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장실에서 사람이 죽었다. 죽인 사람은 칼을 들고 한 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둘 사이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죽인 사람은 남자였고 죽은 사람은 여자였다는 것이 그들의 관계를 그릴 수 있는 표지의 전부다. 남자라서 죽인 것이다. 여자라서 죽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한 사람의 일탈을 갖고서 그렇게 일반화하지 말라고들 했다. "살아 남았다"는 다른 여자들의 말에 반감을 표했다. 유족들이 들으면 어떻겠냐고도 했다. 유족들, 거기서 나는 멈추었다. 遺族들. 남길 유, 겨레 족. 죽은 사람이 남긴 가족. 거기서 나는 멈추었다.
왜 하필 나의 가족이었냐는 감정이 깊어질지도 모른다. 유족들은 그래서 더 슬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만이 유족은 아니었다. 유족들이 죽은 이와 공유하는 것은 '피'다. "살아 남았다"고 말한 이들이 죽은 이와 공유하는 것은 '여성임'이다. 죽은 이가 죽은 바로 그 이유를 공유하는 이들이다.
"나는 너다. 너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기도 하다." 사건 현장 근처에 붙은 한 추모 쪽지의 문장이다. 이 글을 쓴 이가 유족이 아니라면 누가 유족이란 말인가, 그런 데에서 나는 멈추었다. 죽음의 이유를 공유하는 살아 남은 사람들, 죽은 이가 자신의 죽음으로써 남긴 사람들. 모든 여성들은 여성 혐오 살인의 유족이다. 이것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다.
세월호 때도 그랬다. 세월호에 타지 않은 사람들, 다행히 빠져 나온 사람들. 한국인 모두는 죽은 이들과 죽음의 이유를 공유하고 있었다. 한국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 그 이상의 이유는 없었다. 모두가 생존자, 모두가 유족이었다. 우연한 죽음도 아니고 피할 수 없는 죽음도 아닌 죽음들. 그런 죽음들은 모두를 유족으로 만든다.
"모두가 유족이다, 라는 말이 더 이상 비유가 아닌"이라고 어딘가에 썼다. 몇몇이 공감을 표했다. 자신이 유족임을, 죽은 이와 자신이 중요한 것을 공유하고 있음을 아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 죽음이 언제든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유족들의 사이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