 나아짐을, 그리고 내가 다른 누구도 감염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인식을 바꾸거나 그들에게 사실에 기반한 정보를 교육하는 것은, 그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낙인을 가하는 태도를 맞닥뜨리며 살아 왔다. 데이트라는 영역에서 특히 그랬다. HIV 유행으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났는데도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의 게이 남성 플로필에는 “깨끗한(clean)”이나 “DDF”(마약을 하지 않으며 병이 없는(drug- and disease-free))와 같이―바이러스 “검출불가(undetectable)”라 위험성이 전혀 없는 이들을 포함해―HIV 감염인은 누구라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신호를 주는 용어들로 가득하다.
생존을 축하하기
심지어는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게이 남성 커뮤니티에도 이러한 우리-대-그들 식의 태도가 있음을 생각하면, HIV/AIDS 유행 종식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가 낙인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질병통제예방센터는 “낙인, 동성애혐오, 차별은 게이·바이섹슈얼 남성의 건강과 안녕에 영향을 미치며 이들이 HIV 검사, 치료, 여타 예방 서비스를 비롯한 질 좋은 보건 서비스를 찾아가고 받는 일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들이 게이·바이섹슈얼 남성이 더 높은 HIV 위험에 노출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생존자들이 축하받기는커녕 사람들이 자신을 피할까봐 걱정해야 한다면 애초에 다른 이들이 검사를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이렇게나 비합리적으로 겁에 질려 안전 지침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믿지조차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다만 우리 스스로가 HIV나 코로나19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지를 택할 수 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HIV 감염인임을―혹은 이었음을―밝힌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나를 피하거나 도망간다 해도 “거절당했다”고 낙담하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이 이성적인 사유가 아니라 공포에 끌려다님을 불쌍해 할 것이다.
지금 매일 챙겨 먹는 바이러스를 억제 약물이 나오기 전의 몇 해 동안 HIV가 너무도 많은 친구들의 심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을 본 나로서는 살아 있고 건강함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마르투치 모자와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생존을 축하한다. 수많은 이들이 살아남지 못했음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취약함과 죽을 수 있음을 마주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너무 오래 신경을 쓰기는 힘들게 된다. 그들이 문자 그대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당신은 스스로가 회복력이 있음을 안다는 데에서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삶이 던지는 다른 모든 난관들을 대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