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이 블로그엔 남아 있지 않지만, 언젠가 겪었던 놀라움에 관한, 그리고 그 사건과 사이의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놀라움이란, 학생 운동을 하는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서로 자기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느낀 감정이었다. 열 명쯤 되었을까,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은 너무도 편하게 살아 왔으나 세상에 편치 못한 사람을 사는 사람이 많음을 알게 되면서 운동을 시작했노라고 말했다.
나는 놀랐고, 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결코 편하게 살지 못했노라고, 그들이 ‘알게 된’ 종류의 불편함, 그러니까 빈곤―물론 나의 유년은 빈곤했지만―이나 장애, 혹은 고용 불안 같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이 세상을 살면서 나 자신의 불편함을 느껴 왔노라고, 그렇게 말했다.
가족이, 학교가, 직장이, 혹은 사회가 가하는 억압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가까이는 ‘자율’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내 몸을 구속했던 학교에서부터, 조금 멀리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가정 형편과 조금 더 멀리는 신경이 쓰여 그냥 묻어 둘 수 없었던, 나보다 더 곤궁한 사람들의 존재까지가 모두 내게는 불편한 일이었고, 그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어 운동을 하노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거짓은 없었고, 지금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이자 말일 뿐, 현실에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어 운동을 택했지만, 여전히 그 선택을 안은 채 살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해결되리란 희망은 눈곱만치도 품고 있지 않은 탓이다. 오로지 절박한 필요에 의해서 해결을 도모할 뿐, 그저 그럴 뿐인 탓이다.
나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절박한 필요가 있고, 그 필요는 저절로 충족되지도 않으며 나나 타인 개인의 힘으로 충족시킬 수도 없는 것이기에, 사회에, 국가에, 혹은 세상에 해결을 요구한다. 그것이 나의 운동이다. 그러나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다면, ‘요구한다’는 행위는 정말이지 폭넓게 해석되고 실현될 수 있다.
애매하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해결을 요구하는 것인지, 그러니까 운동을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가 말이다.
표면적으로 지금의 내게 운동은 박봉을 감내하며 진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는 것, 직업 활동 이상으로 집회에 가고 시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 정도다. 그러나 집회에 가는 것과 기사를 쓰는 것, 그리고 블로그에 글을 끼적이는 것과 트위터에 한 마디 내뱉는 것이 ‘요구’에 기여하는 바가 얼마만큼 차이 나는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선은 정말이지 애매하다.
운동을 한다는 것과 운동을 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 둘 가운데 내가 어느 쪽에 있는지, 어느 쪽에 있을지, 어느 쪽에 있으면 되는지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친구들에게는 어디에 있는지보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생각한다고 쉽게, 또한 자신 있게 말해 왔고 앞으로도 말할 것이지만,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보다 미묘한 문제다.
어디를 향할 것인지는 알아도, 어디에 있고 싶은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편한 곳에 있으면 된다, 고 생각하지만, 어느 곳에 있을 때 마음이 편한지 알 만큼의 경험이 내게는 없다. 그것을 알기 위해 당장 끌리지 않는 노력과 시도를 할 마음도 없기에, 나는 여전히 애매한 상태로 남는다.
지금조차도, 내가 운동을 하고 있는지 운동을 한다는 느낌을 갖고 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이런저런 핑계로 기자 일을 줄여 가고 있기에 더더욱 그렇겠지만,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다.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지 싶다. 미묘하다고, 미묘할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한 번쯤 말해 두고 싶었던 것도 같지만, 일단은 그냥, 지금은 잘 모른다고, 덮어 두기 위해, 뚜껑을 닫기 전에 내용물을 한 차례 더 확인해 본 셈 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