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에 관한 네 가지 태도를 알고 있다. 스스로가 붙이는 이름들이야 다르겠지만, 늘어 놓아 보자면 이렇다. 종교 없는 유신론자, 믿는 종교인, 연구하는 종교인, 그리고 무신론자. 나는 첫 번째에 속한다.
이 넷은 전혀 다른 태도이고 전혀 다른 효과들을 갖는다고 나는 여긴다. 무신론자와 연구하는 종교인은 신을 해체한다(무신론자에게는, 그가 세계에 대한 일말의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믿는 종교인은 강화한다. 신이 아니라 그 종교를, 그 종교가 구성하는 세계를 그는 강화한다. 믿는 종교인은 세계를 굳어 가게 만든다. 종교를 갖지 않은 유신론자 또한 강화한다. 신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신을, 종교라는 이름이 붙이 않는 종교를, 세계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세계를 그는 강화한다.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세계의 원리라고 그가 여기는 무언가를, 알고 그러든 모르고 그러든, 그는 강화한다.
나는 네 번째에 속한다. 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신이 없다고 믿는다 말하면서도 여기에 속하는 이들이 있다.) 신이 ‘있다고’ 믿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 없이 나는 이 세계를 이해할 자신이 없다. 인격신이건 아니건, 선한 신이건 아니건, 세계의 시작과 지속을 설명해 줄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용기가 내게는 없다. 나는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신이건 그렇지 않은 신이건 믿지 않고 아무런 종교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내가 신을 위해 마련해 둔 그 자리에 무언가를 두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쩌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게으름을 믿는다.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주된 원리 중 하나라고 여긴다. 나는 인간이 사유할 수 있고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다고 또한 믿는다.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주된 원리 중 하나라고 여긴다. 이런 자리들에 언젠가 내가, 인간의 욕심, 자본의 힘 같은 것을 두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믿고 있는 무언가가 그것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연구하지 않고 다만 믿기만 하는 내게는 없다.
나는 신에 관한 네 가지 태도를 알 고 있다. 그 넷은 전혀 다른 태도이고 전혀 다른 효과들을 갖는다고 나는 여긴다. 그저 믿는 종교인은 좋은 점이라고는 없는 태도라고 여긴다. 종교 없는 유신론자는 그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긴다. 나는 그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