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역, 지하철 예술무대에서는 시민 노래자랑이 열리고 있다. 사회자는 참가자 하나하나에게 사는 곳과 직업을 묻는다. 어디에서 오셨나요? 을지로에서 왔어요. 아니, 을지로면 여기잖아요? 네. 그럼 노숙을 하신다는 거에요? 아니요. 을지로 어디서 오셨어요? 을지로 4가에 살아요. 그렇죠,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께서 노숙을 하면 큰일 나겠죠, 자 그럼, 노래 들어보겠습니다.
질문하는 사회자도, 답하는 참가자도, 그리고 구경하는 관객들도 함께 웃는다. 하지만 그것은 물론, 모두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일 뿐이다. 행색이 멀쩡한 여성에게 노숙하냐는 질문을 하는 장면도, 그 여성이 당황해 하며 아니라고 답하는 장면도 모두에게 재밌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 누군가는 그 장면을 보고 절대로 웃을 수 없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계단식 스탠드 덕분에 약간이나마 높은 곳, 그러니까 침대에서 잘 수 있고 약간이나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그 무대가 누군가에게는 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역시 많지 않다. 하지만 무대를 지켜 보는 관객들 중에는 분명히 끼어 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잠을 청하기 위해 노래자랑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분명히 끼어 있다.
농담은 늘 쉽다. 누군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도, 그 이야기를 웃으며 듣는 것도 늘 쉬운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늘 쉬운 그 일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웃지 못하는 사람, 끓어 오르는 화를, 혹은 차고 넘치는 민망함을 참으며 억지 웃음을 지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사회자의 농담과 관객의 웃음, 그 사이에서 한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후 무대가 끝나면 이불로 쓸 신문지를 지금은 방석 삼아 깔고 앉아 노래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검게 탄 몸, 낡고 후줄근한 옷, 주머니에 꽂아 넣은 우산, 그가 을지로 입구역의 주민임을 알 수 있는 표지는 많지만 그것을 살펴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순식간에 굳어 버린 그의 표정을 감지하는 사람 역시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