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불구의 시간 (앤 맥도널드)

원문: Anne McDonald, “Crip Time,” n.d. 원문 링크는 깨진 상태라 웨이백머신의 2012년 3월 17일자 백업본을 읽었다.

불구의 시간

앤 맥도널드

나는 당신과는 다른 시간을 산다.

우리 모두가 시간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의 평범한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할 일이 없을 땐 시간이 금세 가고 시간표를 다시 짜면 할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땐 시간이 잘 안 간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긴 잠은 구미가 당기고 혼자 남겨진 오후는 진이 빠진다. 활동지원사가 나를 기다리는 시간은 별 것 아니지만 내가 기다리는 시간은 끝이 없게 느껴진다. 시간 감각은 의존도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나의 시간과 당신의 시간 사이에는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지금보다 스무 배는 느린 세상 ― 자동차가 시속 5km로 가고 젤리 하나 씹는 데엔 한 시간이, 물 반 잔 마시는 데엔 30분이 걸리는 세상 ― 을 상상해 보라. 오줌 누는 데만도 15분은 걸리고 섹스도 지금보다 오래 걸린다면 (이건 좋은 일일지도). 《로잔느 아줌마Rosanne》 같은 시트콤이 《햄릿》과 《리어 왕》을 합친 것보다도 길어서 열 시간씩 이어진다면.

나는 슬로모션으로 산다. 내가 사는 세상은 생각은 다른 사람만큼 빠르면서도 움직임은 연약하고 서투르며 말은 모래지옥에 빠진 달팽이보다도 느린 세상이다. 나는 뇌성 마비가 있고 걷거나 말하지 못하며 글자판을 쓴다. 시간당 450 단어 속도로 소통한다. 분당 150 단어를 말하는 당신에 비해 스무 배나 느리다. 내게는 느린 세상이 천국일 것이다. 나는 강제로 당신의 세상에, 빠르고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내게서 느림보 광선이 나온다면 이 세상에서도 살 수 있으리라. 내가 속도를 올리거나 당신이 속도를 늦추거나다.

먹을 때에도 나의 시간은 당신의 시간보다 느리다. 점심을 먹는 데엔 한 시간이 걸린다.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고 밥을 먹고 수다를 떠는 데 한 시간이 아니라 오로지 먹는 데 한 시간이다. 시설에 살 때엔 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신의 시간에 맞추어야, 심지어는 더 빨라야 했다. 아이 하나 당 6분. 입을 가득 채운 음식에 목이 막히기라도 하면 당신들은 내 식사를 멈추고 다음 아이로 넘어갔다. 요즘은 점심을 길게 먹는 게 일상의 낙이다. 내가 자유롭단 걸 보여주니까.

길게 말하는 건 다른 문제다. 여전히, 크기만 커졌을 뿐인, 감옥에 갇혀 있다는 걸 보여주니까. 사람들이 나와 이야기하기 위해 나의 시간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나의 속도에 맞게 대화를 늦추면 다른 이들은 따라오지 못한다.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이 이어지고 대화는 저 멀리까지 가버린다. 스무 배나 느린 너무 긴 문장은 인내심을 시험하고 나의 청자들에게는 없는 수준의 기억력을 요구한다.

기술도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헤드포인터로 타이핑을 하면 기다란 종이 띠에 문장이 인쇄되는 캐논 커뮤니케이터Canon Communicator를 써 봤다. 헤드포인터로 음소를 고르면 단어나 문장으로 이어주는 음성 합성기를 써 보기도 했다. 키보드 대신 아홉 개의 버튼을 눌러 글을 쓸 수 있도록 개조된 컴포터도 써 봤는데, 내가 써 본 첨단 기술 의사소통 장비는 하나 같이 글자판을 쓸 때보다 느렸지만 그 중에서도 컴퓨터가 제일 느렸다. 시간 당 열 단어를 입력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컴퓨터를 세팅해 준다면 말이다 (나는 프린터에 종이 채우기는 고사하고 디스크 삽입도 못 한다).

이런 장치들은 그것 없이는 못할 일들을 할 수 있게는 해주었지만 그게 유의미할 만큼 빨리 할 수 있게 해주지는 않았다. 기술이 나를 정상으로 만들어 준다면 아주 좋은 일일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더 느리고 비효율적이게, 비장애인과 함께 다른 데 쓸 시간이 줄어들게 만들 뿐이다.

나는 첨단 기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게으름은 비장애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장애인에게도 골칫거리다. 장애가 심할수록 기술 사용법을 익히는 데에 드는 수고는 커지고 효용은 줄어든다. 나는 수고를 들일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수고하기를 주저한다.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게 글을 적게 쓰고 사람도 적게 만나게 되는 것이라면 가치가 없다. 도와 줄 사람이 있으면 기계는 쓰지 않고 싶다. 글자판만 있으면 다른 기술 없이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그래, 독립적으로 타이핑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간당 400 단어 이상 쓸 수 없다면 장치를 설치할 가치가 없다. 가장 좋을 때에도 이렇게나 적으니, 그저 독립적이기 위해서 더 줄이는 건 내겐 아무 매력이 없다.

써 본 것 중에서는 마카우Macaw라는, 내가 글자판에서 짚은 문장을 누군가 말로 해주면 녹음해 둘 수 있는 말하는 기계가 제일 유용했다. 하지만 그 기계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지까지 알려주지는 않아서,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대화에서 내가 뭐라고 말하는 게 재밌을지를 예측해야 한다. 자주 하는 정치 농담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걸 녹음해 뒀다간 재밌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기어코 그 농담을 하려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불구의 시간과 표준 시간의 간극을 메우는 데 도움이 되는 건 기껏해야 ‘잘 지내세요?’나 ‘뭐하며 지내세요?’ 같은 인삿말 정도다.

불구의 시간은 생각이 말을 앞지르도록 미리 짜여 있다. 우리가 택하지 않은 활동들로 짜여 있는 불구의 삶과 같이 미리 짜여 있다. 다른 이의 목소리로 우리의 삶을 덮어쓰도록.


Petra Kuppers, Eco Soma: Pain and Joy in Speculative Performance Encounter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22의 4장 두 번째 절을 읽다 알게 된 글이다. 아래 대목에서 언급된다.

다른 한편으로, 불구의 시간은 장애 문화에서 나온 현상이자 다른 여러 비근대적, 비지배적 시간성 형식들과 함께 나온 개념이다.

원전을 추적해 불구 시간의 계보를 쓸 때면 나는 앤 맥도널드를 이 용어의 출처로 짚는다. 의사소통 보조용구(의사소통 판)를 사용해 요양원을 나와서는 마침내 학위를 따고 호주 장애문화 판의 주역이 된 언어·지체장애 여성인 그녀는 불구의 시간에 관해 썼다 (그녀는 학술 문헌 인용 정치 속에서 종종 간략히만 언급되곤 하기에 ― 책장에 실리는 것 자체가 일종의 영예다 ― 길게 인용하기로 한다).

[위 글의 첫 네 문단(사진 앞까지) 인용]8

이 글은 그 자체로 하나의 SF이자 눈물 나는 이야기다 ― “…을 상상해 보라.” 그녀의 글을 읽어 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생활 세계 묘사에 잠시 숨이 막히거나 무언가 속에서 끓어오르게 되었을 것이다. 맥도널드의 말들은 그녀의 시간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다른 세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녀는 에코 소마적eco soma “느림보 광선”이라는 SF적 상상력으로써 자신의 몸에 맞도록 환경을 바꾸는 상상을 한다. 그녀는 우리의 세상을 바꿀 수, 불구 닥터 후처럼 우리를 새로운 시공간 연속체로 보내버릴 수 있으리라. “느림보 광선”은 “입장권”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폭력적인 변화의 서사적 가능성들을 제시한다. SF 영화에서 광선이 동의에 기반해 쓰이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세포를 속에서부터 변화시키고 (잠재적으로)파괴하는 방사선, 핵 수준에서 암암리에 진행되는 서서한 변화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미주
8. McDonald, n.d.를 보라. 지난 몇 년간 호주의 활동가들과 나눈 비공식 대화들에 따르면 이 글은 1980년대 중반에 나온 듯하다. 이 앤맥도널드센터 웹사이트 페이지 공개 시점을 추적할 수 있는 최초의 자료는, 구글 인덱스 기능을 통해 찾아본바, 다음과 같다. 이 사이트의 https://annemcdonaldcentre.org.au/crip-time는 2005년 8월 17일에 최초로 인덱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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