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냉동고를 열었다 당황했다. 속에 든 게 죄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며칠이나. 단단히 얼어 있는 건 보냉팩 둘 뿐이었다. 냉기가 없진 않아서 상해서 악취를 풍기거나 하진 않았지만, 썰어둔 파 — 근처에선 한 단 단위로만 팔아서 큰맘 먹고 사야 하는, 코로나19 확진으로 자가격리를 하며 배달로 주문했던 — 만 물러져 있었다. 버섯과 (역시 자가격리 때 멋모르고 주문한) 복분자, 아마 3년 전부터 얼어 있는 두부면 같은 것들은 녹긴 했지만 상하진 않았다. 그래도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결국 모두 버렸고 오랜만에 냉동실이 비었다. 지난주엔가 해 먹고 남은 마라탕은 반쯤 얼어 있어서 그냥 먹었다.
오늘은 느지막히 일어나 식당에서 보리밥을 사 먹고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봤다. 냉동실을 채울 만큼은 아니고 당장 필요한 채소 몇 가지만. 장바구니를 계산대에 올리고 바코드 찍기를 기다리는데 캐셔 분이 애호박을 집어들고는 바꿔다 주겠다며 매대로 가버리셨다. 두어 개를 들어 비교해 보고는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상했었냐고 물으니 그래도 깔끔한 거 가져가시는 게 좋잖아요, 남자 분들이 이런 건 꼼꼼하게 잘 안 보시더라고요, 했다. 저녁에는 애호박과 양파를 조금 썰어넣고 시판 소스로 순두부 찌개를 끓여 먹었다. 허기가 살짝 돌 무렵부터 밥을 하기 시작했고 중간에 먹은 거라곤 물 한 잔뿐이었는데도 밥이 다 된 즈음엔 배가 터질 듯이 불렀다. 잠시 미루다가 그냥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엔 양파와 애호박, 냉장고에 한참 들어 있은 파프리카를 썰어 볶았다. 양파와 애호박, 파프리카가 그래도 반 개씩 남았다.
여전히 배는 부른데 영 입이 허전하다. 한참 고민하다 피자를 주문했다. 전화주문을 할랬는데 쿠폰에 번호가 적혀 있지 않아 지역배달앱을 열었다. 지난 1년 반 조금 넘는 동안 여섯 번을 시켜 먹은 피자집이 나오지 않았다. 지도앱을 열어 확인해 보니 그 자리엔 다른 피자집이 서 있었다. 다시 배달앱에서 그 집을 찾아보니 주인은 그대로인데 가입한 프랜차이즈를 바꾼 모양이었다. 거기서 주문했다. 이전 상호로 발급한 쿠폰도 계속 받는다고 적혀 있었다. 다섯 개를 모으면 스파게티, 일곱 개를 모으면 핫윙을 준다는 쿠폰 다섯 개를 모으고도 쓰진 않고 여섯 번째 주문을 했었는데 그날 받은 쿠폰에는 일곱 개에 스파게티, 아홉 개에 핫윙이라는 새 방침이 적혀 있었다. 오늘 쿠폰은 아직 받지 않았다. 피자가 아직 안 왔다는 뜻이다. 피자가 오면 시답잖은 영화를 틀어 놓고 먹을 생각이다. 영화는 아직 고르지 못했다.
어젠 《헤어질 결심》을 종종 (속으로) 웃으며 보았다. 박찬욱은 좋겠네, 탑 배우들 모아놓고 하고 싶은 거 맘껏 해서, 하고 생각했다. 정말로 이게 그의 취향에 맘껏 충실한 건지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