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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데도 부산에 가지 않았더니, 시간이 많이 남는다. 정확히는, 리포트 작성에 투자해야 할 시간을 딴짓하느라 남겨먹고 있는 중인 거지만. 게으르게 뒹굴거리면서도 하루 세 끼는 다 챙겨먹고 있다. 놀고 또 놀다가, 거진 1년 쯤 묵은 일 두 가지를 드디어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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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겨울, 그러니까 2007년 12월에 태안엘 갔었다. 다들 그랬듯, 기름을 닦으러 말이다. 인연맺기 운동본부의 프로그램으로 간 것이었는데, 나는 기름을 닦는 대신 사진을 찍는 일을 맡았다. 2박 3일의 일정 동안 일과 시간에 한 일이라고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엷은 기름을 닦아 내는 것뿐이라, 사진을 딱히 제대로 찍은 건 아니지만.
어디에서 누굴 비추나 비슷한 모양이 나와, 적지 않은 시간을 황망히 돌아다녔다. 괜찮은 피사체를 찾는다는 명목이었지만 반쯤은 유람이고 관광이었다. 오랜만에 본 바다가 너무 아름다웠거든. 조약돌도, 파도도, 물결도, 그리고 기름물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갯강구들도. 아무리 명분을 갖다 붙여도 그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건 다 티가 나는 법이다.
그런 한가함을 읽어 낸 다른 방문객들, 그러니까 나와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이 몇 번인가 나를 불렀다. 카메라를 안 갖고 왔다거나, 필름을 안 갖고 왔다거나 하는 사정을 대며 사진을 찍어달라고들 했다. 포즈를 잡고 단체 사진을 찍은 이들도 있었고, 그냥 자료로 쓰게 일하는 모습을 찍어 달라는 이들도 있었다. 한 팀을 찍고 있으면 그걸 본 다른 팀이 또 다가오곤 해서 내리 다섯 팀 정도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사진을 찍은 후에는 주소를 받았다. 대개가 노인분들이라, 사진은 인화해서 우편으로 보내야 할 형편이었다. 다들 인화비는 주겠다고 했지만, 굳이 경비까지를 받아 낼 생각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의 사진을 찍는 건 사실 즐거운 일이다. 한편으론 긴장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피사체의 오묘한 위치가 사진에 묘한 기운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찍었던 사진들을 이제야 보낸다. 몇 번인가 보내려고 했었지만 늘 딴 일을 하다가 잊어버리곤 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주소를 저장해두었던 핸드폰이 고장나 버리는 바람에, 사진을 보내 줄 수 있는 것은 세 무리의 것밖에 없다. 그나마도 정확하지가 않고. 사진은 결국 인화하지 못하고 CD에 저장해서 보내기로 했다. 그 당시에 비하면 지금이 돈도 시간도 부족한데, 괜한 욕심을 부렸다간 또 기약없이 멀어질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사진이 담긴 CD 세 장이, 내일이면 우체통에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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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를 하다가 알게 된 사람 중에 화가가 한 명 있다. 기교가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화려한 색을 쓰는 사람도 아니다. 애초에 직업 화가도 아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소위 ‘막일’이라 불리는 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소박하고, 때론 투박함에도 삶의 무게가, 살아 있음의 환희가 느껴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지난 해 이맘 때쯤 그에게 초상화를 부탁했었다. 그는 흔쾌히 그려주겠다고 했고,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얼굴 사진이라도 좋고, 내가 좋아하는 사진 아무것이라도 좋다고도 했다. 나는, 기왕이면 실물 사진을 보내고 싶다며 그에게 주소를 물어 보았다. 그가 자신은 언제 거처가 바뀔지 모르니 전자우편을 통하는 쪽이 좋을 거라 했지만 나는 버텼다.
그랬던 사진도, 방금에야 겨우 보냈다. 결국 전자우편으로 보냈다. 다시 거처를 확인할까 하다가, 괜히 미루다간 또 그를 귀찮게만 하고 사진은 보내지도 못하게 될까봐 그냥 그렇게만 하기로 했다. 뻔뻔하게 이제야 보내면서도, 어떻게 그려달라는 요구 사항까지도 빼 놓지 않았다. 내일이나 모레쯤, 아마 그는 사진을 볼 것이다.
나의 요구 사항은, 그가 내 글에서 읽었다는 나의 표정을 그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그는 나의 글에서, 서로의 웃는 표정을 본다는 이야기를 전에 했던 적이 있다. 나의 표정을 본 적이 없는 이가 내 글을 통해 본 나의 표정이 궁금했다. 더구나 웃는 표정이라니. 나는 아직도 웃는 일이 어색한데 말이다. 그가 나의 무례한 청을 받아들여 주기를 기다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