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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 재생산, 기독교 ―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기독교의 인간상에 대해 잠깐 고민했다. 먼저 떠올린 것은 창세기 1장 27절의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였다.1 그 다음으로 떠올린 것이 기도문에 흔히 등장하는 “우리가 주님을 닮게 하시고”라는 말. 나는 물론 기독교의 인격신에 대해 이렇다 할 믿음이나 기대를 갖고 있지 않지만, 저 말이 이 종교에 ― 정확히는 이 종교를 믿는 이들과 내가 한 세상을 사는 데에 ― 어떤 가능성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 신의 속성으로 이야기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며, 전지전능하고, 물리적 한계 없이 편재하며,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들. (저 종교 안에서조차 저 모든 속성을 인간이 지니려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합의는 있는 듯하므로) 그런 신의 어떤 측면을 인간이 닮을 수 있을까, 저 신의 어떤 측면을 닮고자 할 때 이 종교가 인간의 것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선택지가 많지는 않아. 신이 읊는 절대진리를 들을 수는 있을지언정 스스로 알 수는 없어 보이므로, 온갖 자연법칙들에 묶여 있음을 이미 잘 알고 있으므로, 남는 것은 사랑 정도일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말을 알고 있으면서 사랑만을 언급하는 것은 저 신은 자기 바깥의 어떤 신을 믿지 않으므로, 또한 저 신은 자신이 실천할 수 없는 무언가를 소망하지 않으므로, 사랑밖에는 남지 않는 탓이다. 그러니까 실은, 사랑보다는 “유일한 존재”라는 속성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존재, 세상에 단 하나인 존재로서의 그 신을 생각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갖는 존재로서의 신이므로 그런 신이 둘이 된다면 그 둘은 같은 존재요 하나인 존재가 되겠지만 다행히 우리는 인간이므로,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서로 다른 몸까지를 갖고 있으므로, 신이 되지 않고서도 닮을 수 있는 신의 형상이라면 그것은 우리 각자가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이리라 생각했다.
이 땅에 신의 왕국을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의 뜻을 좇지 않는 존재들을 ― 비유적으로건 실질적으로건 ― 죽여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이 ‘유일함’을, 서로간의 ‘다름’을 지키는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르며 그 중 누구 하나도 다른 누구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전제 위에서, 그러니까 그 평등한 다름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그 어떤 일도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오직 그 위에서만 가능해 보인다.
내게 시급하거나 필요한 고민이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멈추었는데, 어제 길에서 만난 사람 덕에 다시 생각을 시작했다. 작은 책자와 “성경”을 내밀며 내게 말을 청한 그는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 것 같으냐고 물었다. 글쎄요, 하고 말았더니 그가 이은 말은 ‘서로 닮았기에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관심사는 신과 인간의 교제였겠지만, 그 스스로도 예로 삼았듯 인간과 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닮았기에 인간과 인간이 교제할 수 있다. 저 신을 믿는 세계관 아래에서, 그 신과 인간의 닮음을 믿는 세계관 아래에서, 인간의 능력이란 다름아닌 ― 그러니까, 일방적인 지배나 정복이 아닌 ― 이 “교제”의 능력일 것이다. 서로 닮았기에 가능한, 그러나 또한 동시에 서로 다르기에 가능한 교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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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닮음을 저버리는 것, 그 교제를 포기하는 것을 “죄”라고 불렀다. 여전히 그의 관심은 인간과 신의 교제에 있었으므로, 이 죄라는 것은 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었지만 ― 그는 예레미야서 2장 13절의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라는 말을 근거로 들었다 ― 말이다. 자신을 따르라 명하고 그러지 않으면 응징하는 신이라면 내게는 역시 쓸모가 없지만, 나는 그에 대해 지켜야 할 도리가 없으므로 저 “생수의 근원되는 나”라는 말을 멋대로 “나”에게서 비롯된 다름에 대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교제할 수 있는 존재임을 생각지 않고 타인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라는 마른 구덩이를 파는 죄에 대한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기독교인으로서 임신중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일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는 이가 있었다.2 이처럼, 명령하고 응징하는 신의 이면에 베풀고 축복하는 신이 있다. 원죄original sin의 서사에 맞서, 원복original blessing의 서사를 수립할 근거를 제공하는 신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인간 생명을 신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인간 생명에 내포하는 다름의 가능성, 차이의 가능성 또한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얼마든지3 전환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받지 않기로 하는, 나의 가능성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저 의구심에 지나지 않으므로 굳이 말하진 않았던 것이 있다. 태아가, 혹은 신생아가 신이 내린 선물이라면, 한때 태아였고 한때 신생아였던 다른 이들의 삶은 무엇일까. 특정한 생명만이 선물로서 받아들여지는 ― 혹은 적어도 보다 더 소중한 선물로서 받아들여지는 ― 데에는 가족이니 민족이니 하는 소위 혈통 중심의 이익공동체 개념 밖에도 한 가지 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이 ‘나’를 축복한다는 생각. 어떤 존재가 신의 선물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 온 선물인가? 나의 몸을 거쳐 나에게 온 선물이라고 한다면, 그 맞은편에는 자신의 몸으로 어떤 존재를 낳지 못한, 그러니까 축복 받지 못하였으며 어쩌면 저주 받은 누군가가 있게 될 것이다. 빛과 어둠을, 뭍과 물을, 풀과 나무를, 짐승과 인간을, 이 모든 것을 보고 똑같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신이 이런 방식으로 축복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가 축복하는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나나 네가 아니라 나와 네가 함께 머무는 이 세상인 것은 아닐까.4 나의 태중에 온 존재가 선물이라면 다른 이의 태를 거쳐 내 곁에 당도한 이 또한 선물일 테다. 아쉽게도 나는 몸을 하나밖에 갖지 못하였으므로 두 선물을 모두 온전히 즐기지는 못할 터이나, 어느 쪽에 마음을 기울이든 그것은 그의 선물을 기쁘게 받는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교제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그 신은 세상 만물을 보고 똑같이 좋아한다면, 우리 또한 누구와의 관계인지에 상관 없이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신, 예수.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 9장 6절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라는 말로 시작한다.5 ‘아기가 났다’는 말을, 그리고 ‘우리에게’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은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므로 저 말에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 왔던 세 사람의 이방인을, 예수가 함께 하고자 했던 이방인들 ― 그러니까, 유대민족이 아닌 모든 이들 ― 을, 그리고 이방인으로서의 예수를 만났던 모든 이들을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떤 아기가 우리에게 온다면, 혹은 어딘가의 아기였던 이방인이 우리에게 온다면, 그것은 우리의 재산으로서 오는 것은 아닐 테다. 우리의 친구로서, 이미 서로 다른 우리와 또 다른 새로운 존재로서, 우리와 교제할 이로서, 우리에게 온다고 믿는 편이 나을 것이다. 신이 선물한 이 세상을 신의 형상 속에서 서로 교제하며 살지 않는, 그야말로 이방인이 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 여기까지만 떠올렸는데, 인용하려고 원문을 찾아보니 그 뒤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말이 이어진다. 최초에 만든 것이 남자와 여자 둘이었다, 는 뜻으로 이해하건 성적으로 분화된 동물적 형상을 또한 담았다, 는 말로 이해하건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 언제까지나 남자와 여자만 있으리라는 말은 없으므로 ― 일단 넘어가기로. 이하에서 『성경』의 번역은 개역개정을 따랐다. ↩
- 믿는페미와 무지개예수가 주최한 〈교회×낙태죄 : 배틀그라운드 저자와 함께하는 북토크〉 자리에서 쪽지로 접수 받은 질문 중에 “기독교 신자로서 낙태를 선택해야 하는 당사자가 됐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일 수 있는데’, 이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죄책감과 고민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적인 부분에서 어떤 선택이 옳을까요?”라는 것이 있었다. 성공회 신부 자캐오가 대표로 답했고 믿는페미 활동가 달밤과 『배틀그라운드』 공저자 나영이 말을 더했다. “원복” 개념은 매튜 폭스Matthew Fox의 것이라고 하는데 자캐오의 말에서 따온 것이며, 축복으로서의 임신과 대비되는 저주로서의 유산이나 불임에 대한 이야기는 나영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
- 물론 나는 삶을 선물보다는 저주로 받아들이는 편이므로 이 “얼마든지”라는 것을 아주 힘주어 말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이 저주 속에서도 작은 가능성이나마 찾아보려, 그 가능성이나마 즐겨보려 애쓰는 사람에 불과하다. ↩
- 필연적인 연결로 여기지 않으며 그가 이런 관점의 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나, ‘나에게 직접 내려지는 축복’이라는 생각이 모종의 선민사상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리라는 의심 또한 갖고 있다. ↩
- 나는 이 문장을, 그리고 아래에 쓴 이 문장을 읽는 태도를 한나 아렌트의 책을 통해 배웠다. 그 흔적은, 이 글의 다른 부분들에도 묻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