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먹기 위해 동물을 사육하는 것은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행위라고 말이다. 물론 개인적인, 혹은 가족의 필요를 위해 이루어지는 소규모 방목의 경우는 크게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동물이 나름의 생生을 살다가, 다른 동물의 생존을 위해 희생하는 과정은 자연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지나치게 좁은 곳에 가두어 놓지 않으며, 잠이나 식사 등 기본적인 생리를 억제하지 않는다면 고기’도’ 먹는 것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현대의 육식은 그렇지 않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물들은 좁은 우리 안에서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육되며, 대소변은 커녕 음식조차 가릴 수 없는 상태를 강요당한다. 그들은 운동을 금지당하며, 때로는 포육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알을 낳는 닭의 경우에는 심지어 제대로 된 잠조차 허락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그 삶의 마지막에 행해지는 도축 역시 매우 무례한 과정을 통한다. 인간이 먹는 것은 단순히 동물들의 육체나 생산물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인 것이다.
또한 그 동물들은 한 근의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삶을 담보로 하고 있는가. 소나 돼지가 먹어치우는 목초와 물, 심지어 고기는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혹은 한반도 북부나 아시아 각지의 사람들이 정말로 ‘갈구’하고 있는 것들이다. 수십 톤의 음식을 먹여 만들어지는 몇 백 킬로그램의 고기, 인간이 그렇게나 사랑하는 효율성마저도 벗어난 일이 아니던가. 초원의 풀을 베지 않고 초원의 동물들을 학살하지 않았더라면, 그 무엇도 낭비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산 후 서로를 위해 소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꽤 오래 전부터 채식, 혹은 비육식을 하려고 했었다. 다만 한 사람의 만류가 내게 걸림돌이 되었을 뿐이다. 내게 많은 것을 주고 있는 사람이지만 내가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있는 어느 한사람이, 그래도 식사만큼은 아무런 고민없이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해 와서 그간 채식을 미루어 왔다. 그리고 어제, 그의 동의를 얻었다. 그간 내가 몇 번인가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약간의 설득이 되었을 것이고, 최근 조금씩 변하고 있는 그의 생활 역시 그의 마음이 변하는 데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는 내가 고기를 먹기를 원하는 대신, 고기를 먹지 않을 나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메뉴들을 꼽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 행동의 선을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최초의 기획은 ‘사육된’ 모든 것을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지만, ‘재배된’ 많은 식물들과, ‘자연산’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있는 야생의 생물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또한 양계장의 현실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면 먹어도 좋다고 여겨 온 무정란 같은 것들도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일단의 선은 ‘사육된 육류 먹지 않기’이다. 내가 먹을 것을 온전히 내가 만들지 못하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이기도 하고, 야생의 것만을 허하는 일이 자연산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음을 경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스스로에게 생선과 우유 따위를 허하는 일이 나와 함께 식사할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다.
시작은, 오늘부터다. 의도치 않게 어제 저녁부터가 되긴 하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