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생활은 자유다, 그는 그렇게 외쳤다. 장애인 탈시설 콘서트 <자유로운 삶, 시설 밖으로!>에서였다.
몇 년 전 학생 단체의 활동가로, 혹은 좌파 매체의 기자로 살 때의 일이다. 한 번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의 농성장에서 한 사람을 인터뷰했고 한 번은 시청 앞의 농성장에서 한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인터뷰를 했던 그에게 시설에서 나와 제일 좋은 점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유! 라고 짧게 외쳤다. 어떤 것을 할 수 있어서, 어떤 것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하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유라는 추상 명사가 그에게는 아마도 아주 구체적인 무언가였을 것이다. 그 자유를 갖고서 그가 한 일은 대단치 않았다. 난생 처음으로 자기 옷을 자기가 골랐다고 했다. 스물 몇 살 때의 일이라고 했다. 그 다음으로 한 일은 공원에서 한데잠을 자며 농성을 하는 일이었다.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농성이었다.
시청 앞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때엔 우리 둘 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가던 중 누군가가 그에게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었는데 도망 갔어,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같이 살던 시설에서 나갔다는 뜻일까. 있었는데, 나 이렇게 되고 도망 갔어. 그것이 그의 두 번째 대답이었다. 언제 그렇게 되셨어요? 열 몇 살이라고 했더라,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날 그는 삼십 대 후반이거나 사십대 초반이었다. 스무 해도 더 지난 일이었다. 스무 해 전에 깨어진 관계를 두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러웠을까. 장애를 얻고, 시설에 들어가고, 시설 안에서만 생활하고. 아니, 어쩌면 목숨만을 부지하고. 그 긴 시간이 멈춰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그 긴 시간 동안에는 삶이랄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면,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또 두어 해 전에는 종로구청 앞에서 나도 종종 한데잠을 잤다. 장애인 시설 비리를 고발하고 관할관청인 구청의 조치를 촉구하는 농성이었다. 그곳에서는 종종 눈물을 흘렸다. 종일 누워서 벽만 바라본다는 어느 장애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종일 묶인 채 지낸다는 어느 장애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침에 주는 약을 받아 먹으면 멍한 채로 하루가 간다는 어느 장애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종종 눈물을 흘렸다. 삶이 저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종종 한데잠을 잤다.
세 농성장에서 만났던 여러 사람들은 이제 시설에서 나와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서 만났던 이들 중 몇은 나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자립생활은 자유다, 라고 외쳤지만 온전한 자유는 아닐 것이다. 콘서트 무대 옆에 걸린 문구들 중에는 시설이 천국이 아니듯 지역사회도 천국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 활동보조가 없어서,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시설이 없어서, 일자리가 없어서, 장애등급제가 있어서, 부양의무제가 있어서, 어쩌면 나와서 산다는 것 또한 지옥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와 살기를 택했고 다른 이들도 나오게 하기로 결심했다. 자유! 그 짧은 외침은 그들 모두에게 구체적인 무언가였을 것이다. 내게는 실체 없는 그 단어가,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을, 단단한 무언가일 것이다. 그들의 감각을 믿었기에 나는 오늘, 장애인 탈시설 선언 콘서트 <자유로운 삶, 시설 밖으로!>에 다녀왔다.
세 번째 단락에 적은 대화를 하며 ‘도망’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품었지만 예나제나 나는 그런 것을 묻지 않으므로 그냥 넘겼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 생각을 했지만 묻지 않았으므로 그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방금 이 글을 다시 읽으며, 또 생각했다.