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Shoug Mukhaimar, “There is something worse than starvation in Gaza,” Al-Jazeera, 2025.08.24.
바로 이스라엘이 휴전 놀음으로 희망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다.

7월 어느 아침, 전화기에 쏟아지는 메시지에 잠에서 깼다. 모든 뉴스 채널이, 모든 소셜 미디어 게시물들이, 모든 대화들이 조심스런 낙관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헤드라인들은 저마다 “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다”, “휴전이 임박했다”, “대규모 원조품 호송대가 진입을 준비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당시 우리는 기근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터였다. 우리네 가슴 가슴을 스쳐간 조심스런 기쁨을, 메시지들을 타고 흐른 희망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이 희미한 안도감에 떨리는 말들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로 끝나는 걸까?” 한 친구가 물었다. “안전히 어떤 건지 우리가 기억할 수 있을까? 드디어 빵을 먹을 수 있는 걸까?”
감히 꿈꿨다. 휴전의 고요를, 따끈한 빵의 맛을, 온전한 끼니의 위안을 상상했다. 혹시나 하며 다시 문을 여는 가게들도 있었다. 가격이 조금 떨어졌다. 몇 달만에 처음으로 빵이 손에 잡힐 듯했다. 잠깐은, 삶이 거리로 돌아오는 듯했다.
가자에서는, 가장 호되게 당한 곳들까지도, 희망이 나타나면 숨결이 달라진다 — 겨우 몇 시간 동안의 일일지라도.
이웃 — 허기에 끝없이 울어대는 갓난 아이 하나를 포함해 혼자서 아이 일곱을 키우는 전쟁 미망인 — 은 내게 자신이 무력감에 눈물 짓는 동안 아이들은 배가 고파 우는 나날을 털어놓았다. 휴전 소문이 퍼지자 그녀는 아이들을 제대로 먹일 수 있겠다고, 그들의 고통이 끝나리라고 꿈을 꾸었다. 우리 모두 그랬듯, 그녀는 그 희망이 산산조각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모든 것이 무너졌다. 냉랭하게 종지부를 찍은 새 헤드라인이 우리의 운명을 확정했다 — “협상 실패. 휴전은 없다.”
미처 제대로 다시 열어보지도 못하고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밀가루는 다시 한 번 사라졌다. 가격이 마구 치솟았다. 가자 밖에서 언론은 여전히 “가는 중”인 원조품 호송대 이야길 했지만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말들. 텅 빈 트럭들. 텅 빈 손들.
그날 어떻게 가슴들이 무너졌을지 상상이 가리라. 그저 빵을 꿈꾸던 사람들의 희망이 어떻게 부서졌을지. 절박하게 아이들 줄 음식을 구하던 어머니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우리 눈을 밝혀 주었던 연약한 희망이 스러졌다. 오직 허기와 두려움, 적만만을 남기고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에도 여러 번 있은 일이었다. 이후로도 또 벌어진 일이었다.
바로 지난 주에도, 우리는 기다렸다. 하마스에서 제시했다는 휴전안에 대해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가 이번에는 한 마디라도 하기를. 견디기 어렵도록, 확실한 것이라곤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며칠을 보낸 이스라엘 정부는 불가능한 요구를 했다. 사실상 이번 협상 시도에 대한 사형 선고였다. 그 소식은 우리를 다시금 절망의 늪에 밀어넣었다. 기아, 피란, 상실, 비탄이 또 한 번 덮쳐왔다.
휴전 헤드라인 소동이 반복되는 게 어쩌다 생기는 일은 아닌 것 같다 — 이건 가자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또 다른 형태의 벌이다. 또 다른 형태의 고문. 우리는 폭격 당하고 굶겨지고 쫓겨난다. 이윽고 뉴스가 우리를 끝장낸다.
바로 앞에서 희망을 흔들어대다 이내 나꿔챈다. 우리는 매번 점점 더 약해진다.
무방비 상태의 인구를 점차 나가떨어지게 만들려는 고의적인, 체계적인 정책이다. 우리의 마음을 꺾어버리기 위해, 우리를 끊임 없는 불확실성 속에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서 내일을 위한 희망을 품을 인권을 앗아가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 — 희망이 솟았다가 산산조각 나는 — 악순환은 굶주림보다도 깊게 상흔을 남긴다.
새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굶주림은 우리를 더 세게 거머쥔다. 밖을 걸으면 사람들의 면면에 새겨진 그 손자국이 보인다. 눈물을 떨구는 남자들, 탈진해 길에서 쓰러지는 여자들, 너무 약해 놀지도 못하는 아이들. 굶주림은 그저 신체 상태가 아니다 — 영혼을 으스러뜨리는, 감당할 수 없는 압박이다.
어머니들은 더 이상 끼니를 계획하지 않는다. 식탁에 무언가 올리마고 약속할 수가 없으니까. 아이들은 좋은 소식은 이튿날 아침이면 상해버리기 십상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배운다. 원조품 공지가 나면 집집마다 마지막 남은 소지품을 팔지만, 결국 원조품은 들어오지 못해 빈 손이 되고 만다.
이렇게 몇 번이고 짓밟는 짓은 정부나 언론에 대한 불신을 낳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희망 자체를 갉아 먹는다. 많은 이들이 이제는 “이게 언제쯤 끝날까?”가 아니라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는 걸까?” 하고 묻는다.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에 따르면 가자에 있는 사람 전원이 심각한 수준의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5세 이하 아동 모두가 급성 영양실조를 겪고 있다. 공식적으로 기근이 선포되었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봉쇄 조치는 원조품이 하마스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대의 동맹인 합중국 정부는 물론 이스라엘 당국자들 스스로도 저항 투사들이 원조품을 약탈한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하는데도 말이다.
국제앰네스티에서는 이스라엘의 가자 봉쇄를 “집단 처벌”이자 “전쟁 범죄”라고 말한다. 제네바협약은 집단 처벌과 강제적 기아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물을 수밖에 없다 —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데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온 지구가 2백만 명이 굶겨지고 폭격 당하고 존엄을 빼앗기는 것을 빤히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침묵은 육중하다. 굶주림만큼이나, 마음을 으스러뜨린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용인할 만한 것이라고, 우리의 삶이 사라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이런 범죄를 저지른 이들만이 아니라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관하고 용납한 이들에게도 유죄를 선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