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에서 서구의 동정을 얻기 위해 가자 인종학살을 홀로코스트에 빗대는 것은 이해는 가지만 궁극적으로 근시안적인 일이다. 인종학살을 식민 폭력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 놓을 때 진정한 연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두 해가 넘도록 “우리는 절멸 당하고 있다”고 외쳐 왔다. 이 선언은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발표에서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의 몸을 극단적인 식민 폭력의 현장으로 만들고 있는 이스라엘 군사 작전에 대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추방, 폭격, 기아가 빤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이런 행동을 인종학살로 칭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국제 기구들의 ― 폭력의 규모를 종종 과소평가하곤 하는 ― 도덕적 틀 을 한 번 통과하기만 하면 “적법한legitimate” 것이 되어 버린다. 인정에는 대개 지난한 과정이 뒤따른다. 평가, 검증, 자료 수집, 그리고, 사건을 연구하고 명명할 “신뢰할 만”하고 “중립적”인 권위자의 참여까지.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팔레스타인인의 고통은 어느 정도의 적법성을 획득할 수 있다. 사실상, 팔레스타인인은 제한 없이 죽을 수는 있지만 외부의 승인 없이 자신의 죽음에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이런 현실과 싸우기 위해 하마스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저항 인사들이 서구의 사전에서 가장 강력한 역사적 비유 중 하나, 즉 나치 홀로코스트를 이용해 이 인종학살을 설명하려 시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아 왔다.
식민 투쟁의 맥락에서 이는 그저 용어의 문제가 아니다 ― 전략의 문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나치 홀로코스트를 이용하는 하마스의 언론 전략은 일견 논리적이어 보인다. 대변인들이 노리는 것은 홀로코스트와 나치즘에 대한 서구의 도덕적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다. 서구 사회의 여론을 움직여 각국 정부가 가자의 고통을 종식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다.
하지만 두 해가 넘도록 그런 효과는 발휘되지 않았다. 왜일까?
서구의 정치적 상상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가장 중요한 도덕적 참조점이며 홀로코스트는 그 핵심이다. 서구의 인식론적 틀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해당 국가들은 그간 자신들의 도덕적 기준을 부과하고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인간성”이라는 개념의 근간을 주물러 온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바로 그 나라들의 식민사는 식민지 주민에게 가해진 인종학살과 기근으로 가득하다. 홀로코스트를 도덕적으로 절대화하는 것은 대량 살해 자체가 아니라 표적이 된 몸들의 정체성 ― 유럽인의 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 지구적 도덕적 틀은 유럽중심적인 토대 위에서 만들어져 왔다.
하마스에서 가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홀로코스트를 거쳐 말하려 한다는 데서 두 가지 역학이 드러난다. 첫째,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재앙 ― 서구 열강이 잔혹 행위의 원형으로 지목해 온 재앙 ― 의 렌즈를 통해 보여지고 있다. 이는 유독 팔레스타인의 고통에만 귀를 닫고 있는 도덕 첵의 권위를 강화하며, 필연적으로 서구의 트라우마에 우위를 부여한다. 둘째, 이 같은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서구 청중에게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은 당신들 자신의 역사와 닮았으니 우리를 믿어 달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는 서구의 고통이 모든 고통의 기준이라는, 그리고 다른 비극들은 신뢰를 얻으려면 그에 비교되어야만 한다는 관념을 강화한다. 여기에는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경험을 ― 그것이 벗어나고자 하는 도덕적 질서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 깎아내릴 위험이 있다.
비교 자체에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홀로코스트와 나치즘을 호명함으로써 가자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 비교의 척도가 애초에, 가장 잔혹한 행위의 자리에 영원히 홀로코스트를 놓아 두려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서구의 집단 기억 속에서 보호 받는 공간, 수십 년째 박물관, 영화, 문학, 교육에 투자해 유지되고 있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처사다. 나치 범죄의 엄청남은 그 무엇도 필적할 수 없는 것으로서 보존된다. 이런 틀에서는, 가자에서의 폭력이 그 기준에 못 미치면 ― 예컨대, 가스실이라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없으면 ― 회의론자들이 인종학살로 명명키를 거부하기 쉬워진다.
더욱이, 하마스가 종종 쓰는 시오-나치즘Zio-Nazism이라는 용어는 부정확하다. 인종적 월성 이데올로기를 펼치는 등의 유사성은 있지만 시오니즘은 정착자 식민 기획이고 나치즘은 그렇지 않았다. 둘 다 엄청난 범죄들을 저지르긴 해도, 그 실체나 목적은 서로 다르다. 이스라엘의 가자 정책들은 나치 방식의 직접적인 반복이 아니라 정착자-식민 폭력의 유구한 역사적 연속체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기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 비유는 이스라엘 폭력의 구조적 논리를 은폐하고 이스라엘이 그와 같은 비교를 깎아내리도록 허락할 위험이 있다.
하마스가 홀로코스트와 나치에 비교하기로 한 것은 물론 서구 국제 사회의 청중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연관되는 두 가지 문제를 드러낸다. 첫째는 서구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의 구조적 본성을 오독하고 있다는 점이다 ― 서구의 입장이 이스라엘을 역내의 유용한 동맹으로 위치 짓는 유구한 전략적, 식민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무지와 도덕적 맹목성에서 비롯된다고 전제하는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중이 이스라엘을 홀로코스트 같은 다른 도덕적 틀을 통해 보도록 설득한다면 서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을, 그리고 그 저항을 안보 문제로 여기는 것을 뒤집을 수 있다.
이는 또한 서구 대중의 압력이 일국의 정책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일이자 어떤 동맹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를 오판하는 일이며 외교력을 다른 이들이 만든 틀에다 모조리 쏟아붓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 있기에, 홀로코스트 비유는 그저 설득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기저의 전략적 방향 설정에 운동이 전장에서 얻은 것을 장기적인 정치적 이점으로 바꿔내지 못하게 막을 위험이 있음을 드러낸다.
저항과 해방은 그저 땅을 되찾는 문제가 아니다. 상상력을, 의식을, 언어를 되찾는 문제이기도 하다. 언뜻 절멸 전쟁의 와중에 논하기에는 부차적이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탈식민적 인식 틀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논제다.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예외적인 사건도 아니고 서구의 도덕적 상상력이 구축해 온 홀로코스트와 닮은 일도 아니다. 오히려, 기나긴 식민의 유산 ― 팔레스타인인의 운명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 남부 곳곳의 다른 이들의 운명 또한 주물러 온 ― 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자의 현재를 이처럼 보다 폭넓은 식민 연속체의 일환으로 보는 것은 지정학적 질서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동맹을 건설하는 데에 핵심적이다. 여기 이 권역의 피식민사에는 팔레스타인의 투쟁에 ― 두 해가 넘게 지나서야 ― 외교적, 정치적으로 지극히 제한적인 응답만을 내어 놓은 그 도덕적 질서를 강화하지 않으면서도 잔혹 행위를 폭로할 수 있는 비교 사레가 충분히 많이 있다.
우리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저 상징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 이름이 전략적 사고의 근본 방향을 설정하며, 그 이름이 우리가 사태를 어떻게 지각하고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틀을 탈식민화하는 것은 상징적인 목표가 아니라, 현장의 전술로 얻어낸 것을 ― 밖에서 부과한 말들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정한 말들로써 ― 장기적인 전략적 승리들로 옮겨 쓸 수 있는 정치적, 외교적 실천을 향한 전략적 경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