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들어가며
-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은 유의미한 진전인가?
- 최근 잇따르는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이 국제법 하에서 각국이 자국의 법적 책임에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 유럽이 아랍-이스라엘 정상화 진전에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이용하고 있나?
- 왜 두 국가 안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자결의 기본 틀로 남아 있는가 —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들어가며
2023년 10월 이후,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은 최근 역사에서 가장 재앙적인 수준의 인도주의 위기를 낳았다 — 세계 열강에 힘입은 인종학살이, 그에 맞서 시작된 강력한 전 지구적 연대에도 굴하지 않고,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가차 없는 폭격 및 대규모 추방과 함께, 이스라엘 체제는 고의적인 굶기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통합식량안보단계분류는 가자가 이미 “기근famine 기준선”을 넘었으며, 기아, 영양실조, 질병이 확산돼 예방 가능한 죽음이 급증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이런 상황은 부수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하고 추방하고 절멸시키려는 목적으로 편성된 이스라엘의 정책에 따른 일이다.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이 같은 재앙에 대응해, 유럽의 몇몇 국가가 팔레스타인국the State of Palestine을 인정하거나 인정하겠다는 신호를 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프랑스에서 9월 UN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할 예정이라고 공표했다. 영국은 이스라엘이 휴전을 준수하고 두 국가 안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으면 프랑스와 같은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24년에 시작된 이 상징적인 인정의 물결은 유럽 열강이 현재 인종학살 앞에서 —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스라엘 체제에 전적인 면죄부를 주다 못해 도덕적, 물질적, 외교적 지원을 해 온 끝에 — 자발적으로 취하는 유일한 조치인 듯하다.
왜 지금인가? 어떤 정치적 혹은 전략적 이해관계가 이 인정의 물결을 이끌고 있는가? 그리고 점령과 아파르트헤이트의 구조, 그것을 유지시키는 인종학살 체제를 그대로 남겨 둔 채 서류상으로 팔레스타인계 국가를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번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알 샤바카 정책 분석가 다이아나 부투와 이네스 압델 라제크, 알 샤바카 공동대표 야라 하와리와 함께 이런 질문들을 다룬다.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은 유의미한 진전인가?
다이아나 부투
지금 인정이 이어지는 것을 역사적 맥락에 놓고 보아야 한다.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라는 압박은 인종학살에 대한 응답으로서 2024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이스라엘의 2008-09년간 가자 공격 후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lestine Authory(PA)는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빈손 신세임을 알게 되었다. 협상에 기반엔 두 국가 틀이 무너지고 당장의 평화 과정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마흐무드 압바스 대통령은 국제 무대로 돌아섰다.
가망 있는 전략이 없는 상태에서, 압바스는 인정 캠페인을 시작한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PA — 과도 기구로서의 역할이 오래 전에 만료된 — 에 힘을 실어 주는 것, 그리고 정치적 존재감relevance을 보여주는 것. 이스라엘 체제의 안보 하수인임이 드러나버린 PA에게는 정당성이 시급했다. 동시에 이 캠페인은 유럽 국가들에 이스라엘과의 갈들 — 제제나 통상금지 같은 조치가 필요한 갈등 — 을 피할 길을 열어주었다.
2024년 들어 아일랜드 스페인, 노르웨이, 슬로베니아에서, 보다 최근에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계속되고 있는 인종학살에 대응해 인정을 단행하면서 이런 패턴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PA와 유럽 국가들 모두에 득이 되는 전략이다, 서구 열강에 책무를 다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길을 제공하면서 [PA의] 떨어진 권위를 다시 세워주는.
그 결과는 정치적 쇼다. 인정이 국제적인 행동을 불러오리라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다. 나서서 인종학살을 막지 않는 세상이, 그저 UN 회원국 하나가 다른 회원국을 점령한다고 행동을 취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네스 압델 라제크
최근 유럽의 연이은 인정 속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자결self-determination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PA에 대한 정치적 보증이다. 예컨대 노르웨이의 인정은 PA와 그 제도적 기반을 중심에 둔 것이었다. 이 같은 재구성은 팔레스타인의 자결을 약화하고, 국가 지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법적 기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국경, 영공, 천연자원, 영토를 통제하는 것은 PA가 아니다 — 이스라엘이다. 노르웨이가 인정한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통제 하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기구, 주권도 민주적 정당성도 없는 기구다.
더 나쁜 것은, 인정 같은 상징적인 언사가 종종 도덕적인 용기에서 비롯된 담대한 행동으로 비추어진다는 것이다. 실은 외교적인 위장막일 뿐이다. 친이스라엘 로비스트들마저도 그런 것은 지상의 현실을 바꾸는 데에는 아무 영향도 없다고 인정한 바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 제제를 부과할 의무가 있는 국가들이 그 의무를 방기하면서도 무언가 하는 듯 보일 수 있게 해 준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전체 전략에 부응한다 — 파괴, 추방,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이 점령 권력이 정한 조건 하에서 빵 부스러기를 두고 협상하도록 밀어붙이기. 1990년대의 오슬로 협약에서부터 오늘날 가자의 인도주의 메커니즘들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체제는 줄곧 술책을 부려 의제를 통제해 왔다. 팔레스타인 국가에 대한 상징적인 인정은 그저 그러한 조작에 상을 주는 일일 뿐이다. 합중국과 이스라엘의 당국자들이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두고 격노를 표한 것은 물론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가자에서의 인종학살에는 응보가 아니라 의례가 주어지고 있다. PA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고 서구 국가들은 상징적인 언사를 받아들인다. 그러는 사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정의도 국가 지위도 주어지지 않고, 그저 실제 현실과 국제 사회의 보여주기식 조치 사이의 간극이 넓어져 갈 뿐이다.
야라 하와리
각국이 “팔레스타인국”에 대한 지지를 선언할 때 실제로 무엇이 인정 받는 것인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이는 주권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외교적인 허구다. 그 심장부에서는 식민 분할colonial partition 서사, 역사적 팔레스타인을 지리적, 정치적 고립지들enclaves로 조각내는 서사를 명문화하는 허구 말이다.
이런 류의 인정은 그저 실효성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위험하다. “팔레스타인”을 서안과 가자로, 팔레스타인 민족을 실제 우리의 반도 안 되게 축소하는 협소한 분할주의적 틀을 강화한다.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 인정은 연루에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런 선언들에는 대개 제제, 무기 거래 금지를 비롯해 점령이나 아파르트헤이드를 해체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는 전혀 동반되지 않는다. 대신 이스라엘이 전쟁 범죄나 체제 상의 폭력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비호하면서, 법적 영역에서 상징적인 언사로서 작동한다.
인정이 국제적 논의장에 들어올 수 있게 해주고 외교의 운동장을 평평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주장은 순진한데다 오해를 조장한다. 국제 질서에서 각국은 평등하지 않다. 합중국은 이스라엘이 결코 책임을 지는 일이 없도록 비토권을 행사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제일 동맹으로서 팔레스타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에 임하는 일은 결코 없도록 보증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주권국가가 아니다. 우리는 식민화된, 포위 당한, 점령당한 채로 가자에서의 인종학살을 마주하고 있다. 진지한 정치적 관여라면 반드시, 존재하지도 않는 국가의 허상이 아니라 이런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종학살과 기아 — 그 상당 부분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인정을 내어주는 그 국가들이다 — 의 중지 대신 아무도 실현시켜 줄 생각이 없는 국가 지위라는 환상에 집중하라고들 한다. 이 분리가 말해주는 바가 너무도 많다.
최근 잇따르는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이 국제법 하에서 각국이 자국의 법적 책임에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이네스 압델 라제크
대부분의 정부들은 여전히 이른바 중동 평화 과정Middle East Peace Process이라는 낡은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아직까지도 팔레스타인을 논하는 방식을 지배하고 오늘날 내려지는 거의 모든 정책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틀이다. 예컨대 사우디 아라비아와 프랑스가 지난 칠 월에 UN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두 국가 회담에서도 그랬다. 행사 전체가 갈등 “쌍방”이 있다는 관념을 중심으로 틀지어졌다. 촤근에 UN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가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안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나란히 사는” 두 국가 안이라고 말한 데서 드러나듯, 이 틀은 지금까지도 팽배하다. 이런 언어는 점령, 아파르트헤이트, 일방적인 침략이라는 현실을 생략하고 지금의 상황을 동등한 양측 간의 상호 분쟁인 양 취급한다.
식민자와 피식민자가 있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침략자와 공격 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점령도 아파르트헤이트도 모른 체 한다. 이런 허위적 등식은 그저 오해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 위험한 정치적 덫이다.
평화 과정 패러다임은 분쇄되어야 하며, 대신에 각국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미 법적으로 분명하다.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CJ)의 권고적 의견은 2004년 안에서나 2024년 안에서나 두 국가 틀의 정치적 교착에 대안을 제공하는 법적 책임성의 틀을 강조한다.
실제로, ICJ의 법적 의견은 국제 사회에 그저 중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할 책임을 부여한다. 그런데도 세계 열강은 소위 중립과 가짜 대칭이라는 안전 지대에 머무르며 이스라엘을 응분의 결과로부터 보호하고 책임성을 회피하고 있다. “양쪽” 서사가 이어지는 한 이스라엘은 갈수록 더 면책 받고 인종학살은 그저 확대일로를 가게 될 것이다.
다이아나 부투
특히나 불편한 것은, 심지어 이 상징적인 인정마저도 양자 협상이라는 논리의 덫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팔레스타인은 자유의 모든 면면을 협상해야 한다는 관념에 뿌리 박고 있다. 마치 해방이라는 것은 항상 조건이 달려야 하고 점진적어야 하며 식민자들의 중재를 거쳐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논리에 붙들려 있다.
특히 유럽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더 깊은 책임을 면하려 해 왔다. 유럽 정부들은 계속해서 마치 자신들이 중립적인 관찰자인 양, 자신들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양 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중립이 아니다. 그들은 점령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점령이 계속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종식되도록 노력해야 할 국제법 상의 의무가 있는 제3자 행위자이다. 그 의무를 무시하기로 결정한 이들인 것이다.
야라 하와리
각국에서 팔레스타인 국가보다도 인종학살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국제법 상으로 인종학살을 인정한다는 것은 분명한 의무를 수반한다 — 그것을 예방하고 멈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들이 그런 의무를 다할 거라는 환상을 품고 있지야 않지만, 적어도 법적 틀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실질적인 압박을 가한다.
그러지 않고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은, 편리하게도 책임을 면할 수 있게 해준다. 인종학살 방지 협약Genocide Convention과 국제 인도주의 법에 따른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뒤따르는 구체적인 부담 없이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모양새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보다 넓게 봐도,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에 — 심지어는 일부 동맹이나 옹호자들 사이에서도 — 과도하게 많은 힘이 투여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가 국제법 무대에 계속해서 관여할 거라면, 책임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책임성이야말로 가자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을 막을 가망이 있는 유일한 길이자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할 유일한 방법이다.
덧붙이자면,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은 더한 폭력을 막는 것과는 일절 무관하다. 가자에서 — 바로 지금 —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는 달리 법적인 무게가 있는 것도, 어떤 결과를 수반하는 것도 아니다.
유럽이 아랍-이스라엘 정상화 진전에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이용하고 있나?
야라 하와리
최근에 새로운 서사가 생겨나는 걸 목도하고 있다. 바로 유럽의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이 사우디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방안으로 기능할 수 있으리라는 서사다. 이럿듯, 인정은 팔레스타인의 권리나 정의에 관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역내 지정학에서 협상 카드로 쓰인다. 간단한 발상이다 — 팔레스타인을 인정하는 유럽 국가가 늘어날수록 사우디 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정당화하기 쉬워진다.
매우 거래적인 논리이고, 밑지는 장사다. 앞에서 이미 논의했든 인정은 기껏해야 상징적이다. 인종학살 종식, 점령 해체, 혹은 불가양의 권리 실현에 있어서 팔레스타인인에게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우디 왕태자 모하메드 빈 살만에게 있어 인정은 오랫동안 바라 왔던 것 —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 — 을 덮어줄 편리한 정치적 위장막을 제공한다.
바로 그래서, 지금은 매우 위험한 순간이다. 반反정상화 기조 —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선설된 정착자-식민 체제라는 이해를 뿌리로 하는, 한때 역내의 원칙이었던 입장 — 은 국가 수준에서는 거의 완전히 폐기되었다. 대신에 보상 체계가 자리 잡았다 —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면 국사적, 경제적, 혹은 외교적 보상을 얻게 되리라. 특히 합중국으로부터.
아브라함 협정은 이 논리를 명문화했다. 이 협정은 이념적인 재편성이 아니라 거래다. 이 협정에도 불구하고 역내의 대중적인 정서는 여전히 강력히 친팔레스타인, 반정상화다. 하지만 정부들은 계속해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은 정의의 도구가 아니라 정치적 위장막으로 쓰이는 인정이다. 유럽 각국의 인정은 아랍 체제들,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계속해서 인종학살, 기아, 점령을 마주하고 있는 와중에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필요한 구실을 제공한다.
다이아나 부투
정상화와 관련해 충격적인 것은, 이스라엘은 대체로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더는 대중적인 논의거리조차 아니다. 심지어 2020년에 아브라함 협정 하에서 정상화 거래들이 행해지던 중에도 이스라엘 여론은 거의 반응이 없었다. 열광하지도, 큰 논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요컨대 해당 협상들은 대중의 실제적인 관여를 끌어내지 못했다. 대중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다. 협정에 서명한 국가들이 얻은 이익은 안보 협약과 정보 협력 정도였는데, 아마 애초부터 그것이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이스라엘 대중에게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관계 정상화 전망은 그다지 중요한 소식이 아니다. 말 그대로, 별 일이 아니다. 사우디 왕태자와 유럽 지도자들이 — 이제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과 연결해서 — 정상화를 추진할수록, 대중의 현실과는 멀어지는 느낌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이스라엘인은 그런 움직임에 반대하며, 이는 팔레스타인에 연대해서가 아니라 정상화가 그들에게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랍권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은커녕, 아랍 국가 이름을 다섯 개 이상 댈 수 있는 이스라엘인도 많지 않다. 그들의 문화적, 정치적 지향은 오래 전부터 아랍 세계가 아니라 유럽이었다.
사실 우리는 이상한 역설 앞에 있다. 역내와 서구의 지도자들은 마치 그것이 근본적인 무언가를 바꾸어 놓기라도 할 것처럼 열을 올려 인정과 정상화를 재촉하지만, 현지에서 인정과 정상화는 — 팔레스타인인들에게도, 이스라엘인들에게도 — 거의 무의미하다. 특히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그 지지층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래서 핵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은 실질적인 해법이나 유의미한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시급하다면서도 인종학살을 멈추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다시피 하는, 겉치레, 보여주기식 행동이다.
이네스 압델 라제크
아랍 국가들의 관점에서, 특히나 정상화에 생각이 있는 경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식민 확장은 팔레스타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점령군은 레바논에서 — 남부를 점령하는 — 군사 행동을 강화하고 있고, 시리아에서도 작전을 계속하며 자리를 굳히고 있다. 골란 고원 합병은 꾸준히 정상화 되어, 면책의 한계선이 전에 없이 멀리 밀려났다. 갈수록 아랍 체제들에 불편하고 역내 역할을 해치는 상황이 되어 온 것이다. 유의미한 결과를 끌어내기에는 충분치 않은 모양이지만 말이다.
1973년 10월 전쟁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가 피점령지를 되찾기 위해 협동 군사 작전을 펼치고 아랍 체제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합중국 및 그 동맹국들에 항의하며 원유 금수 조치를 취했던 것과 같은 대응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집단적 압력을 가했던 그 순간이 이제는 아득한 기억 같이 느껴진다. 오늘날에는 대립하려는 이는 없다시피 하고, 오직 상징적 언사와 면피성 외교만 남았다.
이스라엘이 초토화 정책을 계속 이어가면서 지나온 길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땅을 합병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몰아대는 와중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형국에서는 작디 작은 진전, 얘컨대 구호품 트럭 딱 한 대를 가자에 들여보내는 것조차도 밝은 앞날을 예고하는 획기적이고 박애적인 행동으로 여겨진다. 아랍 체제들은 이런 논리를 추종하고 있다.
“경제적 평화”나 “가자 재건” 같은 과거의 틀들이 이스라엘 체제로 하여금 나중에 국제 기부자들이 재정을 댈 걸 알고서 군사 행동에 나설 수 있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밀가루나 연료 같은 기본적 필수품의 전달은 전략적 개입으로서 행해지고 있다.
왜 두 국가 안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자결의 기본 틀로 남아 있는가 —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야라 하와리
그 답의 일부는 이 전략 — 두 국가 틀, 인정, 분할 — 을 펼치는 지도부가 선출된 혹은 대중이 지지하는 권한을 갖고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 지도부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 실질적인 적법성이 없으며 그 어떤 민주주의적 의미에서도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 특히 지금 시점에 — 이런 질문들을 해야 한다. 분할과 식민 분절의 논리 너머에서 주권이란 어떤 의미인가? 우리에게 수십 년 동안이나 부과되어 온 “실현가능성”의 제약을 거부한다면 자결이란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
팔레스타인의 국가 지위와 국제적 인정만이 가망 있는 길이라는 말을 듣고 또 듣는다. 하지만 하나는 영원이 손 닿지 않을 곳에 있고 다른 하나는 외교적인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틀은 우리를 해방시켜주지 않는다. 우리를 가두고, 작아지게 하고, 우리의 투쟁을 정의 실현이 아니라 현상 유지에 투자하는 이들의 구미에 맞게 뜯어 고친다.
물론 인종학살 가운에데서는 이런 대화를 하는 것조차 어렵다. 가자에 있는 이들이 실시간으로 폭격 당하고 굶고 절멸 당하는 동안 정치적 지평을 논쟁한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특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또한, 바로 그래서 이런 논쟁이 더욱 시급하다고도 생각한다.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 우리의 이른바 지도부에게 곧장 들이미는 것이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다. 우리의 주권은 우리를 조각 내는 것을 토대로 하는 틀에 의해 규정될 수 없으며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을 상상해야만 한다 — 그 틀이 내어주려는 것은 해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가두어 두려는 것이다.
이네스 압델 라제크
많은 서구 정부들이 반증이 차고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무죄 추정을 넓혀 가면서 이스라엘을 두 국가 틀을 따르는 선의의 행위자 취급한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의 외교, 군사 전략의 핵심은 기만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줄곧 믿을 만하고 권위 있는 행위자로 취급되고 있다. 시린 아부 아클레 암살을 덮어버리든, 병원 폭격을 정당화하든, 아니면 UNRWA의 신뢰도를 공격하든, 이스라엘 체제는 꾸준히 거짓 서사에 의지해 책임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 왔다. 체계적이며 또한 고의적인 패턴이다.
그런데도 많은 서구 국가는 이런 서사들을 액면가대로 받아들인다. 이스라엘 공식 문서를 종종 외교부에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히브리어로 받는데도 이스라엘의 브리핑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당연히 믿을 만하다고 여긴다. 단순히 정치적 편향이 아니다. 뿌리 깊은, 종종 인종화된, 세계관이 — 이스라엘은 현대적이고 이성적이고 믿을 만하다고 받아들여지고, 반대로 팔레스타인은 비합리적이고 의심스러우며 혹은 아예 소모품이라고 여겨지는 세계관이 — 반영된 일이다.
이 논리가 근본적으로 해체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체제가 선한 신념으로 행위한다고 여겨지는 한 진지하게 책임을 추궁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국제 사회가 기만과 식민 확장이라는 이스라엘의 패턴을 직시하기 전까지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정의는 — 또한 존재하고 저항할 그들의 권리에 대한 인정은 —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다이아나 부투
오슬로 이후의 협상들이 있었던 시기에 종종 이렇게 묻곤 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어째서 우리 해방의 전망을 역사상 우리 고향땅의 겨우 22%에 자리한 국가로 — 팔레스타인인 태반을 배제하고 실질적인 귀환의 길은 주지 않는 국가로 — 제한해야 하는가?
돌아오는 답은 — 예나 제나 — 정착촌은 암이라는 것이었다. 암, 그런 단어를 썼다. 이 암을 막으려면 일단 정착촌 확장, 서서한 식민화를 멈추고 국가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조치가 — 어떤 조치든 — 필요하다는 논리가 뒤따랐다.
인정을 둘러싼 작금의 논의에는 이런 논리가 베어 있다. 외교관들은 암을 막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인정이 합병을 멈추거나, 정치적인 한계선을 긋거나, 적어도 정착촌 확장을 동결시킬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정은 암을 막지 않았다. 일회성의 상징적 언사, 권력의 균형을 바꾸지 않으면서 정치적 자본을 지춣하는 일이다. 결국에 이스라엘은 더 큰 정당성을 얻어 간다.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제제, 무기 금수, 법적 제제를 촉구하는 진지하고 지속적인 캠페인을 벌여 이스라엘 체제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PA에 선출적 정당성이 없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역량이 없는 것은 아니다. PA 지도부는 항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싸울 수도 있었다. 그러는 대신, 정의 추구는 차치하기로 — 때로는 심지어 방해하기로 — 한 것이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정치적 요구의 상한선이 “우리를 인정하라”라면, 나중에 어떻게 제제나 정의를 요구하는 데로 돌아갈 수 있겠나. 상징적인 인정이 충분하다고 해버리면, 미래에 실질적인 책임을 요구할 때 무슨 말을 하든 누가 믿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