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Eman Murtaja, “I sold my books to eat,” Electronic Intifada, 2025.09.04.

나는 열아홉 살이다. 살면서 일곱 번의 전쟁을 겪었다. 처음은 2008-2009년, 두 살 때였다. 2012년과 2014년에도 전쟁을 통과했다. 2019년, 2021년, 2022년의 공습을 목격했다.
사는 동안 그밖에도 여러 번, 가자에 사는 우리 사람들에 대한 잔인한 군사 공격이 있었다.
지난 두 해 가까이, 또 새로운 전쟁을 겪고 있다.
아직 살아 있다. 숨이 붙어 있다. 하지만 가자에서의 삶은 고통 정도가 아니라 순전한 생존이 되어버렸다. 전에 내게는 꿈과 책이 있었다. 계획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먹을 것을 원할 뿐이다.
이번은 이전과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 더 길고, 더 가혹하고, 허기로, 그리고 굶주림에 따른 침묵으로 가득하다. 인종학살 전쟁이다.
오로지 렌틸콩뿐
삼월에는 얼마간 고기를 남겨두어 보려 했다. 하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를 쓸 수 없었다. 첫 번째, 두 번째 기근 때 이미 겪어 본 일이었다. 첫 번째 기근 때는 아욱만 먹으며 살았다.
밀가루가 점점 자취를 감추었고, 구하기 어려워질수록 가격이 올랐다.
삼월에는 밀가루 1킬로그램에 12달러가 들었다.
유월 중순이 되자 거의 두 배로 뛰어 22달러가 되었다. 가진 설탕을 팔아 밀가루를 샀다. 열흘쯤 먹을 정도는 되었다.
초콜릿이나 과자 같은 사치품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유월 하순, 밀가루가 동났다.
아직 쌀과 렌틸콩이 10킬로그램씩 남아 있었다. 우리 여덟 명 — 부모님, 막내인 열세 살 마리암을 비롯해 여섯 남매 — 이 먹으려면 매일 쌀 1킬로그램, 렌틸콩 1킬로그램은 필요했다.
거의 한 달을, 렌틸콩과 쌀을 담은 같은 솥을 데우고 또 데웠다. 사실상 렌틸콩 수프만 먹으며 버텼다. 속이 부대꼈다.
칠월 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렌틸콩 수프도, 그 어떤 음식도, 구호품도, 희망도.
이웃들도 아무것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장이 텅 비었다.
집에서는 가족들이 시장에 물건도 없고 수중에 돈도 없는데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해야 할지를 궁리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형제들이 나서 온갖 수를 다 찾아보았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헛배라도 채워 몸뚱이를 속이려고 소금물을 들이켰다.
허기와 현기증
7월 13일, 이제는 폭격으로 검게 탄 껍데기만 남은 이슬람대학교의 번역 수업 기말 고사를 보았다. 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이 모든 일에도 굴하지 않고 새로 꾸릴 미래를 꿈꾸고 공부로 며칠 밤을 샜다.
가족들은 내가 힘을 내어 집중할 수 있도록 뭐라도 먹을 것을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날 길을 걷는 내 눈은 오로지 먹을 것만 찾았다. 너무 비싼 팔라펠을 파는 몇 사람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가자에서 팔라펠은 황금이요 고기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사치품이다. 사람들은 병아리콩이 떨어지자 렌틸콩을 써서라도 계속 팔라펠을 만들었다. 맛은 없었다.
다행히도 병아리콩이 돌아왔다. 하지만 내겐 아무리 쥐어짜도 샌드위치 하나 살 돈조차 없었다. 얇디 얇은 빵으로 싼 것도 3달러는 더 했다.
차를 탈 돈도 없었다. 프리랜서들이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곳까지 2킬로미터를 걸었다. 거기서 시험을 칠 요량이었다. 알-다라즈에 사는데 인터넷을 쓰려면 알-리말에 가야했다.
허기와 현기증에 시달리며 시험을 치러 갔다. 앞에 있는 문제보다 음식 생각을 더 하며 시험을 치렀다.
집에 돌아오자 허기가 한 층 더 심해졌다. 갑자기 책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 교재를 정리했다. 2월에 학기를 시작하면서 두 배는 되는 값을 주고 — 책조차도 물자 부족에 따른 가격 상승을 피하지 못했다 — 산 것들이었다.
책만이 내가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희망을 품고 한 쪽 한 쪽 줄을 그었던 책이었다. 선택은 내 몫이었다 — 책을 남겨 두거나 책을 팔아 나와 가족이 먹을 것을 사거나.
희망에는 대가가 있다, 고 생각했다.
꿈을 팔아 팔라펠을 샀다
대학교 왓츠앱 단체채팅방에 책 판매 글을 올렸다. 한 친구가 사마고 했다. 오로지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대학 교재를 팔아 … 팔라펠을 샀다.
지금 팔라펠 한 조각은 30센트다. 전에는 그 돈이면 열 조각을 살 수 있었다. 모두가 먹을 분량으로 쉰 조각을 — 물론 빵은 없이 — 샀다.
온전한 한 끼는 아니었지만 목숨은 부지시켜 주었다. 우리는 행복과 고통과 약간의 눈물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팔라펠을 먹었다.
허기 지고 기운이 없으면서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드시지 않았다. 당신들 몫을 우리에게 양보했다. 아팠다.
나는 다 먹고는 눈물이 터졌다.
그날 밤은 고됐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배가 고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물만 먹으며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세 시간을 걸려 시장에 다녀왔다. 콩을 약간 가져 왔다. 우리가 본 것 중 가장 크고 단단한 콩이었다. 세 시간을 삶아도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먹었다.
정말이지 삼키기 힘들었다. 다들 끝내 다 먹지 못했다.
그날, 7월 14일의 식사는 그것이 다였다.
그날 언젠가 손을 씻고 소금물이라도 마시려 일어섰는데 별안간 사방이 새카매졌다.
눈을 뜨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옆에 아버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내 얼굴에 붙은 머리칼을 떼며 몇 번이고 나를 불렀다, “딸아… 내 딸…”.
내 몸이 다 포기하려 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떨리는 몸에서 느껴진다.
그날 이후로 지끔껏 집에 먹을 거라곤 없다시피 했다.
팔월 들어 쌀과 콩 류가 시장에 돌아와 상황이 나아지기는 했다.
가격은 아직도 비싸고, 여전히 하루하루 과연 내일도 무언가 먹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생존은 국경을 지나 들어오는 구호품 소식에 달려 있다.
그 소식이 목숨을 줄 수도, 앗아갈 수도 있다.
전에는 이만한 굶주림을 겪어 본 적이 없다. 물론 배를 채우기 위해 그렇게나 열심히 공부한 책들을 — 내 꿈을 담은 책들을 — 팔게 될 줄도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은 인종학살은 괴물을, 우리 몸을 먹어치우는 굶주림이라는 괴물을 데려온다는 사실이다.
* 이만 무르타자는 가자에서 언론을 전공하는 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