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은 저 하나로 끝내달라”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前이라는 말은 부러 넣지 않았다.)가 "보복은 저 하나로 끝내달라"고 한 모양이다. "저는 패배한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도 모두 감내할 것"이라고도 한 모양이다.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이어 검찰에서 (고발장이 접수된 것을 핑계 삼아) 당원들 전수를 상대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수사를 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고는 못할 것이다. 아니, 정치적 보복이라기보단 사적 보복이라는 말이 어울리겠다. 그러나 이정희 대표의 저 말이 지금의 상황에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국보법을 어거지로 적용한다고 해도, 간부도 아니고 전 당원을 상대로 수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은 단순히 한 당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적극적인 사상 검열이자 탄압이다. 거기다 대고 보복은 자신에게만 하라거나 패자로서 모두 감내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사태는 축소 시키고 자신을 선량한 사람으로 내비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가. 그에게 책임이 있다면 당 대표로서,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끝내 막지 못한 책임이 있을 뿐이며 그조차도 실은 그의 책임이 아니다. "민주주의 파괴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민주시민 여러분께 백 배 사죄드린다"고, "비판세력을 제거하고 말살하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 자체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박근혜 정권의 폭력을 함께 막아 달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이를 모르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보복은 저 하나로 끝내달라"는 것은 정치적 수사일 뿐인데, 아무리 봐도 긍정적인 의미는 갖지 못할 공허한 수사다. 자신의 잘못이 권력의 심기를 거슬린 탓에 당원들까지 곤란해 진 것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것일까. 그의 활약에 힘을 얻었던 수많은 이들에게 오히려 미안해야 할 말을 하는 것으로밖엔 읽히지 않는다.

똥인지 된장인지

이번 일로 그에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한국이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국가가 되었으면 한다는 발언(그나마도 나중에 수위 조절을 하려 애썼던 그 발언)으로 그를 약간은 다시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가 서울 곳곳의 농성장과 노점들에 어떤 짓을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에게 무언가 크게 기대한 적도 없고, 애초에 그와 나는 속한 선거구가 달랐으므로 투표용지를 들고 고민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이번 일은 놀라웠다.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어떤 정치적 계산이 깔린 일일 텐데, 아무리 뜯어 봐도 맞는 계산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수 기독교 세력의 지지 성명을 받아낸 것이 유일한 성과가 아닐까. 그들의 협조도 표도 아닌, 한 번의 지지 성명 말이다.

시장이라는 자리는 애매하다. 투표로 뽑힌 자리이자 정책을 입안하는 정치인이면서, 이미 정해진 법들, 시민들의 요구들을 효율적으로 집행해야 하는 행정 관료이기도 하다. 비리가 목표가 아닌 한에야 대부분 그렇겠지만, 그는 저 두 가지 일을 다 잘 하고 싶어 했고 다 잘 하는 티를 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놀라웠다. 그는 정책 입안을 거부했고,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인권 운운하며 살아오고 일해 온 사람이, 그 경력과 그 이미지로 시장이 된 사람이 ‘시장으로서는’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시민이 시장이라고 또 시민 말씀대로 하겠다고 하던 사람이, 시민들이 가결한 인권 헌장, 시민들의 운동과 시의회의 협조를 통해 제정된 청소년 인권 조례와 상통하는 그 인권 헌장의 공표를 거부했다.

당연히 보편적 인권의 보장을 원하는 (트랜스젠더의 인권까지도!) 착한 사람이지만 시장이라는 자리의 무게 때문에 그걸 내세우지는 못하는 균형 잡힌 사람, 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인간적으로 그를 믿었던 사람들에게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그리고 (믿음과 상관없이)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개인 박원순의 성향이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정치인 박원순, 관료 박원순, 서울시장 박원순이 어떤 입장들을 받아들이고 어떤 입장들을 시의 정책으로 선택하는지, 그 외의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이번에 내가 읽은 그의 입장은 두 가지다. 정치인으로서도 관료로서도, 그간 스스로 무엇을 표방해 왔건 간에 ‘논란’이 될 만한 것은 행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논란’이 될 만한 그것은 시민단체들이 맡으라는 것. 실은 앞의 것보다는 뒤의 것이 놀라웠다. 인권 변호사로 살았다고는 해도 지난 세대의 일이고, 체면상 폭 넓은 인권 개념을 갖고 있는 척 해 왔지만 실은 그 세대의 인권 개념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면, 게다가 뭔지 모르겠지만 정치적 야망을 갖고 있고 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위한 계산을 했다면, 많은 기성 정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을 낸 것일 뿐이니 앞의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뒤의 것은 그의 인생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민운동이라는 것을, 이번 일에도 불구하고(그들의 입장에서야 불구할 것도 없겠지만) 그를 지지할 많은 이들이 몸담고 있을 시민운동이라는 것을, 단숨에 깎아 내린다.

물론 그가 해 온 시민운동이라고 해 봐야, 말을 거르지 않고서도 겨우 정부 정책에 대한 ‘보완’ 정도였음을 생각한다면 이 역시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시민운동이라고 불린 한, 그가 해 온 것들 역시 정부보다 앞서 가며 정부보다 많은 이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지 정부를 받쳐 주고 정부의 도구가 되어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번 발언, 그런 문제는 시민단체들이 힘써야 한다는 그 발언은, 시민운동을 제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많은 이들과 많은 단체들이 그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인권이라는 것을 시민운동의 과제로 ‘내려 주시지’ 않았더라도 당연히 싸웠을 많은 이들이 싸우고 있다. 그 운동을 그는, 그 가벼운 한 마디로 모욕해 버렸다.

그는 자기가 무슨 선택과 무슨 말을, 무슨 계산에 따라 했는지 알고 있을까 궁금하다. 나로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우직하지도 않고 약삭빠르지도 않은 이 일련의 발언과 행위들을 나로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다, 는 그 한 문장이.

오늘 주운 쪽지

지하철 역을 걷다가 곱게 접힌 쪽지 하나를 주웠다. 여러 사람에게 밟힌 듯, 이미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어떤 편지일까 궁금해 하며 쪽지를 펼쳤다.

1. 설렁탕

2. 삶은 달걀

3. 아다다라고

    말해서

     2014

       11

       14

라고 적혀 있었다.

잠깐 생각하고야 알았다. 『운수 좋은 날』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백치 아다다』에 관한 것임을 말이다. 힌트가 아니라 아예 답이 적혀 있고 날짜도 있는 걸로 봐서 커닝페이퍼는 아닌데, 그렇다고 답안을 맞춰 보기 위한 메모도 아닌 것 같고. 


정말로 쪽지에 답을 적어 내는 쪽지 시험이라도 있었던 걸까.

글을 잘 쓰고 싶다

오랜만에,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고등학생 때의 일이었다. 그 전에는 일상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고, 시답잖은 글짓기 대회들에서는 종종 상을 받았으므로, 그런 생각을 할 일이 딱히 없었다. 지금과 똑같이, 노력 없이 떠오르는 글들을 적어 대기 시작했던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감각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도 온 몸의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문장들,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지는 문장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얼마나 되는 시간 동안 그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최대한 감각적인 문장들을 쓰려는 시도, 나름의 유행을 좇아 보려는 시도 정도는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글을 잘 쓰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아마 그리 오래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내 관심사는 늘 좋은 글을 쓰는 것이었지,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니다. 좋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며칠 전 문득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감각적인 글, 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든 것은 아니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것인지는 잘 모른다. 그저,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글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지는지, 대부분의 글을 두 번은 읽지 않는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글을 잘 쓰고 싶다.

충정로역

충정로 역 근처를 걸어서 지났다. 며칠 전에도 신호등이 있는 것을 못 보고 무단횡단을 했던 바로 그 횡단보도를, 이번에도 적색등이 켜진 중에 발을 디뎠다가 거두고, 겨우 지나 또 한 번의 신호를 기다렸다 길을 건넌 참이었다. 큰 횡단보도를 지나, 작은 횡단보도를 앞둔, 차도 위의 섬을 밟은 참이었다.

누군가 길을 쓸고 있었다. 허름한 차림, 빗자루를 들고 있었지만 쓰레받이는 없었다. 대신 왼손에는 무언가를 싼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아마도 쓰레받이 대신이었을 것이다. 그 섬은 늘 누군가가 잠을 청하던 곳이다. 얼굴을 모르지만, 허름한 차림으로 그곳을 쓸고 있던 이가 그 자리의 주인일 것이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해 했다. 척박한 삶에, 그는 왜 남들이 다니는 길을 쓸고 있는가.

제 먹을 것은 없어도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 같은 감동적인 것을 생각하는 재능은 없는지라 나는 결국, 그는 자기 방을 청소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멀찌감치 서서 주변을 둘러 봤지만 그의 이부자리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을 뿐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는 띄엄띄엄 노숙인들이 길에서 술을 마시거나 졸고 있었다. 철도 건널목에서는 신호수들의 착각으로 차단봉이 올라가 사람들과 차들이 길을 건너는데 기차가 온다는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경보는 자동으로 울리는 것이고 올 기차를 오지 않는 것으로 그들이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기차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차단봉을 올리면서 실수로 경보기를 켠 것인지는 알지 못한 채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