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기도가 허락되는가, 누구에게 말이 허락되는가 ― 팔레스타인·레바논과 인정의 정치학 (사메르 알라투트, 2026)

원문: Samer Alatout, “Who Is Allowed to Pray, Who Is Allowed to Speak: The Politics of Recognition in Palestine and Lebanon,” Jadaliyya, 2026.04.27.

이스라엘이 폭격한 레바논 남부 제진Jezzine에서 기자가 불에 탄 보호 장비를 들고 있다. 2026.03.28. 모함메드 자타리Mohammed Zaatari, 연합통신.

일견 무관해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하나는 예루살렘 내 성지들에의 입장入場과 관련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서안과 레바논에서의 언론인 처우에 관한 일이다. 하지만 함께 놓고 보면 둘이 같은 구조 속에 있음이 드러난다. 두 경우 모두 그저 금지나 폭력이 문제가 아니다. 누가 배제되었다면 바로잡아야 할 주체로 [공적 영역에] 출현하기를 허락 받고 누가 착오로 분류되지 않는 기본 조건의 일부로 여기지는지에 관한, 불균등한 인정의 분배가 관건이다. 이런 것들은 심층의 질서, 기도하거나 전장에서의 보호 받을 권리는 물론 진실과 도덕적 현전의 담지자로 인정 받을 역량 자체를 배정하는 질서가 표면에 드러나는 사례다.

결국 이것은 권력이 어떻게 주체를 생산하는지 ― 미셸 푸코의 말로 하자면 어떤 생명은 진실과 도덕적 주장의 담지자로서 판독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또 어떤 생명은 목소리 없는 인구로서 통치 대상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조건 ― 의 문제다.

기도와 도덕적 현전의 정치학

권력이 뭐라고 말하는지가 아니라 뭐라고 바로잡는지를 통해서 스스로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들이 있다. 이스라엘 당국은 종려주일 기도를 집전할 예정이었던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의 성묘교회 입장을 가로막았다. 이 불허는 출입, 이동, 종교 활동choreography of the sacred에 대한 통제를 드러낸다.

곧 외부에서 개입했다. 재이스라엘 미국 대사 마이크 허커비가 차분한, 거의 형식적인 논조로 이 건을 재고해야 한다는, 아마도 실수가 아니었겠냐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베냐민 네타냐후는 몇 시간만에 결정을 번복했다. 대주교의 입장을 허가했을 뿐 아니라 이후의 출입도 보장했다. 너무 깔끔한 전개다. 이는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정확히 무엇이 바로잡힌 것인가? 더 중요한 것도 있다. 그것을 바로잡을 지위에 있는 것은 누구인가?

같은 시기 같은 도시에서,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은 알-아크사 모스크 입장을 차단 당했다. 일시적인 혼선으로 내려진 제한 조치가 아니었다. 해명이 필요한 행정적 오류가 아니었다. 제한 조치는 라마단 기간 내내 이어졌고, 과거에는 생각조차 못 해본 일로 이어졌다 ― 이드[역주1] 기도를 알-아크사에서 올리지 않았다. 어느 대사도 개입하지 않았고, 번복도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차별 일화가 아니다. 물론 종교 차별이 맞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도적덕 주체의 차등적differential 생산에 관한 일화다. 누가 영적 현전의 담지자로 인정 받는지 ― 그런 이들을 배제하는 것은 바로잡아야 할 착오로 여겨진다 ― 누가 응당 배제되어야고 그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따라서 그 배제가 이목을 끌지 않는 인구로서 통치되는지에 관한 일화다.

기독교 대주교는 나타나고, 거부 당하고, 대변되고, 복권된다.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은 바로잡아야 할 실수로 여겨지지 않는 제한 체제에 흡수된다. 권력에게 한쪽은 출입권이 중요한 주체로 판독된다. 다른 한쪽은 기본 조건으로서 관리된다.

주체와 인구의 이 같은 구분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적인 것이다. 이 구분은 공간에의 출입 여부만이 아니라 인정 여부 자체를 조직한다.

진실, 증언, 그리고 신빙성의 위계

누구의 존재와 목소리가 신뢰할 만하다 여겨지는가에 대한 이 같은 차등적 평가는 또 하나의 층위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바로 진실의 층위에서다.

3월 30일 목요일, 이스라엘군에서는 알-마나르Al-Manar와 알-마야딘Al-Mayadden[역주2] 소속된 두 명(각각 알리 슈아이브Ali Shoeib, 파티마 프투니Fatima Ftouni)과 그들과 동행한 사진가(모하메드 프투니Mohamed Ftouni) 등 레바논 언론인 세 명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그저 사실을 서술하는 듯한,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없는 어조였다. 이 일은 비극이 아니라 성취로 여겨졌다. 번복도, 조사도, 재고를 요구하는 외부의 목소리도 없었다.

같은 즈음, 헤브론에서는 이스라엘 병사들이 CNN 취재팀을 붙잡아 정착자 폭력 취재를 막았다. 이 사건은 [주요 국제 언론 단체 등의] 즉각적인 항의를 불러왔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연루된 병사들은 해임되었고 취재팀은 취재를 재개할 수 있었다.

이토록 극명한 차이가 나는 것은 한쪽은 레바논 언론인이고 다른 한쪽은 미국 언론인이라서도 한쪽은 지역 언론이고 다른 한쪽은 국제 언론이라서도 아니다. 한쪽은 진실의 주체로 승인된 주체들이고 ― 이들의 증언에는 제도 상의 무게가 실리며 이들을 방해하면 정당성이 흔들린다 ― 다른 한쪽은 그 증언을 뒤탈 없이 없애버릴 수 있는 이들이라서다.

이것은 그저 권력의 위계가 아니다. 인식론적, 도덕적 지위의 위계다.

어떤 이들은 진실을 전할 능력이 있다고 인정 받는다. 증인으로서 그들의 존재는 보전되어야 한다. 그들의 증언은 소위 진실이라는 것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그 들 바깥에 놓인다. 그들이 죽어도 진실의 생산은 중단되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은 진실을 생산하는 과정에 속한다. 같은 원리가 종교에도 적용된다. 어떤 몸들은 반드시 보호되고 인정되어야 하는 기도를 올린다. 다른 몸들은 무기한 지연되고 연기될 수 있는, 불허 당해도 소란이 일지 않는 기도를 올린다.

이렇게 볼 때 권력이 규제하는 것은 영토나 이동만이 아니다. 권력은 인정을 규제한다. 누가 도덕적 대화 상대로서 [공적 영역에] 출현할 수 있는지를 ― 누구의 부상이 부상으로 여겨지고 누구를 배제하는 것이 잘못으로 여겨지며 누구의 경험이 행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남겨질지를 ― 규정한다. 마이크 허커비의 개입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바로잡는 일이 어떤 조건 하에서 가능해지는지를 드러냈다. 성지에 들어갈 권리가, 진실에 다가갈 권리와 마찬가지로, 이미 제 목소리의 중요성을 승인받은 이들에 의해 조정됨을 보여주었다.

개입의 부재 역시 그만큼 중요한 것도 바로 그래서다. 알-아크사를 둘러싸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던 것, 레바논 언론인들이 쉽사리 목격자가 아니라 표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이 체제 자체의 성립 조건이다.

왜 어떤 금지는 번복되고 다른 금지는 존속하는가 하는 질문은 보다 깊은 질문 하나를 제기한다. 애당초 진실과 도덕의 주체로 존재하도록 허락되는 것은 누구인가?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 한, 그때그때의 “바로잡기”는 지금의 수준 ― 기저의 질서를 흔들기보다는 단단히 하는 일시적인 수정 ― 에 머물 것이다.


역주1 이드Eid는 축제를 뜻하는 아랍어로, 여기서는 라마단이 끝난 것을 기념하는 사흘짜리 명절 이드 알-피트르(Eid al-Fitr; 금식을 끝내는 축제)를 가리킨다.

역주2 알-마나르는 헤즈볼라에서 운영하는 방송사다. 알-마야딘은 법아랍주의를 표방하는 방송사로, 일반 사업체이지만 헤즈볼라 등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 바로 뒤에 링크된 기사에 따르면 모하메드 프투니 역시 알-마야딘 소속이며 이스라엘군에서는 알리 슈하이브와 모헤마트 프투니를 헤즈볼라 군사 부문에 소속된 채 언론인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로 칭했다. 또한 슈하이브가 “레바논 남부 및 국경 지대에서 작전을 수행중인 이스라엘방위군의 위치를 유출”하기 위해 활동해 왔다고 주장하면서도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스라엘군은 “언론인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을 겨냥한 공습이었으며 민간인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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