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를 설명하는 여러가지 언어가 있을 것이다. 내게서 그것은 공적공간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흔히들 말하듯, 여성을 좋아하면서도 ― 아마도 성애의 대상으로 ― 여성혐오를 할 수 있다. "아마도 성애의 대상으로"라고 썼다. 이것이 일종의 비꼼임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대상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면, 나와는 다르면서도 어떤 실체를 가진 존재로서 대할 수 없다면, 관계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저 말이 비꼼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성애를 성욕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욕망의 대상, 으로 삼는다는 것은 대상에게서 주체성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공적공간과 무슨 상관이람, 하고 나는 궁금해 한다. 생각지 않는 방향으로 한 문단이 흘렀다. 되잡아 보자면, 공적공간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공적공간이란 사람이 자신을 사람으로서 드러내는 공간이다. 언어로써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공간이고 타인의 의견에 대해 판단하는 공간이다. 욕망의 공간이 아니란 뜻이다. 여성을 좋아하면서도 여성혐오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두 가지 행위는 다른 층위에서 벌어진다. 여성을 좋아하면서도 여성혐오를 한다는 것, 그것은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을 뿐 함께 공적공간을 이루는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섬혐오 ― 그것은 여성의 말을 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 여성의 의견을 의견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을 언제든 처분가능한, 주체성 없는 사물로 여긴다는 것이다. 욕망의 공간에만 여성을 포함시킬 뿐, 나머지 삶의 공간에 ― 공적공간에 여성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자들을 사랑하지만 청소년 참정에 반대하는 교사, 꼬박꼬박 봉사활동을 가지만 장애인 탈시설에 반대하는 자원봉사자, 얼핏 형용모순 같아 보이는 이 존재들은 이런 방식으로 가능해진다. 사랑하는 것보다 적대하는 것이 더 정치적인, 심지어 정치적으로 옳은, 경우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