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인종학살 공격은 고의적으로 팔레스타인 사회의 뼈대를 무너뜨리고 있다.

여기 가자에 있는 우리는 영원히 달라져 버린 것 같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 너머에서 두 해 넘게 살면서 뇌 구조가 변해 버린 걸까.
가자 밖에 있는 친구가 안부를 물을 때마다 이렇게 답한다 ― 그 어떤 말로도 모자란 상황이야.
얼마 전에는 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쉼 없이 우리 머리 위에서 윙윙대는 이스라엘 드론 소리를 녹음한 1분짜리 파일을 보내주었다. 이 불안한 소리가 지난 열 시간동안 단 한 순간도 잦아들지 않았다고 상상해 보라고 있다.
거의 두 해 가량을 내리, 그런 끔찍한 심리적 압박에 짓눌리며 산다고 상상해 보라고도.
이런 절멸 속에서 어떤 정신이 생겨날까? 살아남는다 한들 회복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우리의 영혼에 가해진 부상은 뉴스 속보에 다 담을 수도 통계로 측정할 수도 없다. 우리 인간성의 저 깊은 핵에 자리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상실이다.
거리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이 인종학살 전쟁 전에는 대학 교수였던 친구다. 얼굴은 파리했고 옷은 몇 달이나 못 갈아 입은 듯했다. 표정에 생의 무게가 묻어 났다.
안부를 물었다. “어떻게 지내?” 그저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진부하고 공허한 질문.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의 존엄이 모욕당하고 있어. 고결한 이들은 허기와 절망에 목숨을 잃고 도둑들, 약탈자들만 흥하는 시대야”
남은 이들을 으스러뜨리기
그 한 문장으로 친구는 현실을 정확히 묘사했다. 이곳의 사회는 점령 당국이 만든 고의적인 정책에 의거해 재조립되고 있다.
이 인종학살을 시작하면서부터, 이스라엘군은 수천 명의 교수, 의사, 언론인, 온갖 분야의 공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 사회에서 지적, 사회적 지도자들을 없애 버리기 위해 계산된 전술을 구사했다.
동시에, 점령은 남은 이들을 으스러뜨릴 한층 더 교활한 계획을 고안했다. 보관소와 배급소로 갈 통상적인 배송을 차단하는 한편, 국제적 압박에 겨우 진입이 허락되는 몇 안 되는 식료품 트럭에 대한 약탈을 조장했다 — 도둑들에게 보내는, 트럭을 공격하고 물자를 훔쳐 도탄에 빠진 이들에게 터무니 없는 가격에 되팔아도 된다는 청신호.
이 정책은 전쟁과 도둑질로 부자가 되는 약탈자라는 새로운 사회 계급을 낳았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의도된 결과였다. 절멸의 메커니즘 중 하나는 공동체의 가치나 집단의 목표와 분리된 범죄 집단의 형성을 조장해 새로운 질서를 지배하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존경 받는 인물들 — 대학 교수, 교사, 의사, 개혁가 — 은 대개 트럭을 약탈하거나 미국의 위험천만한 식료품 공중투하를 쫓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찌꺼기라도 긁어모으지 않는 한 기아에 빠진다.
이런 모욕에는 특히나 잔인한 데가 있다. 한때 사회적으로 존중 받고 직업적으로 존경 받았던 이들이 이제는 매슬로Maslow가 말한 욕구 단계의 제일 밑바닥으로 떨어져 자신과 아이들이 먹을 질 낮은 음식 한 접시를 구하기 위해 고역을 치른다. 야만을 향해 미끄러져 나아가는, 인간 관계가 점차 무도한 생존 투쟁으로 결정되는 사회에 있는 스스로를 보게 된다.
가자의 어린이들은 달라졌다. 얼마 전, 거리를 걷다가 트럭을 쫓는 한 무리의 소녀들을 보았다. 한 아이가 외쳤다. “서둘러! 돌을 던지자!” 다른 아이가 경고했다. “위에 총 든 남자들이 타고 있어.” 세 번째 아이가 답했다. “괜찮아, 우린 안 무서워!”
아동기가 이렇게 뒤틀리는 것은 자연의 조화가 아니다. 점령이 고수하는 고의적인 정책에 따른 것이다.
식료품이 적기는 해도 모자라지는 않을 만큼 반입되던 때에는, 무사히 국제기구들에 전달되어 질서 있게 배급되던 때에는 결코 없었던 광경이다.
이스라엘은 구호품 배급을 맡았던 그런 기관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가자를 혼돈에 빠뜨리고 사회 안정의 토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는 — 사람들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야만으로 몰아넣어 도덕적 정당성을 잃게 하려는 — 의도가 확연하다.
정치 행위자들은 가자의 전면적인 붕괴를 멈추는 데에 필요한 결단력 있는 조치를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악마는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 정부들에 구호품을 공중투하하라고 속삭였다. 카메라에는 스펙터클을 제공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소량을 확보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영향을 거의 전혀 미치지 않는, 완벽한 작전이었다.
이루어지지 않는 소박한 꿈들
날마다 비행기 몇 대가 가자 어딘가에 짐뭉치를 떨어뜨린다. 아이들이 지켜보며 손뼉을 치고 환호를 한다. 하지만 비행기 한 대에 실리는 양은 아마 트럭 반 대 분 정도다. 가자에는 하루에 최소 트럭 오백 대 분 정도가 필요하다. 하루에 비행기 천 대 분 가량을 투하해야 한다는 건데, 열 대 분, 스무 대 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언론용 쇼 말고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아이들이 박수 치며 흥분하는 건 그저 새로운 경험이라서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이번 한 번은, 비행기가 폭탄이나 미사일을 떨어뜨리지 않고 지나간다. 가자 사람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일이다.
이번 전쟁 이전에는 하늘을 나는 것은 오직 이스라엘의 죽음의 비행기뿐이었다 ― 그래서 아이들은 비행기가 자신을 죽이지 않는 광경에 박수를 친다. 이런 의미에서, 공중투하는 물리적인 구호품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잠깐의 심리적 해방감을 주는 것, 그 잠깐 말고는 늘 짓누르고 있는 견딜 수 없는 압박을 조금 덜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쟁이 가자 어린이들의 영혼에 입힌 해를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아홉 살 먹을 조카 모아야드가 내게 물었다. “전쟁은 언제 끝나?” “나도 몰라. 그건 왜 물어?”라고 되물으니 조카는 “우리 지쳤잖아. 맨날 곧 휴전한다고 하는데 절대 안 하잖아.”라고 답했다.
전쟁이 끝나면 뭘 할 거냐고 물으니 라파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휴전을 하더라도 군인들은 라파를 떠나지 않을 거야. 거긴 국경 도시거든.” 나는 그렇게 말했다.
“삼촌은 왜 원래 살던 하마드시로 안 돌아가?” 다시 묻는 조카에게 “거기서 뭘 하겠어, 집이 다 무너졌는데.” 하고 답했다.
조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다시 지으면 되지?” “시멘트가 없어.”라는 말에도 어린 아이의 천진한 지혜는 꺾이지 않았다. “시멘트 없어도 돼, 무너진 돌무더기로 다시 지으면 돼.”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 이 세계도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함으로 생각할 줄 알았더라면.
얼마 후에는 모아야드보다 한 살 많은 누나 루아가 내가 신문을 읽는 소리를 들었다. 점량 당국이 가자에 얼마간의 달걀을 반입하도록 허가할 전망이라고 했다. 루아는 신이 나서 엄마에게 달려가 말했다. “달걀이 오면 이렇게 저렇게 다 요리해 줘, 프라이도 하고 삶기도 하고. 감자랑도 먹고 토마토랑도 먹고.”
엄마가 “그걸 하루에 다 먹어?” 하고 묻자 루아가 답했다, “응, 너무너무 그리웠어.”
가자의 다른 아이들, 그 부모들이 다들 그랬듯, 루아는 다섯 달이 넘도록 달걀을 먹지도 우유를 마시지도, 고기를 맛보지도 못하고 지냈다. 하지만 그 소식이 있고 이미 몇 주가 지났다. 아마 몇 달이고 더 흐를 것이다 — 루아의 그 소박한, 천진난만한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 아흐메드 아부 아르테마는 팔레스타인 언론인이자 평화 활동가다. 1984년에 라파에서 태어났으며, 알 라믈라 마을 출신 난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