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 소리에 잠을 깬 것은 다섯 시 쯤, 30 분가량을 뭉그적거리다 일어나 씻었다. 아침으로는 배 하나를 깎아 먹었다. 껍질이며 씨며를 치우지 않으면 벌레가 꼬일까 걱정스럽긴 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바닥에 두고 책을 폈다. 여섯 시쯤이었나, 그때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려 읽은 탓이었을까, 두어 번을 잠들어 가며 다섯 시간 가량을 보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는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속도보다는 영 느렸다.
한 시간이면 갈 약속, 시각을 두 시간쯤 남기고 방을 나섰다. 힘주어 밀면 바스라질 것 같은, 나무로 된 현관문은 잠그고 유리에 샤시로 된 뒷문도 잠갔다. 유리조차도, 힘 주면 깨어질 것이었지만. 열어둔 것은 세탁실, 샌드위치 패널로 덧댄 공간의 문이다. 그제 세탁기를 들였는데, 그간 확인해보지 않았던 수도를 연결하려고 보니 수도관과 이어지지 않은 꼭지만 덩그러니 서 있었던 탓이다.
한 층을 내려 와서 주인집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잠시 후 똑똑똑똑. 기척이 나더니 주인 할머니가 나왔다. 수도를 이어 달라 말하자 남편이 들어오면 이야기해 두겠다며,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이라 아마 안 될 거라 답했다. 남편은 걷는 것조차 힘차지 않은 노인이니 직접 하지는 않은 터인데, 아마 업체 연락처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비탈길을 걸어 내려와 분식집을 들렀다. 테이블 위에 쌓인, 호일에 싸인 주먹밥 하나를 집어 들고 천 원짜리를 내려놓으며 주인에게 가져가마고 말을 하고 돌아섰다. 둥글게 뭉친 주먹밥을 호일째 눌러 길쭉한 꼴로 만들고는 호일을 벗겼다. 주먹밥 겉에 묻은 붉은 양념이 입가에 옮아 묻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조금씩을 흘리며 거리에서 주먹밥을 베어 먹었다. 묻은 양념만 남은 호일을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쯤은, 부러 느리게 걸었음에도 약속 시간이 한 시간 반나마 남은 때였다.
정류장 옆의 서점에 들어갔다. 비어 있는 카운터 대신 안쪽에 있는 테이블이 아르바이트생이 앉아있다. 아르바이트와 생, 두 단어를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는 것은 그가 그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는 학생임을, 그러니까 그나 누군지를 알기 때문이다. 대학에 다니던 내내 함께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선배, 졸업과 입대가 얼마 남지 않은 선배다. 그는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편히 먹게 두자 싶어 기척은 따로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체는 안 했어도 발소리는 들렸을 것이다. 손님의 기척이 있어도 치어다 보지조차 않는 것이 그의 원래 성격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지금 도시락을 먹고 있는 탓이 클 것이다. 그는 늘 무엇을 먹든 게걸스레 먹는다. 배가 불러 남은 것을 억지로 먹고 있을 때도 항상 게걸스런 모습이다. 손을 빠르게 움직이고, 그러다보니 속에 음식이 있는 채로 입을 열고 새 반찬을 밀어 넣는다. 종종 흘러나오기도 한다. 입가에 뭐가 묻어도, 아는지 모르는지, 밥을 먹던 중에 닦아내는 일은 좀처럼 없다,
테이블과는 반대쪽, 책꽂이 뒤에 있는 의자 위에 짐을 올려 두고 그 옆 의자에 앉아 앞에 꽂힌 책을 아무 거나 한 권 집어 들었다. 몇 년 전의 문학상 수상작이 실린 단편집, 같이 실린 소설들은 분명 읽은 것인데 정작 수상작은 기억에 없는 제목이다. 쓸 데 없이 시적으로, 문단을 많이 나누어 놓은 짧은 소설을 그 자리에 다 읽었다. 다 읽고 보니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내용인 듯도 싶지만 그 때도 그리 강한 기억을 남기지는 못했었나 보다, 싱거운 소설이었다.
한 시간 이십 분쯤이 남았다. 그러니까 비는 시간은 이십 분 정도다. 서점을 나와 바깥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밥을 먹고 있었다. 분명 빠르게 먹는데도 도시락이 아직 바닥을 드러내지 않은 모양, 이라 생각했었지만 돌이켜보면 두어 해 전부터 그가 위장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어쩌면 여전히 쩝쩝 소리는 내지만 그리 수이 삼키지는 못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바깥의 테이블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몇 모금 빨아들이는 동안 버스 기사 두 명이 와 앉았다. 한 명은 화장실에를 가고, 한 명은 내 맞은편에 앉아 주위는 살피는 듯 하더니 내게 말을 붙였다. 이쪽으로 와 앉으라며 그는 자기 자리를 내어 주더니, 짐을 옮기는 내 손에 들린 카메라를 보고는 가격을 묻고 자신이 얼마 전에 산 캠코더의 스틸 사진 화질에 대해 말했다. 이윽고 화장실에 갔던 그의 일행이 돌아왔다.
테이블 아래에 깔린 마룻바닥의 틈에 식권이 빠진 모양이었다. 이미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듯, 그는 화분에 자란 잎들을 헤쳐 기역 자 모양의 쇠꼬챙이 하나를 꺼냈다. 틈새에 밀어 넣어 이리 저리 움직이더니 식권이 알맞은 자리까지 왔는지 꼬챙이를 내려놓은 그는 가방을 열어 테이프를 꺼냈다. 길게 푼 테이프를 입으로 뜯은 그는 꼬챙이의 꺾인 부분에 테이프 뒤쪽을 대고 반으로 접더니 틈으로 밀어 넣었다. 식권에 테이프를 붙여 꺼낼 요량이었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동료의 놀림에 굴하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그를 보느라, 담배만 피우고 바로 타 넉넉히 도착할 계획이었던 버스 두 대를 그냥 보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각이 딱 한 시간 남았다. 지금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하면 아마 약속 시간이 얼추 다 되어, 끽해야 십 분 정도를 남기고 도착할 것이었다. 가방을 매고 카메라를 들고 정류장으로 자리를 옮겨 줄을 서는 동안 동료는 이미 자리를 떴고, 혼자 남은 그는 마루 틈을 몇 번 더 찔러보더니 포기한 듯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언제 밥을 다 먹고 나왔는지, 선배는 이미 사람이 앉아 있었던 서점 테이블 대신 옆의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고 있었다. 서점은 아마 비어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