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무한 퇴행: 다른 삶을 위한 후전진 (안드레 레페키, 2019)

원문: André Lepecki, “Infinite Retrogression: Backwardforward Motions for Another Life,” 2019. 레나테 로렌츠와 폴린 보드리의 《거꾸로 움직이기》에 부친 글이다. 작품은 보지 못하고 글만 읽었다.

Ⅰ.

이십 분짜리 영상의 마지막 일순,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움찔하게 된다. 마지막 몸짓이 행해지는 순간, 방향을 잃고 의심에 빠져든다. 다시 한 번 보면서 방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시간-서사-영화적chrono-narratological-cinematic 소품, 슬레이트 ― 중요한 행동이 시작되기 전에 소리를 내는, 그리하여 그 행동을 촉발하는 기능을 하는, 그리고 표면에는 영화의 순서를 가늠할 수 있도록 온갖 정보가 적혀 있는 ― 가 화면을 채우고 넘치는 그 마지막 장면에. 그 전까지 영상의 장면들 열 개는 다섯 명의 무용수를, 이따금 푸른색과 은색으로 빛나는 커튼을, 무용수들 각자의 움직임을 좇아 메소드적으로 앞뒤로 움직이며 매끄럽게 우리를 데려 왔으므로 슬레이트가 튀어나오는 건 사뭇 갑작스럽다. 그런데 바로 그 마지막 순간에, 《거꾸로 움직이기Moving Backwards》가 끝나려 하는, 혹은 실제로 끝나는, 혹은 가짜로 끝나는, 혹은 가짜로 거의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저 영상의 시작 이전에/으로서 기록되고 영상 자체에서는 빠졌어야 했던 것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움찔 놀라게 된다. 그리고 슬레이트 소리가 난 후에, 커트가 끝난 후에, 암전된 후에, 어둠 속에서, 《거꾸로 움직이기》가 남긴 것에 빠져 허우적대며, 여전히 잔상으로 가득한 눈을 하고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다. 지난 이십 분 ― 솔로, 듀오, 군무, 무용수들의 말도 안 되는 몸짓들, (마이크 앞에 서서는 소리를 내지 않는 식의) 텅 빈 행동들, (신발은 뒤를 향한 채 앞으로 걷거나) 신발은 앞을 향하는데 뒤로 걷는) 별 것 없는 걸음들, 묵직한 침묵들, 추상적인 소음들 (전부 약간은 반사광이 있는 검은 바닥과 빛이 통하지 않는 검은 벽으로 된 텅 빈 검은 공간에서 수행되었다) ― 내내, 처음부터, 역순으로 영사된 것인가?

영상의 끝이 자리를 옮긴 도입부에 놓인 것조차 아니다. 마치 슬레이트가 영상 밖 세계를 향해 곧장 수행적으로 작동하면서 관객에게 안내를, 혹은 명령을 하는 듯한 형국이다. 이제 당신이 하는go into action 겁니다, 라고. 이제 당신이 움직일 차례예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죠, 라고. 그런데 이미 다 끝난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시작한다는 말인가? 영상은 역설적인 답을 건넨다. 거꾸로 움직임으로써(라고) 말이다.

레나테 로렌츠와 폴린 보드리는 신작 《거꾸로 움직이기》에서 다시 한 번 영상, 안무, 설치, 사회적 조각, 퍼포먼스의 경계를 확장하고 넘어선다. 이 작품의 “방문객”들을 향해 함께 쓴 편지를 로렌츠와 보드리는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는 거꾸로 움직이면서, 어떻게 사랑하는 이들과, 그리고 또 사랑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 살고 싶은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꾸로 움직이려 하는 것은 낯선 만남들이 예견치 못했던 무언가를 위한 기분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두 가지 동시적인 움직임이 있는 셈이다. 곧게 뻗어 나가는 화살 같은 시간과 역사에서 벗어날 방도로서의 거꾸로 가는 움직임들, 그리고 예견치 못한 것들을 위한 출발점으로서의 낯선 만남들 ― 어떤 거꾸로 가는 움직임을 통해 한데 묶여 있는. 그런데 정확히 무엇에 대해 거꾸로라는 말일까? 정확히 무엇이 “제대로 된” 방향, “옳은” 방향, “맞는” 혹은 규범적인 방향을 주기에 지금의 움직임은 사실 앞으로 가는forward 움직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아가, 만일 방금 본 대로 영상에서 보여지는 것이 슬레이트 쇼트가 시사하듯 역순으로 영사된 움직임이라면, 아마도 “전진적인forward” 혹은 “제대로 된” 시간적 순서를 거슬러 편집된 것이라면, 저 이중의 시간적 부정negative은 모든 것들 전진적인 타임라인으로, 시간적 전진성 속으로 밀어넣는다는 말이 될까? 물론 아니다. 《거꾸로 움직이기》 속 이중적 움직임의 첫 번째 결론은 바로 시간이란 일방통행로라는 공준의 총체적 의문시다 (이 영상에서 도출되는 궁극적인 결론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 시간이란 부재하는 것들이라는time is that which is not 것. 다만 이 급진적 결론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논하기로 한다.)

Ⅱ.

지난 십 년 동안 우리는 배제, 억압, 착취 체제라는 사회정치적 구축물이 그 사회정치적 체제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혹은 그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공준 ― 형이하학physical sciences ― 을 지지하고 그 틀이 되며 그에 “보편 객관적 가치”(즉 초월적이며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특성)을 부여하는 이론적 전제들 ― 과 실은 깊이 연계되어 있음을 재평가하는 중에 소수주의 비판 이론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목도해 왔다. 그러한 재평가의 예로 (식민 자본주의라는 동역학적kinetic 기획과 실비아 윈터Sylvia Wynter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MAN”이라는 그 “종족계급ethnoclass”을 확언할 수 있게 한 뉴턴 물리학의 대립항으로서) “검음의 물리학physics of blackness”을 제안한 미셸 라이트Michelle Wright, “물리학의 검음”을 긍정한 프레드 모튼Fred Moten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양자 얽힘과 부토에 관한 카렌 시마카와Karen Shimakawa의 근작이나 아원자 물리학에서 가부장적 힘의 수행성에 대한 카렌 바라드Karen Barad의 심문을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수학과 (인종화된) 물질들에 대한 그 대수학적 조건화에 대한 데니스 페레이라 다 실바Denise Ferreira Da Silva의 심문, 인종 및 물질과 관련한 캐스린 유소프Kathryn Yusoff의 지리학 재구성, 사라 아메드Sarah Ahmed의 퀴어 현상학 정립이라는 기획에서 전정적vestibular이고 신체적인 함의들에 대한 조사를 들 수도 있다.[1]Wright (2015); Wynter (2003); Moten (2013); Shimakawa (2018); Barad (2003); Da Silva (2017); Yusoff (2018); Ahmed (2006) 참고. 서로 다른 기획과 감수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모두 비정치적이라 여겨지는 자연과학의 본성에 대한 전반적인 소수주의적 호명을 제안하는 이런 여러 저자들은 우리를 한 가지 중대한 사실로 이끈다. 시간, 공간, 물질의 서사들의 토대가 되는 이론적 전제들 전체를 뒤엎어야만 한다는, 물질 세계와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사실로. 이른바 “자연법칙”, 이른바 “보편법칙”을 의문시함으로써만 자연이 그 퀴어하고 일탈적이며 욕망 가득하고 길들여지지 않으며 결코 붙잡을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는 맥동 속에서 우리에게 언제나 이미 제시해 온 아름다운 약속을 마침내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로. 우리는 그러므로 물리학의 다른 상을 찾아야만,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열어 젖혀 진정으로 전적으로 다른 시간, 공간, 물질의 양태들 하에서 작동케 해야만 한다는 사실로.

Ⅲ.

《거꾸로 움직이기》는 규범적인 시간 관념을 특히나 성공적으로 폭파한다. 그런데 이 폭파는 너무도 급진적이어서 질 들뢰즈의 고찰을 하나 떠오르게 한다. 그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시간에 의해서는 그 어떤 실재적인 것도 생산되지 않는다. 습관이 생산하는 것이다 ― 하나의 체계로서 습관은 과거를 미래를 위한 규칙으로서 생산해 낸다” (Delueze 2018: 140, 인용자 영역). 그렇다면 실재적인 것에다 그 승인된 주거를 규제하는 미리 틀지어진 가능성들을 부여하는 습관들과 실재적인 것의 제멋대로 굴고 욕망하고 생성하는 성격을 뒤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고로 살기living의 규제된 관념들을 일체를, 시간의 규제된 관념들까지를, 날려버려야 한다. 그래야 규범적인 현실의 실제적인 생산력에 곧장 다가갈 수 있다. 파괴되고 지워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규범적이고 제약적이며 강압적이고 직선적인 힘으로서의 습관이다. 습관을 대신할 것은, 데이비드 라푸제이드David Lapoujade(2018)의 표현을 쓰자면, “무도한 움직임aberrant movement”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 무도한 움직임들의 한가운데에 있음을 알게 되면, 그리고 그 움직임들과 함께 생산하기로 하면, 시간에는 무엇이 남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을 단방향적으로 정향된 것으로 여기는 “뉴턴적 의미와 상식적 의미에 따른 시간의 위상학”에는 무엇이 남는가? (Maudlin 2012: 154).

이런 질문들에 대한 소수주의적 응답으로는 라이트, 모튼, 시마카와, 다 실바, 바라드, 유소프, 아메드가 제시하는 것 말고도 로렌츠와 보드리, 그리고 그들의 초감각적supra-sensorial이고 시간적으로 역설적인 무용수들 ― 마블스 점보 라디오Marbles Jumbo Radio, 줄리 커닝엄Julie Cunningham, 나흐Nach, 라티파 라비시Latifa Laâbissi, 베르너 히르쉬Werner Hirsch ― 이 수행한 것도 있다. 이들은 시간, 공간, 물질의 서사와 알고리즘의 근거가 되는 전제들을 통째로 뒤엎기 위해 모두가 함께 움직인다co-move. 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제안하기 위해, 또한 물리적 세계의 무한한 다방향성, 물리학자 팀 모들린Tim Maudlin이 말하기로 비뉴턴적인, “정향불가능한 공간-시간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실재적인 새로운 전망과 경험을 끌어내기 위해 애쓴다 (Maudlin 2012: 156). 전적으로 다른 감각 논리, 방향과 의미의, 의미의 방향의, 방향의 의미의 논리를 제안한다.[2]모들린은 모종의 우주 위상학 모델을 제안하는데, 이 모델에서는 심지어 정향가능한 시간 속에서도 “우주의 시간적 구조는 그 어떤 사건도 다른 … (계속)

이 대목에서 들뢰즈의 비범한 단방향성으로서의 규범성에 대한 비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다른 시간 여행자이자 정연한 물리학을 뒤흔드는 이인 앨리스에 대한 논의와 함께 “동시에 양방향으로 밀고 또 당긴다는 점은 되기의 본질에 해당한다”는 명제를 전개한다 ―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 모든 되기는 언제나 소수자 되기라는 점을 명심야 한다 (Deleuze 1990: 1). 실제로 『의미의 논리The Logic of Sense』 도입부에서 들뢰즈는 앨리스의 다중적인 경로들을, 그녀의 본질적인 다벡터적 공간적, 시간적 무정향성을 좇아가며 이렇게 쓴다. “양식良識은 모든 것에는 단정할 수 있는 의미sense 혹은 방향이 있다고 확언한다. 그런데 역설은 두 의미 혹은 방향 모두를 동시에 긍정하는 것이다 (1990: 1)”. 의 여러 장면들을 “역설paradox”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도크사doxa 너머에, 즉 상식 혹은 “정상적인” 감각 너머에 있는 것이라는 어원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더없이 일상적인 의미에서도 말이다. 예컨대 우리는 로렌츠와 보드리의 영상을 보는 중에 그 속에서 움직임은 줄곧 주된 혹은 특권적인 방향 없이 수행됨을 깨닫게 된다. 영상 속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무용수의 움직임의 “제대로 된” 방향을 의문에 붙인다. 예컨대 여는 장면에서 마블스 점보 라디오는 옆모습으로 화면 오른쪽을 향해 앞으로 걷는데 이때 그의their 발끝은 뒤를 향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역설적인 움직임 속에서 “뒤로”와 “앞으로”는 걷기를 위한 “제대로 된” 혹은 맞는” 육체적, 동역학적 정향성으로 여겨지는 것의 완전히 말이 안 되고 상대적이며 공간-시간-습관적인 사전정향이 된다. 혹은 또, 이번에도 마블스 점보 라디오가 빼어난 독무를 추다 나중에 줄리 커닝엄이 합세하는 범상치 않은 5번 장면, 영상에서 전부 “거꾸로” 그려지는 장면에서도 그렇다 (이 춤의 역방향성을 자신 있게 말하기 위해 영상을 여러 번 보고 제작자의 확인을 받아야 했다).

Ⅳ.

그렇다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퀴어하게 일탈적인, 시간-동역학적으로 반체제적인 《거꾸로 움직이기》의 무용수들은 우리 눈 앞에서, 트래킹 카메라의 후전진 운동, 편집실의 후전진 운동, 마지막으로 이미 현실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후전진 운동과의 얽히고 설키는 상호작용을 통해, “결코 멈추지 않는 진정한 광인 되기”(Deleuze: 2)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무용수들, 카메라, 영상, 이 모두가 “동시에 양방향으로 움직이는” 다중적 총체성으로 한데 뭉쳐진다. 《거꾸로 움직이기》의 무용수들은 동시에 앞으로 또 뒤로 움직이면서 “현재를 피해 가고 이로써 […] 미래와 과거가 반항적인 물질의 동시성simultaneity of a rebellious matter 속에서 하나가 되게coincide 한다” (Deleuze 1990: 2).

그렇기에, “반항적인 물질”을 가늠하고 그것으로부터/으로서 작업하면서 물리학은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 성적인 것, 육체적인 것 외부에 있는 고상한 영역으로서 존경 받기를 그치고 즐거운 해방이라는 급진적인 수술을 받게 된다. 물리학이 설명해 주리라 혹은 정돈해 주리라 여겨지는 모든 물질들 ― 특히 하찮은 것, 소수자적인 물질들 ― 의 반란, 봉기를 말이다. 이 퀴어한 안무적-만성적 수술에서는 현실에 더 이상 특권적인 방향이 부여되지 않으며 단일한 방향은 더더욱 부여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은 끊임 없이 모든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따라서 시간성은 선형적 진행이라는 관념에서 풀려나고 모든 물질은 이제 과거, 현재, 미래가 끊임 없이 교차하는 것으로 지각된다. 이 같이 급진적으로 열려 있는 우주에서는 이제, 이 모든 차원들을 누비는 것이 무용수, 행위자, 소수자적 주체, 도망자, 일탈자, 사전에 정향되지 않은 퀴어한 되기들의 단수성 속으로 뛰어드는 모든 존재들의 임무가 된다. 무슨 유토피아 SF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더없이 현실적인 지금 여기,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일상의 초현실hyper-reality, 한 번 더 팀 모들린(2012: 156)의 말을 빌리자면 “정향불가능한 공간-시간”에 기거하는 구체적인 행위주체로서 말이다. 이를테면, 반항적인 물질로서 “동시에 두 방향 혹은 두 의미의 ― 미래와 과거의, 전날과 다음날의, 많고 적음의, 혹은 넘침과 모자람의, 능동과 수동의, 원인과 결과의 ― 무한한 동일성”(Deleuze: 2)을 향해 움직이는 무용수로서.

비결정적indeterminate 존재 조건을 향해 후전진하며 춤추는 일은 현실에 이미 내재해 있으며 습관과 상식, 규범적 시간과 규범적 물리학이 가두어 두고 있는 잠재력들을 완전히 새로 조건 짓는다. 시간의 문제란 결국은 늘 질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것의 시간을 “시간적으로 정향가능”(Maudlin 156)하게 질서 짓는 문제 말이다. 질서 지어진 시간을 물화하고 추출해 몰사회적a-social 현실로 상정하면 할수록 진정한 시간 과학의 창출은 불가능해진다. 진정한 시간 과학이란 물론 물리학의 정수를 알려 줄 과학이다 ― 시간은 부재하는 것들이라는 간단명료한 현실 원칙이 그 토대가 될 것이다.

Ⅴ.

《거꾸로 움직이기》에서 시간의 문제를 움직임 추적하기tracking movement라는 정치적 문제와 명시적으로 맞붙인다. 로렌츠와 보드리가 말하는 대로 영상 내내 다섯 퍼포머의 움직임을 지시하는 안무적 전제는 “눈 덮인 산에서 장소들 사이를 이동할 때 신발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신었던 쿠르드족 게릴라 여성들”이 펼친 전략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전술이 그들의 목숨을 구한다. 거꾸로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앞으로 걷고 있다. 혹은 그 반대거나.” 그렇다면 어느 방향이라는 것일까? 이것이 추적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다.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들, 현지 게릴라들을 쫓는 점령군들, 365일 24시간 잠재적 소비자로서 먹잇감이 되어버린 시민들을 쫓는 전자 상거래 기업들, 이민자들을 쫓는 국경 수비대원들 ― 이들 모두가 당신의 방향, 당신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미리 알고 싶어 한다. 《거꾸로 움직이기》 전체를 통틀어 카메라의 움직임은 트래킹 쇼트tracking shot뿐이므로, 보드리와 로렌츠가 이 추적의 문제를 접어fold 일관되는 구성 장치로 삼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사라 아메드가 “족적의 역설”이라 칭하는 것, 본질적으로 (퀴어하게) 방향을 잃게 하는disorientating 권력의 추적 기술들과 주체의 호명을 떠올릴 수 있다 ― “우리는 마치 길이 우리 앞에 있다는 듯 그 길을 따라 걷지만 길은 그저 밟힌 결과로서 우리 앞에 있을 뿐이다. 족적의 역설이 떠오른다, 선이란 따라가기에 생기는 것이자 생기기에 따라가는 것이라는 역설이” (Ahmed 2006: 16).

트래킹 쇼트는 무엇이 됐든 움직이는 것을 따라 앞뒤로 움직이며 촬영한 시퀀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꾸로 움직이기》의 이십 분은 대략 이 분 정도 되는 열 개의 트래킹 시퀀스로 나뉘는데, 카메라는 수평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다가 어떤 한계점에 이르면 다시 돌아온면서 각 장면에서 춤추는 이의 움직임을 좇는다. 이 신중한, 지속적인, 계산된 전후진에서는, 시간의 문제를 곧장 트래킹의 문제와 연결하는 또 하나의 정치적 요소가 떠오른다. 《거꾸로 움직이기》에서 특권화되는 기술, 즉 춤에 있어 아주 중요하기도 한 요소다. 시간과 추적을 연결 짓는 그 시간-안무-정치적 요소는 바로 흔적trace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로렌츠와 보드리는 노골적인 트래킹 쇼트 사용을 통해, 후전진하는 춤이 벌어지는 무대의 수평선을 따라 천천히 갔다 되돌아오는 카메라를 통해 흔적이란, 시간과 마찬가지로, 부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흔적이란 존재entity 이전에 사유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흔적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종적이 숨겨진다occulted. 혼적은 스스로를 엄폐occultation로서 생산한다” (Derrida 1997: 47). 그러므로, 저 게릴라 전사들은 눈 속에 길을 잃게 하는 궤적track을 남길 줄 아는 셈이다. 그 자국은 근본적인 자기 엄폐의 흔적을 남길 뿐이니 말이다. 로렌츠와 보드리가 방문객에게 보내는 편지에 쓰는 대로, 이 엄폐 기술들occultural arts ― 춤의, 게릴라전의, 소수자 영화minor-cinema의, 퀴어한 삶의, 성교의 ― 에서 후전진은 무한이 “약점을 도구로” 전환한다. 이 전환, 이 귀환, 이 접힘folding, 이 단수성은 이미 정향되지 않은, 다방향적인, “예견치 못했던 무언가” ― 다른 삶 ― “를 위한 기분 좋은 출발점”이다.

참고문헌

Ahmed, Sara. 2006. Queer Phenomenology: Orientations, Objects, Others.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Barad, Karen. 2003. “Posthumanist Performativity: Toward an Understanding of How Matter Comes to Matter.” Signs: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2003, vol. 28, no. 3

Da Silva, Denise F. 2017. “1 (life) ÷ 0 (blackness) = ∞ – ∞ Or ∞ / ∞: On Matter Beyond the Equation of Value.” E-flux Journal, n. 79, February 2017.

Deleuze, Gilles. 1990. The Logic of Sens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Deleuze, Gilles. 2018. Cartas e Outros Textos. (São Paulo: N-1 Edições).

Deleuze, Gilles, and Guattari, F. 1982. A Thousand Plateau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Derrida, Jacques. 1997. Of Grammatology. (Baltimore and London: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Lapoujade, David. 2017. Aberrant Movements: The Philosophy of Gilles Deleuze. (New York: Semiotext(e)).

Maudlin, Tim. 2012. Philosophy of Physics: Space and Time. (Princeton and Oxford: Princeton University Press).

Moten, Fred. 2013. “Hard Enough to Enjoy.” Conversations: Among Friends. (New 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p. 3-6.

Shimakawa, Karen. 2018. “Catastrophe, Incommensurability, and the Ever-Renewable Present: Eiko Otake’s ‘A Body in Places’”. (Unpublished manuscript).

Wright, Michelle. 2015. Physics of Blackness: Beyond the Middle Passag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Wynter, Sylvia. 2003. “Unsettling the Coloniality of Being/Power/Truth/Freedom: Towards the Human, After MAN, Its Overrepresentation, an Argument.” CR: The Centennial Review, vol. 3, n.3, p.257-337.

Yussof, Kathryn. 2018. A Billion Black Anthropocenes or Non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 Wright (2015); Wynter (2003); Moten (2013); Shimakawa (2018); Barad (2003); Da Silva (2017); Yusoff (2018); Ahmed (2006) 참고.
2 모들린은 모종의 우주 위상학 모델을 제안하는데, 이 모델에서는 심지어 정향가능한 시간 속에서도 “우주의 시간적 구조는 그 어떤 사건도 다른 사건의 ‘과거’나 ‘미래’에 고유하게 놓이지 않는 방식으로 닫혀 있다. 모든 사건은 그 사건 스스로를 포함해 모든 다른 사건의 과거, 미래 광추光錐 양자에 놓여 있다” (2101: 159). 갤러리에서 《거꾸로 움직이기》를 볼 때엔 갤러리 벽에 투사되는 프로젝터의 광추를 그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퀴어한 탈정향들disorientations로 합성된 것으로 생각해 보라.

댓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