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운동이 반신자유주의 운동이고, 이주 노동자 운동이 비정규직 철폐 운동입니다."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토르너 위원장은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주최의 118주년 국제노동절 기념대회의 무대 위에서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학로에서의 일이었다. 힘 있고 뜨거운 목소리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구걸이고 또 애원이었다. 토르너 위원장은 지난 해 겨울에 표적 연행 후 강제출국 당한 까지만 위원장에 이어, 얼마 전인 4월 6일 비밀리의 총회를 통해 새로 선출된 이였다. 까지만을 비롯해 라주, 마숨, 세 명의 지도부가 연행되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몇 번의 기자회견(을 빙자한 작은 집회)과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 있는 기독교 회관에서의 농성 뿐이었다. 연행된 이들이 구금된 청주 보호 감호소 앞에서 문을 막아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몇몇의 사회운동단체들이 함께 했지만, 사실 사무실의 상근자들 이외에 실제로 올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들은 단속을 피하느라 나설 수 없었고, 그 외에 힘을 실어 주는 곳은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임 위원장은 숫제 애원에 가까운 연설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돕는 것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외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명분이 없이는 남의 일을 잘 돕지 않는 수많은 이들의 앞에서였다. 자신이 서 있던 무대에 올라 온 대부분은 대공장 노동자, 사상 초유의 연대 투쟁을 진행중인 노조의 위원장, 혹은 어느 정당의 대표이거나 국회의원 쯤 되는 사람들이었기에, 모두들 반신자유주의 투쟁, 비정규직 철폐 투쟁에 있어서 한 가락 씩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처럼,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외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나 큰 일인지, 얼마나 장한 일인지를 자랑할 뿐이었다. 민주노총 소속의 작은 노조 위원장은 그렇게, 그날 결의되던 총력 투쟁에 자신들의 투쟁이 조금이라도 낄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무대가 보이지 않는, 행렬의 맨 뒤에서 듣기에는 한국인의 것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또박또박하고 논리정연한 연설이었다.
그 행렬들 사이에서는 어느 공장의 신생 노조, 무슨무슨 투쟁을 위한 위원회 따위의 문구가 적힌 조끼를 입거나 피켓을 든 사람들이 유인물을 뿌리고 모금함을 돌리고 있었다. 노동자들도 있고 학생들도 있었다. 노동절 기념대회의 화려한 무대에 올라갈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세계를 바꾸는 투쟁에 나름대로 몸담고 있지만, 그 소득에 있어서의 지분을 아직 얻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수십 개의 스피커를 타고 쩌렁쩌렁 울려 나오는 연설들을 뒤로 하고 그들은 나름의 살 길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언론의 관심을 받기 위해 행인들이 많은 거리로 나설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당장 앞에 줄 지어 앉아 있는 ‘동지’들의 관심을 얻는 것이 우선의 급선무였다. 없는 돈을 그러모아 얼마 씩을 인쇄한 유인물들이 손에 손을 거쳐 사람들에게 나누어졌고 파도타기를 하듯 하나하나 앉은 이들의 엉덩이 밑으로 깔개가 되어 들어갔다. 모금함으로 모인 얼마간의 돈이 곧 겪게 될 운명이었다.
다음날인 5월 2일, 민주노총의 행사에는 관심이 없던 어떤 사람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민주노총 역시도 이야기하던, 대통령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 허용을 규탄하는 집회였다. 만 명이 모였다고도 했고 이만 명이 모였다고도 했다. 그 모임을 처음 발의한 어느 고등학생은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토르너 위원장은 임기를 채 한 달도 채우지 못한 채, 법무부의 요원들에 의해 팔이 꺾이고 차에 실렸다. 단속을 피해 묵고 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실 앞에서의 일이었다. 삼십 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소부르 부위원장 역시 연행되고 말았다. 단속을 피해 선출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고, 사는 집조차도 쉽게 알 수 없도록 생활하던 사람이었다. 보증금도 없는 월세 십만 원짜리 방에서 그가 연행되었다는 사실은, 옆집 할아버지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청주의 보호감호소로 이송된 그들은, 전화를 통해 노조를 잘 지켜 달라고 남은 이들에게 신신당부했다.
5월 3일에는 지난 해 겨울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기자회견이 출입국사무소 앞에서 열렸다. 걸려 있는 사안도, 참가하는 단체도, 심지어 단체를 대표해 온 인물의 면면들까지도 그대로였다. 다만 그들의 표정이 좀 더 침통해져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분개했지만 수가 적었다. 정문을 막아선 경찰의 지휘관은 그들을 보며, 한 시간 뒤면 다들 그냥 돌아갈 테니 자극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당부했다. 정말로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조용히 돌아갔다. 비록 한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 동안 문 앞을 막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오는 차에 길을 내어 주었고 막힌 인도를 보며 짜증내는 행인에게 사과했다. 세계 노동절 이틀 후, 대한민국을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 친구들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M’aidez, m’aidez, 마침 커다란 배가 앞을 지나고 있었지만 조그만 난파선의 조난 신호는 그까지는 닿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은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쏘아 올릴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