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자전거를 탄 것도 어느새 반년이 넘었다. 처음 탔던 자전거는 7만원인가를 주고 산, 투박한 물건이었다. 무거운 물건이었고, 튼튼한 물건이었다. 그럭저럭 굵은 자물쇠도 달려 있었고, 어느것 하나 싣지 못한 적 없는 짐받이에, 흙받이까지도 달려 있었다. 전지 값을 댈 자신이 없어 등은 달지 못하였지만, 앞뒤로 반사경 역시 빠짐없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새로 산 물건은 가격이 그 두배 쯤 되는 것이었다. 무거운 원래의 자전거에 지쳐 갈 무렵이었고, 여태껏 만져보지 못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비슷한 물건들 중에서는 역시 가장 싼 것이라 썩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잘 깔린 서울의 도로를 달리기에는 모자람 없는 물건이었다.
예정에 없던 지출을, 앞번 자전거의 두 배나 되는 가격으로 한 탓에 흙받이나 짐받이는 달지 못했다. 자물쇠는 앞의 자전거를 사면서 덤으로 받은 작고 가는 것이었고, 반사경은 뒤쪽에만 달았다. 바퀴가 가늘어 제동력이 약하기에 더 위험한 것이었지만, 여전히 전지값을 댈 자신은 없어 등은 달지 못했다.
타이어의 지름은 27인치, 앞의 것보다 1인치가 더 큰 물건이다. 핸들은 동물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소의 것처럼 굽어 있고, 몸체는 가늘다. 날렵하고 높은 차체에서 생략된 짐받이와 흙받이는 ‘없음’이라기보다는 ‘불필요함’으로 비쳤다. 늘 그래왔듯 가장 싼 것을 샀음에도, 사람들은 뭔가 비싼 것을 산 것으로 생각했고, 늘 지고 다니던 짐을 배낭에 넣었을 뿐임에도 사람들은 짐도 없이 가볍게 다니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오해 따위야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들의 생각이 진실이 아닐 뿐더러, 그 생각들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내가 13만원 짜리 자전거를 샀다고 해서,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형편에 자괴감을 느낄 사람이나,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의 수고로운 삶을 괴로워할 사람은 주변에 딱히 없었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것은 자전거를 타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운동삼아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다니거나, 헬멧부터 타이즈까지 성장盛裝을 하고 ‘자출'(자전거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는 것은 아니다. 내 눈에 늘 밟힌 것은, 짐받이 가득 폐지를 싣고 신림로를 다니는 이들이나 짐받이로 모자라 양쪽 핸들에 걸린 주머니에까지 배달할 물건을 가득 담고 종로를 가로지르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투박한 자전거, 짐받이를 높이고 스탠드를 튼튼하게 만들려고 용접한 자국까지 선명한 그 자전거들에게 내 자전거는 그야말로 사치로 보일 것이었다. 짐받이 가득 실린 그들의 온갖 짐에게, 짐받이 없는 나의 자전거는 어느 것 하나 질 필요없는 여유로운 삶으로 비칠 것이었다. 전조등이 없는 것조차가, 밤에는 나다니지 않고 따뜻한 집에서 쉬는 삶으로 비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게도 그리 보이는 자전거들이 많은데, 그들에게야 오죽하랴.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화려한 자전거들을 나는 늘 따라잡는다. 수많은 사람들은 내 한달 월세보다 비싼 브레이크를 단 자전거에 올라 앉아 내 자전거 가격과 맞먹는 타이즈를 입고 도로를 달린다. 역시나 유명 브랜드에서 나온 저지와,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차체, 선글라스와 헬멧, 그리고 깜빡이는 전조등까지를 합치면 나의 한 학기 등록금 쯤은 가볍게 넘길 자전거들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그들을 기어이 따라잡는다.
자전거야 이미 사버린 것이었지만, 그래서 나는, 헬멧 만큼은 쓸 수가 없었다. 바퀴 폭이 좁아 유난히 많이 흔들리는 내 자전거가 한강을 건너고 고개를 미끄러지는 것을 보며 가슴 졸이는 이들이 내게, 제발 헬멧이라도 쓰라고, 너무 걱정된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신호등이 바뀌기 무섭게 교차로를 가득 메우는 종로 3가의 자전거들, 성긴 백발 사이로 흐르는 땀을 보고서 내 머리에 헬멧을 씌울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발 헬멧을 쓰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리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이 내게 하는 걱정보다, 내가 일방적으로 느끼는 저들의 삶에 대한 연민이 더 무겁다고 말하는 것 역시,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늘 핑계를 댔다. 저지와 타이즈를 갖춰 입지 않고 헬멧을 쓰면 보기 우스우니 그러지 않겠다는둥, 열이 많은 체질이라 헬멧을 쓰면 더워서 안된다는둥, 가당찮은 말들로 그들의 걱정을 따돌렸다.
그런데 울어버렸다. 나를 걱정하던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차들 사이를 지나는 내 뒷모습을 보면 너무 무섭다며, 눈물을 터뜨렸다. 버스를 타고 내 자전거 곁을 지나다 내가 안 보이게 되는 순간이나, 거리에서 사고가 난 것을 볼 때면 너무도 무서워서 가슴이 두근거려 참을 수가 없다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아마도, 종로의 자전거들에게 내가 흘린 눈물보다는 훨씬 뜨거웠을 것이다.
그 눈물을 보고서도 나는 헬멧을 쓰마고 말하지 못했다. 아마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눈물에 대한 답으로써 헬멧을 쓴 채로, 높다란 짐받이 옆을 지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 마음에 품은 알량한 도덕을, 그 눈물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터이다. 그저 미안하다고만 했다. 아니 어쩌면, 미안은 하지만 헬멧을 쓸 수는 없다고 못을 박아버렸던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침, 그 다음날엔가 혹은 그 다음날엔가 어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용하지 않는 헬멧이 하나 있으니 받아달라고 그 친구는 말했다. ‘받아 달라’는 말을, 선물을 줄 때 사용한다고 그는 설명했다.그제서야 나는 알량한 나의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 감사히 받겠노라고 그 친구에게 답하고서야 헬멧을 쓸 마음을 나는 겨우 먹을 수 있었다.
그러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헬멧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번은 그 친구가 잊고 헬멧을 가져 오지 않았고, 그 이후로는 내가 바쁜 통에 시간이 맞질 않아서 지난 금요일에야 겨우 헬멧을 전해 받았다. 토요일 아침에는 그래서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탔다. 학교 정문 앞의 고갯길을, 헬멧을 쓰고 넘었다. 여전히 길 가는 사람들이, 그리고 혹시 마주칠지 모르는 자전거들이 신경 쓰이지만, 그래도 고마운 일이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헬멧을 쓴다. 알량한 나의 연민 대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심어린 걱정에 대한 예의를 다할 수 있게 되었다. 불편하지만, 아마 언제까지고 늘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