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Rinaldo Walcott, “Why we should abolish ‘Corporate Pride’ once and for all,” Canadian Diemnsions, 2023.
‘기업 자긍심’을 깨부숴야 하는 이유
― 자긍심은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유월은 자긍심Pride[1]역주: 이 글에서 “자긍심”이라고 쓴 것은 대부분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쓴 Pride, 즉 여러 행사, 행진 등을 아우르는 자긍심의 달 기획 전체를 … (계속)의 달이다. 올해도 7월 1일까지 동성애자, 퀴어 생활은 밀어두기로 했다. 매년 유월이면 동성애자이기를 잠시 멈춘다. ‘기업 자긍심’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는 그것은 나의 퀴어 생활에 중요한 문제들을 다룰 수 없고 다루지도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대기업 스폰서를 거느린 기업 자긍심은 자긍심 활동들을 성대한 파티에 지나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자긍심의 달이 이제 공식적으로 지정되었고 축제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넘어갔고 정치적으로 하향세에 있음을, 무엇보다도 성적 해방이라는 미래로부터 물러섰음을 나타내는 신호다. 오해는 마시라, 파티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 사실 나는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혁명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페미니스트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추종자다. 퀴어, 트랜스들은 무도회장에 혁명적인 친밀성, 나눔, 공동체 건설의 공간이 될 잠재력을 품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춤은 우리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우리의 춤은 항상 정치적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내가 기업 자긍심에 반대하는 것은 퀴어, 트랜스들이 이제 하나 같이 이성애적 시선을 위한 유흥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퀴어, 트랜스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위해 ― 무지개색으로 꾸미거나, 드랙을 하고 퍼레이드에 나가거나, 젖꼭지를 드러내며 가부장제에 저항하거나, 엉덩이가 뚫린 가죽바지를 입거나, 쩍 갈라진 근육을 드러내거나 하면서 ― 연다고 생각한다 해도, 자긍심은 이제 해방을 위한 강령은커녕 그런 기미조차 없는 보여주기식 퀴어함의 축제가 되어버렸다. 정치학 없는 쾌락주의는 변혁적인 정치가 아니다. 퀴어 광대놀음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 역학의 이면에는, 후원 기업들은 해방에의 열망에 뿌리 내린 퀴어 기획이 아니라 퀴어 광대놀음을 선호한다는 사실이 있다. 퀴어 해방은 지역 자긍심 조직에 자기네 이름과 로고를 걸고 축제의 모습에 교묘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류의 기업, 정부 후원자들에게는 골칫거리일 것이다. 이런 기관들, 회사들은 지시하는 일 따위 없이도 자긍심에서 정치적 열망이 빠져나가게 만든다. 말은 그들의 돈이 한다. 내가 유월에는 동성애자이기를 쉬는 것은 동시에 춤도 추고 정치도 하고는 할 수 없는 자긍심 축제에 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긍심은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자긍심이 그러한 미래를 맛보게 해줄 수 없다면, 기업 자긍심을 깨부숴야 한다.
퀴어에 대한 공격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같은 때에야말로 자긍심 행진은 더더욱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말할 이도 있을 것이다. 나도 때로는 상징적 몸짓을 붙들기도 한다. 하지만 기업과 정부가 뒤에서 자긍심에 돈을 대면서 정치적 메시지랄 만한 것은 전부 없애버리고 오직 상징적 몸짓만 남긴다면? 진짜 퀴어, 트랜스의 삶은 벼랑 끝에 몰려 있는데 마치 무해하다는 듯 “파트너십”이라 불리는 기업의 기부를 우리가 어떻게 참겠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동성애혐오로부터 피신한 이들과 함께 그들을 지지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이들과도, 흑인의생명은중요하다 운동의 열기 속에서도, 그저 파티를 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려는 이들과도 자긍심 행진을 해 왔다. 자긍심이란 내게 파티란 언제나 정치적인 일이며 정치란 언제나 파티의 일부인, 잠재적 퀴어 생명력의 시간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적 실천, 선택한 가족, 다른 여러 급진적인 사회 생활 방식들이 많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일이란 걸 알면서도 정치와 파티의 교차점에서 급진적 공동체를 건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업 자긍심은 자긍심의 윤리적 토대를 앗아가려는 시도다. 내 신경을 긁는 것은 그런 도둑질에 퀴어가 결탁한다는 사실이다. 퀴어, 트랜스는 그저 자본주의를 위한 틈새 시장이 아니다. 나는 기업 자긍심이 심히 불쾌하고, 우리가 당당하고 자랑스레 살 수 있도록 많은 것을 ― 자신의 목숨까지도 ― 바친 앞서 간 이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우리는, 편견으로 뭉친 이들이 돈다발을 흔들면 자본주의가 얼마나 재빨리 퀴어, 트랜스를 선뜻 내다버리는지를 목도했다. 버드 라이트와 타겟의 최근 광고는 퀴어, 트랜스 포용의 변덕을 보여주는 흔한 사례일 뿐이다. 솔직해지자. 애초에 특정 부류의 게이, 레즈비언만 포용되지 않았던가. 나머지는 요주의자였고, 어쩌면 용인은 받았겠지만 결코 포용되지는 않았다. 우리의 성적 실천, 성별 표현, 인종, 계급, 직종, 이주민 신분, 규범적인 점잖은 행실에 대한 거부는, 우리가 어떻게 떡을 치고 어떤 성별대명사를 쓰든 우리 몸에서 노동과 자본을 추출하려 들지만 여전히 이성애적, 자본주의적, 백인 우월주의적인 세상에는 너무도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퀴어, 트랜스의 삶이 우리를 도덕적 평판을 위한 미끼 상품[2]역주: a lost leader를 a loss leader로 읽음. 취급하는 기업 손익 장부에 오르는 항목이 될 수는 없다. 대기업이 상징적, 실질적 이득을 위해 우리를 내밀다가 장부 상의 다른 항목들에 문제가 생겼다고 내다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동성혼 법제화 이후, 일부 퀴어들이 우리가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여기는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많은 이들은 ― 어느 책이 붙인 이름을 쓰자면 ― “동성애의 종언the end of gay”은 아직이라고 지적하며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랬던 우리는 정체성 정치와 게토에 목을 맨다는 비난을 받았다. 퀴어와 트랜스에 대한 공격이 횡행하는 걸 보고 있자면 “내가 뭐랬어” 싶기도 하지만 고소해 할 일이 아니다. 목숨들이 그저 경각에 달린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스러지고 있다.
그러므로 퀴어, 트랜스는 모든 전선에서, 심지어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한층 더 신중해야 한다. 물론 퀴어, 트랜스는 자긍심 행진을 할 때나 일상 생활을 할 때나 안전해야 한다. 하지만 안전은 안보 국가 확장을 위한 알리바이의 일부가 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연방에서 캐나다 각지 자긍심 행사의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150만 달러의 긴급 자금을 책정한 것이 그런 예다. 트랜스, 퀴어의 삶을 둘러싸고 나오는 인종학살적 주장들에 맞서는 정치적 조치로 시작하는 대신, 그들은 우리를 감시 국가, 감금 국가의 자장 속으로 한층 더 밀어 넣었다. (토론토 자긍심 대표가 한 것처럼) 대표자격 퀴어들이 지원을 받기 위해 안보 국가 장치를 묵인하는 것은 국가 안보 문제가 불거질 때 그런 복종이 우리에게 어떤 해를 가할지를 모르고 하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기업 자긍심 조직들이 하는 일은 해방이 아니라 잠재적 무법자들을 길들이는 것이다. 자긍심이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받아야만 하겠다면, 나로서는 경찰과 감옥을 깨부수려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자긍심을 깨부수려 할 수밖에 없다. 이번 유월에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토론토 철폐·반파시즘자긍심Abolition[ist] and Anti-Fascist Pride에 참여할 것이다. 정치와 좋은 파티가 둘도 없는 사이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