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에 맞서 ― 감옥에서 시간 정복하기 (훗삼 샤힌, 2026)

원문: Hussam Shaheen, “ Against the Clock: Freed Palestinian prisoner Hussam Shaheen on conquering time in captivity,” The New York War Crimes, 2026.04.15.

자물쇠 두 개가 채워진 푸른색 감옥 철문. 수감자가 배식구로 손을 내밀고 있다.

오로지 “시계”로만 측정한다면, 감옥에서의 시간도 옥중 집필에 쓰이는 시간의 언어도 다른 모든 곳에서와 똑같다. 하지만 갇혀 있는 사람에게 시간은 숫자가 아니게 된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감각이, 깊은 의식이 된다. 계속해서 점령자들에 맞서느라 수시로 바뀌는 크고 작은 책임 탓에 수인의 어깨에는 한층 더 무겁게 내려 앉는다. 이 글은 옥중 집필에서 찾을 수 있는 초월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감옥에서의 시간성이라는 오랜 질문거리에, 그리고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의 삶과 글에서 시간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데에 답해 보고자 한다. 필자의 경험을 주재主材 삼아, 감옥에 가기 전부터, 감옥에서, 감옥을 나와서, 개인적·집단적 해방 투쟁을 이어가는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이 경험하는 시간의 이중성을 살펴볼 것이다.

삶의 시간은 — 여러가지 (천문학적, 역사적, 심리학적, 물리적, 철학적 …) 시간 범주로 갈리는 — 글에서의 시간과 이런 저런 방식으로 교차하기도 하는 철학적 범주이다. 이어지는 문명들 속에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항으로 좁혀졌으며, 이는 시간이 수평면 위에 놓인다는 의미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류는 현재로부터 스스로의 시공간적 위치를 규정한다. 현재를 살고 감각하며,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 한편 미래란 시인이든 왕자든 할 것 없이 인간에게는 3순위인 미지의 시간이다. 시간은 인간의 경험을 거쳐서만 존재하기에, 20세기가 시작될 때부터, 그 자체의 문제틀 너머에 위치해 왔다.

시간과 장소의 이중성을 생각할 때면 우리는 새삼 식민주의는 언제나 피해자들의 삶에서 시간을 동결시키려 함을 확인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온주의 식민주의는 유대화와 이스라엘화의 하나로 만들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시간을 동결시키려 해 왔으며 여전히 그리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감자들을 표본으로 삼아보면, 시온주의 식민주의가 우리 삶의 시간을, 그리고 우리를, 우리의 세상, 우리의 민족, 우리의 대의에 대한 무거운 부담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삶의 시간을 동결시키는 데에 열을 올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수감자들이 펜을 들어 끈질기게 지적, 문학적 터널을 파는 것은 바로 이 점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터널을 통해 점령의 손아귀에서 감옥의 시간을 해방하고, 시간에의 주권을 선포함으로써 — 이것은 땅에의 주권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다 — 세상에 팔레스타인 수무드의 전망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 역사를 만들어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 정치적 조건들에 짓눌려 — 펼쳐지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적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서사를 강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점령 당한 시간은 오로지 혁명을 통해서만 깨뜨릴 수 있기 때문, 또한 혁명은 혁명을 이끌고 방향을 잡을 수 있는 해방적 민족 운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점령 당한 시간이 각자의 허상을 좇아 다투는 조직들의 틈바구니에서 산산조각 나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감옥에서의 문학적, 문화적 생산은 수감자, 그의 민족, 그의 대의의 승리이다. 도둑 맞은 제 시간에 대한 주권을 선포하는 일이다. 팔레스타인 투사의 자궁에서 태어나 그녀의 자궁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혁명 기지가 되게 하는 모든 아기들의 울음이 그러하듯, 왈리드 다카Walid Daqqa가 아내 사나 살라메Sana’ Salameh를 통해 얻은 딸 밀라드Milad처럼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밀반출한 정액으로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이 그러하듯.

좁디 좁은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그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예컨대 당신이 300평방미터 남짓한 수감동에서 120명쯤 되는 수감자들과 함께 산다고, 적을 때도 다른 수감자가 다섯 명은 있는 길이 7미터, 너비 3미터짜리 방에서 수 년째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 방 하나에 당신의 집이 다 들어있다 (침실, 부엌과 조리 도구, 식탁, 거실, 화장실, 의자와 탁자, 식구들의 소지품, 찬장, 개수대, 휴지통, 빨랫줄 등이 다 있다). 그러니 당신의 개인 공간은 2평방미터가 채 안 되고 당신은 그 안에서 다른 이들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인간적, 조직적 활동 전부를, 당신의 삶을 꾸려야 한다.

그걸 해내려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 특히 좁은 공간에 몰아넣어졌을 때 — 생길 수 있는 온갖 분쟁과 위기를 극복하려면, 수감자들은 반드시 공통의 가치와 내적인 이해라는 기반을 일구어야 한다. 끝내 간수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것은 당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설계된 공간에 승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수감자들에게 있어 가장 원숙한 형태의 승리는 시간에 대한 주권을 선포하고 계속적인 반항과 대립을 통해 간수의 지배를 차단함으로써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에 있다. 육체적인 대가를 위해를 견디면서도, 그들은 자유의 환희를 느낀다.

훗삼 샤힌은 시온주의 감옥에서 21년을 보냈고, 2025년 2월 수감자 교환 협상을 통해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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