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의 팔레스타인인: 갈 데라곤 난민촌 뿐 (아이함 알-사흘리, 2026)

원문: Ayham al-Sahli, “Palestinians of the South: No Home but the Camp,” Al-Akhbar, 2026.03.21.

하이탐 무사위Haytham Moussawy

그대 몇 번이나 길을 떠나려는가

무슨 꿈을 향해 가려는가

귀환의 날이 오면

어느 망명지로 돌아가려는가

어느 망명지로 돌아가려는가

— 마흐무드 다르위시, 「높이서 드리운 그림자를 기리며In Praise of the High Shadow

수르Sour에 위치한 세 곳의 팔레스타인 난민촌(라시디에Rashidieh, 부르즈 알-샤말리Burj al-Shamali, 알-바스al-Bass)이나 주위의 [비공식 난민촌 격의] 팔레스타인인촌 스물한 곳에 영웅담은 없다. 소개疎開 위협이 닥쳤을 때 주민 대부분은 가만히 있었다. 집을 벗어나지 않은 것은 갈 데가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믿음을 품고 있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왔던 길을 거슬러 돌아갈 ― 남쪽으로 가 국경을 넘을, 팔레스타인에 닿아 각자의 고향을 찾아갈 ― 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하지만 이번 전쟁은 그들을 반대쪽으로, 북쪽으로, 팔레스타인과 더 멀어지도록, 꿈과 멀어지는 쪽으로 떠밀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를 난민촌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넓게 보자면, 이번 전쟁은 남은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의 결의를 일소하는 것을 비롯해 이 일대의 미결 문제들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목적의 정점에 있는 것은 바로 난민이라는 형상을 끝장내는 것이다. 가자와 서안 북부, 예루살렘에서 이미 시작된 바와 같이, 디아스포라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내의 경우까지도 말이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그들을 표적으로 삼아 왔기에,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들은 평화라고는 모른다. 그들의 집단적 기억은 피로 물들어 있다. 살해, 봉쇄, 그리고 인간의 잔인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학살들로. 1982년의 사브라Sabra·샤틸라Shatila 학살, 텔 알-자타르Tel al-Zaatar의 파괴,[역주1] 그리고 곳곳에서 반복된 공격들로.

이번 같은 전쟁의 경우,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외에는 딱히 선택지가 없다. 심지어는 이들이 난민촌에 그대로 있어서 난민촌이 파괴당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나마도 이스라엘이 그들을 몰아내어 포화 속에 북쪽으로 떠밀기로 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폭력이 수반된다.

2024년 전쟁이 가라앉은 후로도, 최근 몇 달간 난민촌들은 계속해서 표적이 되었다. 레바논 보건부에 따르면 2025년 11월에 이스라엘은 아인 알-힐웨Ain al-Hilweh 난민촌을 공습해 젊은 남성 13명을 살해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훈련장을 타격한 것이라 주장했고, 하마스에서는 해당 공습의 표적은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곳으로 이미 알려져 있는 실내 미니 축구장이었다고 말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인 알-힐웨는 라시디에나 부르즈 알-샤말리가 그렇듯 [2006년] 7월 전쟁 때를 비롯해 전에도 공습 당한 적이 있다.

부르즈 알-샤말리는 지금도 1982년 7월 7일을 기억한다. 주민 125명 이상이 살해 당했다. 대부분 여성, 노인, 아동이었다. 대피소 한 곳에서만 9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근 동굴에서는 21명이, 다른 대피소에서는 7명이. 그밖에도 공격 받은 곳이, 이름조차 남지 않은 희생자들이 더 있다.

초기의 학살들 때는 팔레스타인인들도 그저 견디지만은 않았다. 저항했다. 그들에게는 힘이, 조직이, 각지에서 자생한 무장 세력이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대전차수류탄 아이들RPG Children’이다. 이 젊은 투사들은 1982년에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군의 전차를 파괴하고 군인들을 죽여 진군을 늦추었다. 그런 이들이 레바논 투사들, 민간인들과 함께 베이루트에서 80일을 버텼다.

끝내 베이루트를 떠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애 “팔레스타인으로”라고 답했고, 후일 정말로 팔레스타인에 돌아갔다. 하지만 그 후로 난민촌들은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팔레스타인의 여러 분파가 정치에 흡수되었다. 국외 혁명은 시들해졌다. 어떤 지도자들은 더는 무장 혁명을 생각하지 않았고, 아예 마음 속에서 지워버린 이들도 있었다. 종국에 난민들에게는 무사히 유럽에 닿기를 기도하며 보트를 타고 수평선을 향하는 길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수르의 팔레스타인인촌들을 위협하고 있다. 곧 사이다의 난민촌들도 똑같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전쟁이 격화되고 포탄이 곧장 난민촌에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들도 떠날 수밖에 없게 될 테다.

쓰라린 진실은, 난민 수천 명이 천막을 칠 만한 피신처가 없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각 분파들이나 팔레스타인 대사관 혹은 UNRWA의, 특히 레바논 정부의 실질적인 지원이 없기에, 이들은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줄곧, 물을 수밖에 없다 ― 팔레스타인인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고국 땅도 실질적인 망명지도 없는데. 존속 여부는 오로지 [이스라엘의] 뜻에 달려 있고 법의 제약을 받으며 전쟁으로 파괴되는, 임시 피란처에 갇힌 채인데.


역주1 “[1982년 레바논 침공] 초기에 이스라엘군은 4만여명이 거주하는 레바논 최대 규모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시돈 근처의 아인알힐와를 공격하였고, 난민들이 격렬히 저항하여 난민촌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1976년에는 텔알자타르 난민촌에서 팔랑헤당이 난민 2천여명을 학살한 바 있다.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금지한 국제인도법의 규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전쟁범죄이다.
팔랑헤 민병대는 이스라엘의 후원 속에 활동한 레바논 민병대로 1982년 전쟁에서 샤브라사틸라 난민촌에 쳐들어가 엄청난 수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9월 16일부터 18일 아침까지 민병대원들은 1,3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남녀노소 민간인을 살해하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군은 야간에 조명탄을 쏘아 난민촌 일대를 대낮같이 밝히면서 팔랑헤 민병대의 학살을 지원하였다. 그 주요한 책임자는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한 아리엘 샤론이다. 샤론은 예루살렘에 있는 알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여 이슬람에 대한 모욕적 행위를 함으로써 2차 인티파다의 계기를 만든, 팔레스타인인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은 인물이다. 나중에 수상이 되어 대팔레스타인 강경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스라엘 대법관 이츠하크 카한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는 샤브라사틸라 학살에 아리엘 샤론과 메나힘 베긴, 기타의 고위 장성들에게 직간접의 책임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후에 더 밝혀진 문서에 의하면 샤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대량 학살과 추방을 목적으로 팔랑헤당의 숙련된 살인자들을 난민촌에 투입하기로 오랜 숙고 끝에 결정을 내린 사실이 드러난다고 한다.” 성상희, 〈1982년 레바논 전쟁과 샤브라사틸라 대학살〉, 《평화뉴스》,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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