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궁금했다. 이번 파업으로 예상되는 손실이 몇천 억이라는 언론 보도를 볼 때마다 말이다. 파업 노동자들이 공장에 쌓인 상품이나 기계를 부수는 것이 아닌데도, 손실액은 언제나 컸다. 파업을 하지 않았다면 이만큼 만들어 팔았을 것이라는 예측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업으로 인한 예상 손실액은 실은 노동자들이 평소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가 이상의 것을 드러낼 수 없는 숫자였지만, 늘 "손실"로 셈해졌다. 기업과 사주와 언론은 늘 그 예상 생산량을 당연한 듯 기업의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나는 늘 궁금했다. 세상에 저런 셈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하는 것이 말이다.
얼마전 누군가의 말을 통해 그런 경우를 또 하나 알게 되었다.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여성들의 성형과 흡연에 분노하는 남성들'에 관한 말이었다. 자신의 건강을 담보로 하는, 그러니까 예상 손실이 있다 해도 오직 자신의 건강 뿐인, 여성들의 그 행위에 남성들은 왜 분개하는가.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그 남성 자신의 예상 번식에 따르는 예상 손실 때문이다. 아무 근거 없이 여성을 자신의 번식 행위에 대입시키고 그 결과로 나올 어떤 일들을 자신의 성취로 예상하며, 따라서 그 일에 있을 어떤 부정적 영향을 자신의 예상 손실로 셈한다는 것이다.
조금은 안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셈법의 출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